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프다는 것의 의미
"물건은 물건대로 안 나가고, 수금은 수금대로 안 되고, 이거 사람 미치고 환장할 일이야. 뭐 하나 돼먹는 게 있어야 말이지. 이놈이고 저놈이고 데모하는 놈들은 다 미친놈들이야. 세상 뒤엎으면 금방 살판날 줄 알았겠지만 이 꼴이 뭐야, 이게. 이놈에 불경기가 6.25 때 뺨치는 판이니 장면인지 짜장면인지 그건 도대체 될 하고 있는 물건이야, 그래도 역시 이승만 대통령 때가 좋았어. 나 요새 쥐약 먹고 죽기 일보 직전이니까 다들 며칠만 더 기다려."
사장은 얼굴을 잔뜩 구겨가며 이렇게 말을 쏟아내고는 돌아서 버렸다.
"공장장님, 어떻게 좀 해보세요. 다 안 되면 반이라도 줘야지 이러다가 우리 굶어죽어요. 지난번에도 며칠만이라고 하더니 보름을 넘겼고, 이제 와서 또 며칠이라고 하는 게 한 달로 밀려가게 되면 어찌 되겠어요. 우리 같은 것들한텐 누가 돈 빌려주지도 않고, 구멍가게 외상도 하루이틀이지, 그런 형편 공장장님도 잘 아시잖아요."
재봉틀에 앉은 여자가 재단대 앞에 서 있는 남자를 향해 말했다.
"글쎄 말이야, 나도 죽을 지경인데 이걸 어쩌면 좋지. 불경기 땜에 그렇다는데 무조건 돈 내라고 어거지를 쓸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어디 딴 데로 옮겨갈 수도 없고, 나도 참 골치 아프네."
공장장을 겸하고 있는 재단사는 귀에 꽃고 있던 꽁초에 불을 붙이며 얼굴이 구겨졌다.
그 말을 들은 공원들의 얼굴은 더 침울하고 어두워졌다. '딴 데로 옮겨갈 수도 없고' 하는 말에 그들은 기가 꺾이고 있었다. 그 말은 공장장 혼잣말이 아니라 여기가 맘에 들지 않으면 딴 데로 옮겨가라는 뜻일 수도 있었다. 공장장은 똑같은 공원이 아니었다. 재단사위에 얹혀진 그 감투가 말하듯 그는 어디까지나 사장의 편이었다.
“아이 추워. 벌써 한겨울이네."
"글쎄 말야. 우리 같은 가난한 것들 죽이려고 또 겨울이 왔지"
그들은 밖으로 나서며 왈칵 끼쳐오는 냉기에 몸들을 움츠렸다.
"난 이쪽으로 가요. 내일 봐요."
재단 보조가 여자들 틈바구니에서 어서 벗어나려는 듯 인사했다.
"응, 잘 가."
"아유, 저 군고구마 냄새! 사람 환장하게 하네" 누군가가 불쑥 말했다.
"누가 아니래. 뜨끈뜨끈한 저것 후후 불어서 하나만 먹었으면 소원이 없겠다."
누군가가 추위에 떠는 소리로 얼른 말을 받았다.
초겨울 추위를 가득 품고 있는 밤 10시의 거리에는 푸른 불빛을 내는 카바이드등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경찰의 단속이 없는 밤을 타고 벌이에 나선 행상 리어카들이었다. 카바이드를 작은 양철 붙통에 담아 불을 켜는 그 카바이드등의 불빛은 시큼한 냄새와 함께 푸른 색조를 띠면서 화려하게 밝았다. 리어카 위의 좌판을 넉넉하게 비출 수 있는 그 불빛들은 가로등 빈약한 거리에 빛을 조금식 보태면서 겨울 도시의 야경을 꾸미고 있었다. 그런데 푸른 색조 탓인지 어쩐지 카바이드 불꽃들은 이상하게도 슬프고 애잔한 느낌을 자아냈다.
"오늘 기분도 그렇지 않은데 내가 많이는 못 사고 따끈한 풀빵 하나씩만 먹고 가자. 빈속에 덜 추울 테니까." 아까 공장장한테 항의했던 재봉사가 내놓은 말이었다.
"어머, 언니 돈 있어?"
"돈은 무슨, 외상 소 잡아먹는 거지."
"언니 최고야."
"그래, 역시 우리 언니야."
그만그만한 아가씨들이 금세 생기가 돌아 손뼉을 치며 외쳤다.
그들은 우르르 단골 풀빵장사를 찾아갔다.
“아줌마, 우리 하나씩만 외상 먹었으면 좋겠는데."
재봉사가 풀빵장사를 쳐다보며 미안한 듯 쑥스러운 듯 웃으며 눈치를 보았다.
"왜, 아직 월급 안 나왔어? 전번 것도 있는데" 풀빵장사 얼굴이 안 좋아졌다.
“네, 걱정 마세요. 이 전묘숙이 돈 떼먹겠어요. 다 똑같이 가난하고 불쌍한 처지에. 아줌마, 글쎄 오늘이 약속 날이거든요. 근데 불경기라고 또 며칠 기다리래잖아요. 그러니 얘네들은 맥빠지고, 날은 이리 썰렁하게 춥고, 어쩌겠어요., 내가 풀빵이라도 하나씩 사먹여 보내야지.”
