조정래 / ‘한강4’중에서
< 1 >
아버지는 음식을 남겨 버리는 것을 돈을 헤프게 쓰는 것만큼 싫어했다. 돈은 쓸 때다가 꼭 맞춰 제대로 써야지 단 1원이라도 허튼 돈을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버지가 누누이 강조하는 지론이었다. 아버지의 혁대가 30년이 넘어 곧 끊어질 것처럼 닮아져 있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와이셔츠가 10년이 넘어 소매 끝에 보푸리기가 일고 있는 것을 알게 된 것도 회사에 들어온 다음이었다.
“돈은 돈을 귀히 여기고 아낄 줄 모르는 인간들한테는 절대로 붙지 않는다. 사업은 무작정 돈을 벌어들이는 것이 아니다. 첫째로 돈을 귀하게 여기고 아낄 줄 아는 것이 완전히 몸에 배야만 실한 사업가가 될 수 있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보여준 것이 혁대고 와이셔츠 소매 끝이었다. 그러데 그건 바로 보여주기 쉬웠던 것뿐이고 시계·라이터·만년필 같은 것들이 그냥 내버려도 누가 집어가지 않을 정도로 고물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회사에 몸담기 전까지는 자식들에게 그런것을 전혀 모르게 했던 것이 이상했다.
"커나는 자식들 기죽여서는 안 되니까 그동안에는 네 어머니가 다 알아서 조종했고, 이젠 철들어서 사업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으니까 정신무장을 단단히 해야지."
아버지가 돋보기 너머로 지그시 쳐다보며 무뚝뚝하게 한 말이었다.
그러고 보면 어머니는 아버지를 대신해 그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온 셈이었다. 어머니는 늘 자식들의 불만과 원성의 대상이었다. 교복과 가방은 교체기간이 무조건 3년이었고, 참고서는 일절 사주지 않았고, 공책과 연필도 직접 사다놓고 배급을 했다. 용돈을 빼 쓰려고 눈속임할 수 있는 길을 아예 차단해 버렸던 것이다. 대학생이 되어 좀 나아지긴 했지만, 용돈을 받을 때마다 꼭 용도를 밝혀야 했고, 그때마다 '돈은 적어도 세 번은 생각하고 써야 한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그런데 회사에 몸담고 보니 그건 어머니의 말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이었다.
"현장들에 무슨 말썽은 없더냐?" 박부길은 이쑤시개로 이를 쑤시며 길을 건너다가 물었다.
'예, 별 탈 없이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
너희들이 부지런히 도니까 정신들 차리는 모양이구나. 그렇지만 겉만 훑어서는 안 돼, 현장에 있는 것들은 무조건 한통속으로 짜고 돌며 속이려고 드니까 잘못하다간 허수아비 되기 십상이야."
"예, 명심하고 있습니다."
"미쟁이들 쎄멘트벽돌 깨서 버리는 것, 목수들 못 함부로 취급해 바닥에 마구 떨어뜨리는 것, 그런 것까지 세세하게 살펴서 관리 잘 못하고 있는 것들을 적발해 내야 돼. 그런 관리가 대목대목 잘못되면 건축비 1할이 날아가는 거야. 그럼 순이익 전부가 없어지는 거고, 그건 회사가 망하는 길이야. 잘못을 적발하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당장 목을 쳐! 시범쪼로 말야."
"예, 알겠습니다."
박준서는 현장에서 낭비되고 있는 자재들이 건축비의 10퍼센트와 맞먹는다는 아버지의 말을 언제나 잊지 않고 있었다.
(P.46~48)
< 2 >
도시락을 가지고 온 첫날 나윤자는 점심을 굶는 공원들 중에서 이미순이 제일 마음에 걸렸다. 이미순은 시다 시절부터 점심때마다 함께 물배를 채우며 속말을 나누어온 사이였다. 나윤자는 도저히 혼자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나윤자는 이미순을 데리고 날마다 배고픔을 달래며 시간을 보냈던 옥상으로 올라갔다.
"나 오늘부터 점심을 싸오게 됐어." 나윤자는 이미순에게 보자기에 싼 도시락을 보였다. "아니, 어쩐 일이냐?” 이미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취직한 우리 오빠가 어제 월급을 타웠거든. 오빠는 점심 굶는 것부터 해결하고 나섰어.” "그렇구나….”
이미순이 눈길을 떨구며 혈색 없는 파리한 얼굴이 쓸쓸해졌다.
“미순아, 이거 나하고 함께 먹자.”
"......
이미순은 나윤자를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왜 그래?”
“말이라도 고마워. 난 먹은 거나 똑같으니까 더 말하지 말어."
