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취해서.....
"좋아, 홧김에 소 잡아먹는 거야."
"그렇지, 홧김에 서방질도 하고."
그들은 다투듯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그들은 별말이 없었고, 빈 잔은 빨리 돌았다. 거의 쉴틈 없이 열 잔쯤 마시자 김선오는 가슴에서 소줏불이 타오르며 술기운이 머릿속을 휘도는 것을 느꼈다.
"야아, 씨팔 말이야, 드립고 치사해서 살겠어 이거!" 누군가가 술기운을 토해냈다.
"그래, 드럽고 치사하긴 한데, 그 꼴 더 안 당하려면 다들 붙고 보자구 이기면 충신이요 지면 역적이란 말은 역시 진리니까."
"맞어. 승자의 웃음은 누구나 부러워하지만 패자의 눈물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아. 자아, 마시자, 내일을 위해!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김선오는 목이 타드는 심한 갈증으로 눈을 떴다. 머리가 어지러우며 깨지는 것처럼 아프고, 무슨 끈끈한 것이 맥질된 것처럼 속이 느글거리고 메스꺼운 것이 뭐가 곧 넘어올 것만 같았다. 김선오는 얼굴을 훔치며 눈을 바로 뜨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자신도 알몸이었고 옆에 잠들어 있는 여자의 상체도 알몸이었다. 김선오는 후닥닥 이불을 덮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여기가 어딘가....., 그 친구들은 어떻게됐는가......
강김선오의 머리는 일시에 작동을 시작했지만 떠오르는 생각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떠들어댔고, 젓가락으로 술상을 두들기며 노래를 불러댔고, 그러고는 언제쯤 술집에서 나왔는지, 어떻게 이곳에는 왔는지 기억은 까맣게 먹통이었다. 술이 과해 끊겨버린 의식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되살아나지 않는다는 것을 김선오는 몇 번의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여기가 사창가라는 것을 짐작하며 천천히 눈을 떴다. 천장 낮은 방은 좁았고, 누런 포대종이가 발라진 벽은 낡고 때가 절어 지저분했다. 한쪽 구석에 놓인 경대가 유일한 가구였고, 여자옷들은 벽에 걸려 있었다. 종3은 이렇지 않았는데, 여긴 도대체 어딘데 이리 지저분한가.
김선오는 두리번거렸지만 주전자나 물그릇은 보이지 않았다. 그냥 참아보려고 했지만 갈증은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아가씨, 이봐 아가씨, 나 물 좀 마셨으면 좋겠는데." 김선오는 옆으로 누운 아가씨의 흰 어깨를 가만가만 흔들었다.
"아이고 지겨워. 잠 좀 자게 내버려둬요. 세 번씩이나 사람을 못살게 굴고도 모자라 그래요!"
아가씨가 짜증을 부리며 팔을 내쳤다.
김선오는 그만 머쓱해져 눈을 껌벅거렸다. 세 번씩이나 그래 놓고도 전혀 기억이 없다니, 이건 또 희한한 첫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다른 사소한 행동도 아니고 여자관계인데도 까맣게 기억나지 않게 하는 술의 괴력에 으스스했고, 한편으로는 술에 그렇게 곤죽이 되어서도 그 일을 세 번이나 해냈다는 것에 은근히 기분 뿌듯해졌다.
"아가씨, 물 좀 가져와, 물! 나 목타 죽겠어. 물 좀 가져오라구, 물!" 김선오는 목소리에 맞추어 아까보다 훨씬 세게 아가씨를 흔들었다.
"아유 그냥 참고 자요. 사람 미치겠네."
아가씨는 앙칼지게 내쏘면서도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살결은 이런 데서 함부로 굴리기에는 아까울 만큼 희었다.
"대학생이라 특별히 봐주는 거예요." 아가씨는 알몸에다 자루를 뒤집어쓰듯 원피스를 꿰입더니 밖으로 나갔다.
김선오의 청각과 시각은 동시에 놀라고 있었다. 자신이 대학생인 것을 어떻게 알았으며, 저 아가씨가 저러고 시내를 돌아다닌들 누가 그 속이 알몸인 것을 알 것인가 하는 생각과 함께 옷의 마술적 효능을 새롭게 느끼고 있었다.
"벌써 날이 밝아오네. 아이 추워." 물사발을 김선오에게 건넨 아가씨는 어깨를 부르르 떨더니 옷을 훌렁 벗어던지고는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아가씨, 내가 대학생인 거 어떻게 알았어?" 김선오는 속 거북한 트림을 하며 아가씨를 내려다보았다.
"학생중 맡겼잖아요." "내가?" 김선오는 놀라서 얼굴이 굳어졌다.
“어머나, 그걸 모르세요? 학생들이 단체로 맡겼잖아요."
"단체로?" 상상만으로도 그 광경이 끔찍스러워 김선오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네에, 우리 집하고 옆에 옆집까지 단체입장했잖아요. 그렇게 기억이 안 나세요?"
"아이고 세상에, 외상 줄 게 따로 있지 느네 주인들이나 느네들이나 다 한심하다."
김선오는 어이없어하며 재떨이에서 꽁초를 골라 불을 붙였다.
"어머, 담에 판검사 되면 우리 잘 봐주겠다면서 단체로 땡강부린게 누군데 그래요?" 아가씨는 벌떡 일어나 앉다가 젖가슴이 드러나자 얼른 이불을 끌어다 가리며, "술집에서 학생증 잡아주나 여기서 잡아주나 마찬가지잖아요. 대학생 못 믿으면 누구 믿어요" 하며 그녀도 꽁초를 골랐다.
다들 술기운에 못할 소리 없이 다 해버린 게 너무 창피하고 면구스러워 김선오는 담배만 빨았다. 술집에 학생증을 잡히고 외상술을 마시는 건 예삿일이었지만, 이런 데서 학생증을 맡기고 하룻밤 재미를 보았다는 말을 가끔 들었지만 허풍인 줄 알았었다. 그런데 자신들이 떼지어 그 짓을 한 것이다. 술기운이 좋긴 좋았고, 떼거리의 만용 또한 가관이었다.
"여기가 어디냐?" “차암, 그리도 정신이 없으세요? 창신동 쪽 청계천이에요."
"음 고향이 어디야?"
"아이고 대학생 오빠. 시로도(미숙자·초보자) 티 안 내도 되니까 그런 것 묻지 말아요. 시로도일수록 스무고개 놀이 하는 것처럼 고향이 어디냐, 이름이 뭐냐, 나이가 몇이냐, 부모가 뭐 하냐, 형제간이 몇이냐, 벼라별 것을 다 시시콜콜이 물어대는데, 그게 동정을 해서 그러는지 호기심이 나서 그러는지 영 알 수가 없어요. 싸구려 니나노집에서부터 이런 데까지, 화류계에서 노는 애들치고 그런 걸 진짜로 대는 애들은 하나도 없다구요. 오빠도 괜히 내 거짓말 듣느라고 애쓰지 말고 슬슬 떠날 채비나 해요. 난 오빠한테 너무 시달렸으니까 한숨 더 자야겠어. 학생증 빨리 찾아가고, 맘에 있으면 미스 진 찾아요." 아가씨는 이불을 뒤집어쓰며 누웠다.
조정래 / '한강3‘중에서
* 위 글 제목 ‘술 취해서.....’는 독자가 임의로 정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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