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 소설

조정래 / ‘아리랑 12권’ 중에서

송담(松潭) 2021. 6. 11. 15:28

< 1 >

 

인간사냥

 

 

"우리가 수행하는 임무는 황공하옵게도 천황폐하의 칙령을 받들고, 대일본제국 육군성의 명령에 따른 것임을 명심하라! 성전을 수행하고 있는 육군성은 징용자들을 화급히 필요로 하고 있다. 지금부터 남자는 눈에 띄는 대로 사냥하라. 제군들 임의대로 선별하지 말고 무조건 사냥해서 차에 태워라. 선별은 차후에 내가 한다. 지금부터 1개조씩 각 마을로 분산하여 사냥을 개시한다. 지금 시각 오전 11시, 오후 5시 정각에 이 지점에 재집결한다. 이상!"

절도 있게 지시를 마친 이시바시는 칼을 막대기에 꽂았다. 차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겠군. 이놈들을 빨리 차에 실어." 이시바시는 칼을 꽂으며 명령했다.

"이놈덜아, 안 돼야, 안 돼야!"

"이 베락 맞어 뒤질 놈덜아!"

"요런 개만도 못헌 인종덜아!"

남자들은 묵묵히 끌려가고 있었고, 여자들은 발악적으로 소리 지르고 있었다. 남자들이 차에 다 태워질 때까지 여자들은 당산나무 아래서 목이 잠기도록 소리소리 지르고 있었다. 그 울부짖음은 매미들의 울음소리에 섞여 더 애처롭게 펴지고 있었다. 포장 친 자동차는 다시 짙푸른 들녘 가운데를 달리기 시작했다.

 

차득보네 동네에서는 여덟 명이 붙들렸다. 그들이 차에 실리기 직전에 여자 몇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들 중에 연희네도 섞여 있었다. 그 여자들은 작은 보통이를 하나씩 안고 있었다. 여자들은 무작정 남편들에게로 달려갔다.

"출발이다. 빨리 태워라!" 이시바시가 외쳤다.

남자들은 아내들에게 보통이를 받아들었고, 여자들은 눈물 그렁그렁한 눈으로 남편들을 따라 건고 있었다.

“아그덜 잘 키우고 농새 잘 돌보고”

차득보는 목메임을 참느라고 침을 삼켰다. 목이 메어 대답이 제대로 안 나오는 연희네의 눈에는 곧 쏟아져 내릴 듯이 눈물이 가득했다.

"무신 일 있으면 운봉 시님 찾어가고."

"얼렁얼렁 타라!" "얼렁 타, 얼렁!" 순사들이 사람들을 밀어댔다.

“자네 몸 성해야 허고” 차득보는 아내의 손을 잡았다.

"야아, 당신도”

연희네가 남편의 손을 맞잡았다. 마침내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쏟아져 내렸다.

"아, 얼링 타!" 순사가 차득보의 어깨를 쳤다. 차득보는 차로 밀려 올라갔다. 차가 곧 출발했다.

"아이고메 으찌끄나!"

"이놈덜아, 이 웬수덜아!"

"시상에나, 시상에나"

여자들이 땅바닥에 주저앉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그때서야 서너 여자가 보통이를 안고 뛰어오고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해지면서 들녘에 석양빛이 물들고 있었다. 초록빛에 감도는 불그레한 석양빛은 그지없이 신비스럽고 아름다웠다. 그 황홀한 색조 속으로 하얀 해오라기도 작은 제비들도 둥지를 찾아 날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풍광에 어울리지 않게 자동차 세 대가 흉물스럽게 달리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징용방법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건달패인 낭인들에게 속아 인신매매를 당한 경우였다. 낭인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상대로 몇 푼의 전도금을 주면서 일본에 가면 돈벌이가 좋은 일자리가 있다고 꾀었다. ‘모집’이란 이름으로 사람들을 끌고 간 낭인들은 탄광이나 광산, 철도공사 같은 데다 팔아넘겼다. 낭인들이 받은 돈은 끌려간 사람들의 임금인 것은 더 말할 것이 없었다. 그들은 몇 년 동안 감시 속에서 골빠지게 일만 하고 빈털터리로 고향에 돌아와야 했다. 이 방법은 벌써 1910년경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두 번째는 관에서 알선하는 방법이었다. 이것은 일본의 국익·군수산업체서 필요한 조선인 노무자들을 관의행정계통을 따라 조달하는 것이었다. 사업소-현의 지사-후생성 - 조선총독부 -지방관서의 절차로 이루어졌다. 징용법이 시행되고 나서도 이 방법은 한동안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방법의 문제점은 행정절차 때문에 노무자 조달이 3개월 이상씩 걸린다는 것이었다. 전쟁은 자꾸 확대되어 가고, 석탄 생산이며 군사시설 같은 것은 하루가 급한데 3개월이란 너무나 긴 기간이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바로 이 세 번째 방법이었다. 그러니까 노무자 징용은 때와 장소에 따라 이 세 가지 방법이 함께 사용되는 것이다.

 

 

< 2 >

 

 

“어떻게 이런 데까지 왔소?"

박용화는 판자바닥에 주저앉으며 물었다. 그는 심한 충격을 받고있었다 방에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위안소에 있는 조선여자들이 유곽에서 온 그렇고 그런 여자들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대하고 보니 아직 스물도 안 되어 보이는 앳된 처녀들이었던 것이다.

'속아서. 속아서" 고개를 떨군 복실이는 목이 메었다.

“속다니, 어떻게 말이오? 무슨 좋은 데다 취직시켜 준다고 했소?"

