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 소설

조정래 / ‘한강1’중에서

송담(松潭) 2021. 7. 28. 12:02

조정래 / ‘한강1’중에서

 

< 1 >

 

 

기차는 요란한 진동음을 내며 우람한 철근 아치가 연결된 철교 위를 달리고 있었고, 어둠기가 다 걷힌 양쪽 창밖으로는 폭넓은 강줄기가 펼쳐지고 있었다. 강가를 따라 얼음이 잡혀 있는 한강의 물은 묵직한 무게감을 지니고 푸르렀다. 깊고 큰 강일수록 그 흐름이 표나지 않는다고 했듯이 한강은 흐름을 느낄 수 없도록 잔잔하고 고요했다. 어디서 흘러와 어디로 흘러가는지 선뜻 방향을 잡기 어려운 한강은 그 유장한 흐름의 양쪽 꼬리를 아득하게 멀고 먼 곳으로 아련히 감추고 있었다. (P.16)

 

< 2 >

 

 

“생각해 보면 51년 김홍일 장군 예편 때부터 우리 광복군이나 독립군 출신들의 앞날은 결정났던 거야. 도대체 김홍일 장군이 어떤 분인가. 김구 선생을 도와 이봉창, 윤봉길 의사가 사용할 폭탄을 제조한 독립투사고, 중국 정규군 소장으로 왜놈들과 맞서 싸운 걸출한 인물인 거야 세상이 다 아는 것 아닌가. 그런 분은 겨우 별 둘 달고 예편당하고, 독립군들 등뒤에 총질해 댔던 만군 출신 정일권이가 그 새파란 나이에 마구 별 달아대며 참모총장을 해먹는 판이니 볼장 다 본 거지. 말이 좋아 중국 대사로 파견이지 속을 들여다보면 김흥일 장군을 유배시킨 동시에 군부에서 독립운동 세력의 중추를 제거해 버린 것이었어. 그 다음부터 독립운동 세력은 진급이 안 되는 것만이 아니라 추풍낙엽 신세들이 되지 않았나. 참, 우리도 만군 출신 못 된 게 천추의 한이로구만 그래" (P.59)

 

 

< 3 >

 

 

유일표는 그 하얗고 가지런한 치아를 보는 순간 피아노의 건반이 떠올랐다. 몇 년 전 교회에서 처음으로 피아노를 여는 순간 드러났던 그 새하얗고 쪽 고르던 건반, 그 깨끗하고 산뜻한 모습은 자신의 손으로 만지면 때가 묻을 것 같아 주저했을 만큼 아름답고 귀해 보였던 것이다.

 

환한 웃음과 함께 드러난 그 치아의 아름다움은 피아노를 여는 순간 나타났던 건반의 바로 그 아름다움이었다. 여자의 웃는 입이 그리도 아름답게 보인 것은 첫 느낌이었다. 연애소설에서 말하는 키스의 단맛이란 저런 입에 키스했을 때 느껴지는 것일까. 아니야, 아니야. 저 정도면 형수가 돼도 괜찮잖아. 정도 많고 쾌활하고 얼굴도 예쁘장한데, 형이 늘 침울하고 말이 없는 편이니까 저런 여자면 아주 잘 어울릴 텐데, 아니야, 내가 왜 이래. 유일표는 한순간에 일어난 이런 생각들을 지우듯 빵을 마구 넘겼다. (P.131)

 

 

< 4 >

 

 

“야 깡다구, 인자 니보고 하와이라꼬 놀리는 놈들은 진짜 없느기가?" 장경식이 유일표 옆으로 오며 물었다.

"그래, 이 보리 문딩아." 유일표가 씩 웃으며 대꾸했다.

"하, 일마가 이거 종코 믹이네. 우예 됐든 간에 니야 해방돼서 졸낀데, 내사 마 그 보리 문디 소리 듣기 싫어 똑 죽겄구마는, 우야믄 좋노”

"그야 눠서 떡 묵기여. 니도 일표맨치로 깡다구 부리면 될 것 아니여.”