"얘, 우린 친구잖아. 넌 굶는데 나 혼자서 어떻게 먹니. 반반씩 똑같이 나눠 먹으면 되잖아."
이미순은 갑자기 아래로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얘, 미순아, 미순아!”
나윤자는 뒤쫓아가다가 그만 발을 멈추었다. 이미순은 계단을 어찌나 빨리 뛰어 내려가고 있는지 더 쫓아가다가는 그녀가 계단에서 굴러 넘어질 것만 같았다. 나윤자는 이미순의 모습이 사라진 계단을 내려다보며 그녀의 마음을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도 남의 밥을 무작정 얻어먹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한편으로 자신이 점심을 싸오게 된 것이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 같아 이미순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미순은 앞으로도 점심을 싸올 가망이 없었다.
나윤자는 밥을 떠넣으면서도 이미순의 기침이 못내 걱정스러웠다. 다른 사람들은 별 관심이 없으니까 몰랐지만 이미순이 잔기침을 하기 시작한 것은 벌써 1년이 넘은 일이었다. 감기가 걸린 것처럼 가끔씩 콜록거리던 잔기침은 차츰차츰 더해가 얼마 전부터는 모두 이상하게 여길 만큼 심해졌다. 그러다가 마침내 오늘은 ‘그 병'이 아니냐는 의심까지 사게 되었다.
오전 일을 하고 나면 누구나 온몸이 먼지투성이가 되었다. 눈썹에까지 먼지가 희끗희끗 내려앉는 것은 털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눈이 간질간질하고, 콧속이 스멀스멀하고, 목이 칼칼해지는 것은 쉽게 해결이 안 되는 고역이었다. 그런데 그런 증상은 시간이 갈수록 심해져 오후 3~4시가 지나면서부터는 번갈아가며 재채기를 해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밤에 일이 끝날 즈음에는 눈이 씀벅씀벅해지며 앞이 흐려졌고, 콧속은 막힌 듯 답답하며 숨쉬기가 거북했고, 목은 칼칼하다 못해 따끔거리며 목소리가 잠겼다. 다음날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으레 서너 차례 기침이 나며 가래가 솟았다. 가래는 거무스름한 먼지덩어리였다. 그러나 그 누구도 창 쪽에다 먼지가 나갈 수 있는 조그만 구멍이라도 하나 내자고 하지 못했다. 사장은 그런 말을 들어줄 리 없었고, 그런 말을 했다가는 쓸데없는 불평을 한다고 미운털이 박혀 쫓겨나기 십상이었다.
너 먼지 그거 조심해라. 탄광 광부들이 석탄가루 마시고 폐 나빠져 평생 고생하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눈치껏 밖에 나가서 맑은 공기 쐬는 수밖에 없어. 너 심호흡 알지? 그래, 밖에만 나오면 그걸 많이 해. 내가 군대에서 배운 거니까 틀림없이 효과가 있어.” 오빠가 수시로 하는 말이었다.
나윤자는 오빠의 말대로 하려고 애썼다. 밖에서 팔을 흔들며 심호흡을 해보면 기분이 한결 좋아지고는 했다. 그래서 나윤자는 먼지구덩이를 피해 점심도 밖에서 먹고 싶었다. 그러나 옥상에 올라가 밥을 먹을 수는 없었다. 옥상은 점심을 굶는 공원들이 끼리끼리 모여 신세타령을 하고, 딴 공장으로 옮길 소식을 주고받고 하는 장소였다.
(P.64~69)
< 3 >
“글쎄, 지금 정권은 이승만정권하고는 다를걸, 이승만은 군대를 잘 쓸 줄 몰랐지만 현 정권은 군대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어. 여차하면 또 계엄령이니 뭐니 선포해 대고 군인들이 즉각 서울로 몰려들 거야. 그동안에 잘 봤잖아. 그 방면에는 이골났어."
"하긴 그렇지. 근데 허진이 혹시 잡혀간 것 아닐까? 체포된 학생들이 엄청 많다던데.”
"그럴지도 몰라. 집에 가봐야 되지 않겠어?"
"그래야지. 그 친구 심정은 이해는 하는데, 이번 데모에 너무 열성인 것 아닌가?" 이상재가 가방을 들며 고개를 갸웃했다.