"그래, 그 맘이 고맙구먼. 그나저나 왜 이리 살기 힘들어지는지 모르겠어. 풀빵장사도 잘 안 되니 말야"
풀빵장사가 익숙한 솜씨로 밀가루 반죽을 빵틀에 부으며 시름겹게 말했다.
“어머, 풀빵까지도 잘안 팔려요? 세상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요."
전묘숙이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혀를 찼다.
풀빵은 재봉사들부터 차례로 집어들었다. 그 차례는 공장에서의 직위 순이었다. 잡심부름꾼에 불과한 시다 윤자는 또 다른 시다 하나와 군침을 삼켜가며 마지막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점심을 굶고 물로 채운 속에 저녁까지 늦어 이제 배가 고프다 못해 속이 쓰리고 아렸다. 언제나 집으로 돌아갈 때는 너무 배가 고파 속에서 쓴물이 오르면서 허리는 접히고, 눈앞이 어질어질하는가 하면 귀에서 모기 우는 소리가 울리기도 했다. 공장장까지 아홉 중에서 점심을 먹는 건 서너 사람뿐이었다. 월급을 많이 받는 공장장이나 재봉사들은 보리밥이나마 도시락을 싸왔지만 나머지 보조나 시다들은 쫄쫄이 굶었다.
윤자는 두 손을 모아 풀빵을 받아들었다. 뜨거운 풀빵의 감촉을 느끼는 순간 입 안에서는 신침이 지르르 흘러나왔다. 윤자는 국화모양의 풀빵을 들여다보며, 이게 붕어빵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풀빵은 국화빵과 붕어빵 두 가지가 있었다. 그런데 붕어빵은 국화빵보다 배가 컸다. 그러나 붕어빵은 별로 구경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값이 비싸 사람들이 잘 사먹지 않는 탓인지도 몰랐다.
나윤자가 어두운 움막촌의 비탈길을 더듬어 올라 집의 거적문을 들췄을 때는 통금 예비 사이렌이 울릴 즈음이었다.
"아이고 욕봤다. 얼렁 묵어라."
졸음 찬 눈으로 봉투를 붙이고 있던 갈포댁이 차려놓은 밥상을 재빨리 딸 앞으로 옮겨놓았다. 밥상은 언제나처럼 보리밥에 된장국, 김치 한 가지로 더는 나쁠 수 없도록 궁기가 흘렀다. 나윤자는 허겹지겹 밥을 퍼넣기 시작했다.
"월급 주디냐?" 벽에 등을 기대고 졸고 있던 나삼득이 언제 잠이 깼는지 느닷없이 물었다.
나윤자는 놀란 눈으로 아버지를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입에는 볼이 미어지도록 밥이 들어 있어서 말을 할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오늘도 안 줘? 워째서?" 나삼득이 눈을 부라리며 버럭 소리질렀다.
그 서슬에 나윤자는 삐쩍 마른 목을 길게 빼며 밥을 꿀떡 삼키고는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요새 장사가 안 돼야서 그렁께 메칠 더 기둘리라고라."
“또 메칠이여? 고런 호로새끼 보소. 사람을 아칙보톰 밤늦께꺼정 새빠지게 부려묵고 월급이라고는 삥아리 눈물맨치 줌스로, 그것도 아까와 뒤로 밀치고 또 밀치고 혀? 베룩에 간얼 빼묵제, 있는 놈덜이 사람 잡는단 말이여, 그 사장놈도 삼시세끼 괴기반찬에 사시사절 쌀밥만 묵고 사는 놈 아니냔 말이여. 요런 개잡녀러 새끼럴 낼 당장 쫓아가서 패대기럴 쳐뿌러야것다!"
나삼득은 기세 드세게 소리쳤고,
“음마, 아부지! 글먼 아부지 잽혀가고, 나는 쫓겨나고.....”
나윤자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울상이 되었다.
"이봇씨요, 울컥 울떡증 난다고 되도 안헐 소리 되나캐나 허지 말고 딸년 밥이나 편히 묵게 허씨요." 갈포댁이 딸의 등을 쓰다듬으며 남편에게 눈을 홀겨댔다.
"그려, 밥 꼭꼭 씹어 찬찬히 묵어라." 나삼득은 머쓱해져 신문지 쪽에 담배를 말기 시작하며, "참말로 돈이란 것이 머시다냐, 그 종이쪼가리에 그림 그려놓은 고것이 뭣일 끄나. 고것만 있음사 처녀 붕알도 사고, 산 호랭이 눈썹도 뽑아오게 헐 수 있응께. 고것이 요물치고는 상요물 아니것어. 근디 고것이 워째 있는 놈덜헌테넌 더 잘 붙고, 없는 놈덜헌테넌 씨가 몰르는지 몰라. 참말로 각다분허고 염병헐 놈에 시상이여." 그는 중얼거리며 굵게 만 담배에 불을 붙였다.
국은 말할 것도 없고 김치까지 깨끗하게 먹어치운 나윤자는 비로소 배부른 기색으로 잠이 든 두 동생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었다. 누더기를 걸친 그녀는 주저앉더니 이내 피그르 쓰러졌다. 꼭 거짓말처럼 그녀는 잠이 들어버렸다.
조정래 / ‘한강2’중에서
* 위 글 제목 ‘배고프다는 것의 의미’는 독자가 임의로 정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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