 

입학을 하자마자 그들은 엉뚱한 놀림감이 되기 시작했다. 서울 아이들은 경상도 출신을 보리 문둥이, 전라도 출신을 하와이, 충청도 출신을 핫바지라고 놀려댔다. 그건 각 지방사람들이 서울로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생겨난 말이 그대로 학생들한테까지 옮겨진 거였다. 그런데 그 별칭에 지방사람들을 업신여기고 적대시하는 서울 사람들의 감정이 들어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유일표는 학교에서까지 그 놀림을 당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미 입학하기 전에 동네의 여기저기에서 당하며 분이 쌓여 있었다. “그으래에에, 하와이였어어?" 미리 알았으면 방을 세놓지 않았을 것이라는 듯 주인여자는 고개를 돌렸고, ” 학생이 하와이야?“ 콩나물을 팔기 싫다는 듯 구멍가게 아주머니는 봉지에 콩나물을 담던 손을 멈추었고, 우물에 물을 길으러 가면 여자들이 흰눈올 뜨며 수군거리기도 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왜 그런 차별을 하는 것인지, 왜 하와이라고 부르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생각다 못해 김선오 형을 찾아갔다. 형은 알 것 같지도 않았고, 안다고 해도 제대로 가르쳐주지도 않고 공부는 안 하고 쓸데없는 것에 관심 쓴다고 퉁이나 맞을 것이 뻔했다. “어린 너도 당했다 그거지. 그게 서울이야, 차차 알게 될 거야" 김선오 형은 떫게 웃고 말았다.

 

유일표는 언제까지고 아이들의 놀림감이 될 수는 없었다. 한 달을 참다가 마침내 한 놈을 골랐다. 단 한 번으로 끝내기 위해 일부러 자신보다 큰 42번을 찍었다.

 

"이 씨팔놈아, 아가리 조심해"

"이 하와이새끼가, 죽고 싶어!"

"그래, 한판 뛰자 그거야?"

"너 이새끼, 당장 나와!"

 

그래서 방과후에 아이들이 에워싼 변소 뒤에서 한판 싸움이 벌어졌다. 그 싸움에서 이긴 다음날로 유일표의 별명은 깡다구가 되었고, 그 누구도 다시는 하와이라고 놀리지 못했다.

(P.122~125)

 

 

< 5 >

 

 

“우리나라가 해방되었을 때, 왜놈들 편에서 앞잽이 노릇을 했던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들은 대략 160만 명쯤 되었다. 그놈들은 당연히 법에 따라 처벌을 했어야 하는데 미군정에서 과거를 불문한다면서 그놈들을 다시 써먹었지. 독립투사들을 고문했던 고등계 형사 출신 놈들이 다시 경찰 노릇을 하고, 총독부 관리질을 해먹었던 놈들이 다시 공무원 노릇을 해먹는 꼴이 된 거야, 더 기막힌 건 말야, 왜놈들이 비워놓고 간 높은 자리에 그런 놈들이 승진까지 되는 판이었지. 미군정은 자기들 뜻대로 남쪽을 지배하기 위해 앞잽이들이 필요했던 것이고, 꼼짝없이 감옥살이를 할 줄 알았던 그놈들은 자기들의 구세주인 미군정에 충성을 다 바치고, 아주 궁합이 잘 맞았던 거야. 그러나 그런 부당한 처사에 대한 국민들의 원성과 반발이 격렬해 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을 수립하자마자 9월 7일 국회에서 반민족행위처벌법을 통과시키게 되었지. 그리고 49년 1월부터 반민특위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하면서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 문필가 이광수, 최남선, 고등계 형사 노덕술 같은 자들이 속속 체포되기 시작했지. 그러나 위기를 느낀 왜경 출신 경찰 간부들이 주동해서 반민특위를 습격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만행이 벌어졌어. 이승만정권은 그 엄청난 폭거를 묵인했고, 결국 반민특위는 49년 8월 말로 해산되고 말았지. 그 뒤로 친일파들은 모든 분야에서 멋대로 득세하기 시작하면서 이 나라는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의 천국이 되어버린 거야, 국가의 3대 기구인 입법·사법·행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교육계, 예술계 그리고 사업가들까지, 실권은 모두 그놈들이 장악했지. 그래서 제놈들 입장을 변호하고, 반감을 없앨 목적으로 그런 시조까지 교과서에 실리는 음모를 꾸민 거야. 너희 국어선생이 대답을 피한 것도 비겁하긴 하지만 딱하기도 하지. 교장부터가 친일파일 거고, 친일파를 매도하는 교육을 했다는 게 상부에 알려지면 공립학교 선생 목숨은 하루아침이야. 그리고 친일파들이 제일 싫어하고 미워하는 존재가 누구겠냐? 도둑놈들이 경찰 싫어하듯 독립운동가나 그 집안 아니겠어? 6.25 직전까지 독립운동했다면 취직이 안 되던 게 이 나라였다. 지금도 천대받고 괄시당하기는 마찬가지고, 어찌 좀 도움이 됐냐?"

 

이규백은 혀끝으로 입술을 축이며 담배를 빼들었다.

"이건 나라도 아니잖아요!" 유일표의 떨리는 외침이었다.

“그러니까 젊은 사람들이 정신차려야지. 그만 가거라, 가서 밥해야 되잖아."