"허진으로서는 어쩔 수 없을 거야. 자기 할아버지와 집안을 생각하면 그 심정이 어떻겠어. 일본놈들이 백배사죄하며 돈을 싸짊어지고 와도 시원찮을 판인데, 오히려 이쪽에서 사죄 같은 건 상관없이 어서 돈이나 좀 달라고 매달리는 형국 아니난 말야. 그러니 자기 할아버지가 짓밟히고 모독당하는 것 같고, 괜히 헛된 일 한 것 같고, 또 엉망이 된 집안 꼴을 보면 얼마나 기막히겠어. 우리가 허진의 심정을 다 알 수는 없는데, 어쩌면 죽고 싶은 심정으로 데모를 하는지도 몰라.” 유일표는 밖으로 나서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 허진을 볼 때마다 이 세상의 정의고 진실은 무엇인가, 그런 것이 과연 있기는 있는 것인가, 많이 회의하게 돼."
"정의와 진실은 현실 속에서 끝없이 패배한다. 다만 긴 역사 속에서 승리할 뿐이다."
"어쭈, 철학과 헛 다니는 건 아니네. 그거 누구 말이야?"
"몰라. 그저 줏어들은 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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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소리긴, 넌 데모로 회담을 중단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천만에, 이건 4·19데모하고는 달라. 정부에서는 그 돈을 어서 빨리 받아와서 경제발전을 시켜야 우리 모두가 잘살 수 있게 된다고 선전하고 있고, 일반 대중들은 그 말에 귀가 솔깃해져 있단말야. 그 증거가 바로 4·19 때와는 달리 일반인들이 이번 데모에 호응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야. 넌 어떻게 생각해?""
"그거 제법 탁견인데? 어쩐 일이야?" 허진보다 유일표가 먼저 반응했다.
"나 같은 우생이 그런 걸 혼자 생각해 낼 수 있겠어? 이 교수 저교수한테 물어서 비빔밥을 만든 거지."
"일표 너도 그렇게 생각하니?" 허진이 언짢은 기색으로 물었다.
"글쎄, 그동안 데모를 하면서도 일반인들이 별 반응이 없는 걸 이상하게 생각했었는데 이 말 듣고 보니 꽤나 일리가 있는 것 같은데.”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대중은 뜻밖에도 약삭빠른 데가 있으니까”
고개를 떨구는 허진의 얼굴이 착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P.91~95)
< 4 >
“우릴 잡혀놓고 두당 2만 마르크씩 빌려갔으면 우리 물먹여선 안 되지.”
박갑동도 열을 올렸다.
"어디 그것만이야. 그 많은 사람들이 매달 송금을 하고 마르크가 또 얼마야, 낯간지러워 내놓고 말은 않지만 우리 같은 애국자가지금 어디 있어.”
구 씨도 불만스럽게 털어놓았다.
그들이 자칭 ‘애국자’ 운운하는 것은 괜한 허풍이거나 술주정이 아니었다. 서독에서는 한국에 상업 차관으로 1억 5천만 마르크를 주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그 돈을 빌리려면 한국은 제3국 은행의 지급보증을 세워야 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를 지급보증 해주고 나설 은행은 세계의 그 많은 은행들 중에서 단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한국 정부가 내놓은 궁여지책이 광부 5천 명과 간호원 2천 명을 서독에 파견하는 것이었다. 경제 부흥으로 노동력이 부족한 서독에서는 광부나 간호원은 이미 혐오 기피 직종이었다. 더구나 서독에 취업하고 있던 일본 광부들이 1960년까지 완전히 돌아가 버려 그 공백이 컸다. 그런 형편에 서독은 한국의 조건을 안 받아들 일 리 없었다. 그래서 광부와 간호원 7천 명의 3년간 노동력과 노임을 담보로 서독 은행은 지급보증을 섰고, 한국 정부는 1억 5천만 마르크의 돈을 빌려가게 되었다.
(P.232~233)
< 5 >
두 개의 불덩어리는 하나가 되었다. 그 불덩어리는 맹렬한 불길을 일으키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너울거리며 타오르는 불꽃은 휘감기고 솟구치고 뒤엉켜 용틀임하며 붉은색에서 푸른색이 되고, 푸른색에서 흰색으로 열도를 더해가고 있었다. 이윽고 흰색의 불꽃은 마지막 섬광을 내뿜으며 절정의 경련을 일으키더니 허망할 만큼 빠르게 잦아들며 자취를 감추었다. 불꽃이 사라진 불덩이는 재로 변해가고 있었다.
육신이 재로 사그라져가는 아스라한 의식 속에서 유일민은 이성이나 의지라는 것이 얼마나 허약한 것인가를 느끼고 있었다. 서로를 갈구하는 사랑 앞에서 그런 것들은 참으로 미약하고 부질없는 다짐일 뿐이라고 여겨졌다. 사랑의 완결감을 향해 치달아가는 육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어쩌면 영혼과 별개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영혼이 아닐까 …. 유일민은 의식의 잿더미에 묻혀 임채옥을 영원히 갖고 싶은 욕심의 싹이 파랗게 돋아 오르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오빠, 우리 어디로 도망가요." 임채옥이 유일민의 가슴으로 파고들며 속삭였다. 유일민은 임채옥을 꼭꼭 끌어안았다.