(P.206~207)

 

 

< 6 >

 

 

데모대 앞쪽에서 또다시 총소리가 요란하게 울려댔다. 뒤쪽의 데모대가 혼란스러워졌다. 이미 해는 지고 거리에는 얽은 어둠살이 번지고 있었다. 곧이어 동대문경찰서에서 총질을 해 10여 명의 사상자가 났다는 말이 전해져 왔다. 데모대는 골목골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유일표도 골목을 타기 시작했다.

그 시각에 지칠 대로 지친 유일민은 비원 앞을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오늘 무엇이었는가. 방관자였는가, 구정꾼이었는가, 훼방꾼이었는가. 방관자는 비겁자다, 다같이 궐기하자고 하지 않았는가. 방관자가 비겁자인 것은 틀림없는데, 훼방꾼이었던 나는 뭔가. 방관자보다도 더 나쁜 존재, 비겁자도 못 되는 나는 무엇인가 비겁자 보다도 더 나쁜 명칭....... 이기주의자, 기회주의자, 파렴치한 그 어느 것도 합당하지가 않았다.

 

유일민은 자신이 인간벌레 같은 부끄러움과 혐오감에 묻혀 있었다. 피투성이가 되어 구급차에 실리는 부상자들을 보았을 때, 피 흘리는 여학생이 업혀가는 것을 보았을 때, 피범벅된 시체를 더메고 구호를 외치는 학생들을 보았을 때 가슴 푸들거리는 데모의 충동에 사로잡히곤 했었다. 그러나 그런 감정을 끝내 행동화하지 못한 자신은 참으로 하잘것없고 한심스런 인간벌레였다.

 

그러나 오늘 크게 깨달은 것이 있었다. 혁명은 어째서 일어나는 것인지, 혁명은 어떻게 성취되는 것인지, 혁명을 왜 위대하다고 하는지, 왜 혁명에 몸을 던지는 것인지, 구름이 걷히듯 확연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혁명이란 추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 속에서 응결된 분노와 증오의 집단적 폭발이었다. 그 인식은, 불투명하고 원망도 섞여 있었던 아버지에 대한 이해이면서 발견이기도 했다.

(P.353~354)

 

 

< 7 >

 

 

“예, 이 박사가 며칠 전에 하와이로 떠나고....”

“이봐, 이 박사, 이 박사 하지 말어. 죄인한테 무슨 놈의 얼어죽을 존칭이야, 존칭이. 신문들이 하는 것 못 봤어? 이승만 씨라고 격하한 것 말야. 내 앞에선 그것도 과하니까 그냥 이승만이라고 불러"

한인곤은 무색하리만큼 상대방의 말을 무지르고는 이승만에 대한 감정을 거침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그놈에 영감탱이가 하와이로 도망가지 못하게 콱 막아서 재판에 회부하고, 톡톡히 징역살이를 시켜야 하는 건데, 그것 참 아깝게 됐어. 허정 그 얼간이 같으니라고.....”

한인곤은 거칠게 담배를 잉끄려 껐다.

"미국이 손을 썼다는 소문이 파다하던데요."

"글쎄, 그게 정치라는 거야. 이기붕 일가가 죽자 민심이 묘하게 동정적으로 흐르고, 그 틈을 타 이승만은 줄행랑을 놓은 건데, 어깼거나 정치란 군대 작전 열 번 찜쩌먹는다니까."

 

"그런데, 아랫것들이 속이고 잘못해서 그렇지 이승만이가 무는 죄가 있느냐고 딱해하는 사람들도 많던데요?"

“뭐야? 어떤 놈이 그따위 소릴 해. 그런 놈들은 다 이승만 밑에서 단물 빨며 나라 망친 놈들이고, 대가리에 똥밖에 든 게 없는 팔푼이들이 지껄이는 소리야, 자네 똑똑히 들어. 친일과 민족반역자들을 철저하게 옹호한 것, 헌법 고쳐 독재해서 나라 망친 것, 이번에 학생들 무더기로 죽인 것, 이보다 큰 죄가 어디 또 있나. 그리고 엊그제 일본 《요미우리 신문》에 났던 기사 봤지? 일본 은행에 빼돌린 돈이 500만 달러야. 우리 나라 돈으로 45억 환인데, 그 돈이면 쌀이 몇 가마닌 줄 알아? 원조받아 전쟁으로 엉망진창이 된 나라를 재건해야 되는데 그 돈을 빼돌렸으니 그게 강도지 대통령이야? 이래도 죄가 없어!"

 

한인곤은 방바닥을 내려치며 부릅뜬 눈으로 양용석을 노려보았다. 그 눈에서 불길이 일고 있었다.

(P.386~387)

 

조정래 / ‘한강1’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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