"돈은 다 준비해 놨어요.. 급해요. 엄마 아빤 강제로 결혼시키려고 해요. 약혼식이 며칠 안 남았어요.”
“채옥이…. 내 말 똑똑히 들어. 난 말야....., 난 거미줄에 걸린 한 마리 곤충이야. 아무데로도 도망갈 데가 없어. 그리고 아무데도 취직이 안 돼, 신원조회가 붙는 데는. 채옥이 못 만나는 동안 은행, 신문사, 학교 같은 데 취직해 보려고 무진장 애를 썼어. 하지만 평균 A학점짜리 성적표도, 시험 합격도 다 소용없었어. 어지간한 직장은 나라에서 다 신원조회를 하도록 만들어놨으니까. 그리고, 그뿐이 아니야. 만약, 만약에 나와 채옥이가 함께 산다고 해봐, 언젠가 우리 아버지가 나타나거나, 아니면 우리 아버지 아는 사람이 찾아오게 되면 어떻게 되지? 이건 절대로 가상이나 공상이 아니야.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날 수 있는 현실이야. 지금도 간첩사건이 계속 터지고 있잖아. 그땐 우리 집만 망가지는 게 아니야. 채옥이네 집, 채옥이 아버지의 사업도 다 망하고 말아. 이건 과장이 아니야. 서독에 광부나 간호원으로 가는 데도 친가 8촌, 외가 8촌까지 좌익했던 사람이 하나만 있어도 못 가게 돼 있어. 그러니까 채옥이 아버지가 나를 반대하는 건 과한 게 아니라 당연한 거야. 채옥이도 이런 현실을 똑똑히 보고 정신차려, 우린 더 이상 안 돼."
(P.242~244)
< 6 >
“미스터 유는 일본 못 가게 생겼더군.” 커피를 시키고 나서 손 사장이 꺼낸 말이었다.
"예에?" 놀라는 그 순간에 유일민은 신원조회'라는 충격에 부딪혔다.
“미스터 유는 모르고 있었던 모양인데 집안 식구들 중에 사상적으로 문제가 있으면 신원조회에 걸려 여권이 안 나와, 특히 일본은 조총련이 있어서 위험시하거든."
사실 유일민은 그 문제가 단순 여행의 여권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줄 몰랐었다.
"죄송합니다. 그 문제에까지 저촉될 줄은 몰랐습니다."
"아니, 괜찮아. 일본은 딴사람들과 동행하면 되는데……….” 손진권사장은 무거운 얼굴로 담배에 불을 붙여 두어 번 빨고는, “문제는 말이야, 무역회사 특성상 앞으로 회사가 잘될수록 해외여행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신분이어야 하는데 말이야……, 미스터 유는 어떻게 생각해?” 그는 난처함을 피하려는 것인지 눈길을 딴 데 두고 말했다.
“예,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사표를 내도록 하겠습니다."
또 발밑이 와르르 무너지는 절망감과 현기증에 휘말리며 유일민은 사장이 원하는 대답을 빨리했다.
"음, 내 입장을 이해해 주니 고맙군, 실력 좋고 영어도 잘하고 성실해서 함께 큰일 한번 해보려고 했었는데, 힘내게. 자아, 그럼….”
손 사장은 몸을 일으키며 손을 내밀었다.
유일민은 또 사정없이 떠다미는 세상의 비정을 느끼며 상대방의 손을 잡았다. 회사에서는 컬러 인쇄기 다섯 대와 봉제용 고속 재봉틀 40대를 일본에서 수입하기로 되어 있었다. 사장은 수입시장 개척과 실습을 위해 동행자로 자신을 뽑았었다.
아아, 차라리 죽을 수가 있다면……..
유일민은 온몸에서 기운이 다 빠져버린 상태로 부르짖었다. 더는 살고 싶지 않았고, 살아갈 자신도 없었다. 자신은 왕거미의 튼튼한 거미줄에 걸린 한 마리 곤충만이 아니었다. 커다란 돌 밑에 깔린 한 마리 개미였고, 이 세상 사람들에게 따돌림당하는 악성 전염병 환자나 다름없었다.
도대체 이 땅에 나 같은 신세의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해가 저물어가는 번잡한 거리를 터벅터벅 걸으며 유일민은 자신과 함께 잡혀 들어갔었던 그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서울에 사는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전국적으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감시당하고, 따돌림당하고, 버림받으면서 뿔뿔이 흩어져 음지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이 땅은 사막이고 감옥이고 유형지인 것이다.
(P.339~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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