복실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등으로 눈을 훔쳤다.

"못된 놈들 그럼 집에서는 이런 걸 전혀 모르고 있을 것 아니오?"

박용화는 가슴 저리는 아픔과 함께 분노를 느꼈다.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줄은 전혀 몰랐던 것이다.

복실이는 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혹 울음을 터뜨렸다.

 

“참, 아가씨들 신세나 우리 학병들 신세나 다 똑 같소.”

 

"저어, 지가 맘에 안 드시면." 복실이는 눈물 그렁그렁한 눈으로 박용화를 쳐다보았다.

"아니오, 그게 아니오. 내가 어찌 왜놈들하고 똑같이 그 짓을 할 수 있겠소."

박용화는 이 말을 하면서 최초로 피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아니구만이라, 아니구만이라..

복실이는 뜻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그 말만이라도 너무 고마웠다 아니, 그 말이 고마워서 다른 군인들하고는 다르게 옷을 다 벗고 저 사람을 맞이하고, 자신을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표할 수가 없었다.

"나 그만 가봐야겠소." 박용화가 일어섰다.

"은제 떠나시능게라?" 복실이도 따라 일어섰다.

"잘 모르겠소."

"낼 시간 있으시먼.....“ 복실이는 박용화를 간절하게 쳐다보았다.

"알겠소." 박용화는 그 눈물 어린 눈이 애처롭게 곱다는 것을 느끼며 복도로 나섰다.

 

여자들이 변소 갇 짬도 없이 군인들은 줄을 잇대었다. 그래서 여자들은 이동부대가 나타나면 진저리를 쳤다. 스물다섯 명 정도가 넘으면서 복실이는 거기가 부어오르면서 속살이 쓰라리고 화끈거리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복실

이는 그 학도병 생각과 집 생각이 자꾸 겹쳐지면서 끝없이 밀려드는 군인들이 더 지굿지긋해지고 있었다.

 

"너희들 어땠니, 어땠니?"

히데코가 여덟 명 중에 넷을 둘러보았다. 네 명 다 고개를 저었다.

"넷 다안 하고 그냥 갔어?" 넷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릴 더럽다고 무시했나? 다 대학생님네들이라”.

“아니여. 우리도 외놈덜하고 똑겉은 짓얼 해서 되느냐고 힜어”

복실이는 재빨리 말대꾸를 했다.

“그래, 역시 배운 사람들이라 생각도 깊다. 우리 서러움을 그리 알아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이니." 히데코가 울음을 씹듯 하는 얼굴로 말했다.

“그라니께네 피는 물보다 진하다 안카드나”

 

복실이는 아침 일찍 잠이 깼다. 어젯밤에 장교들이 하나도 오지 않았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아, 그 사람들이 밤중에 떠났구나!

복실이는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동부대가 오고, 밤에자고 가는 장교들의 발길이 뚝 끊어지면 그날 밤 이동부대는 떠난 것이었다.

그 사람 이름이나 알아둘 것을......

복실이는 아쉬움 속에서 그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히데코처럼 오빠라고 불러보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하고 말았다. 복실이는 밖으로 나왔다. 아침의 서늘함이 숲속에 가득했다.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부대 쪽을 바라보았다. 군인들이 움직이고 있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어제처럼 그 많은 군인들의 움직임은 아니었다. 밤새 이동부대가 떠난 것이 틀림없는 것 같았다.

 

부디 무사허시게라.......

복실이는 그 남자와 다른 학병들이 무사하기를 빌었다. 싸움터는 북쪽이고, 그쪽에서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젊은 사람들이 거기서 죽으면 자기네보다도 더 못한 신세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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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군용위안소’를 운영하기 시작한 것은 만주를 침략한 직후인 1931년이었다. 그때는 유곽에서 몸을 팔던 여자들을 모아 데려간 것이었다. 그런데 매춘부가 아닌 일반 처녀들 100여 명으로 일본군이 ‘육군위안소’를 직영으로 개설한 것은 중일전쟁이 터진 다음해인 1938년이었다. 이때부터 일본군은 일본의 낭인패거리들과 조선의 친일파 매춘업자들을 동원해 ‘돈벌이 좋은 공장에 취직시켜 준다,’ '여점원을 하면 돈도 벌고 공부도 할 수 있다,’ '간호부는 사람 대접받고 돈도 많이 벌고, 의사하고 결혼도 할 수 있다' 이런 거짓말을 꾸며대서 사기극을 벌이며 처녀들을 군용위안부로 끌어갔다. 그러다가 1941년 7월 조선총독부와 일본군은 직접 나서서 1만여 명의 처녀들을 종군위안부로 끌어가려고 전국적으로 '여자사냥'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경찰과 형사들이 처녀들의 납치에 앞장서기 시작했던 것이다. 낭인들과 매춘업자들의 각종 사기극과 경찰이 자행하는 납치극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속에서 일본 육군성과 해군성은 진주만 기습 직후인 1941년 12월 말에 태평양전쟁의 전선 전역에 걸쳐 '기지위안소' 개설을 명령했다. 그리고 일본군은 조선여자들의 인원수를 '물품대장에 올려놓고 각 부대에 '물품'으로 '배급'했다.

 

이때부터 총독부에서는 근로정신대로 위장된 종군위안부들을 손쉽게 끌어가기 위해서 친일파 지식인들과 문인들을 동원했다.

 

 

< 3 >

 

 

전동걸은 3개월 동안의 군사훈련을 마쳤다. 조선의용군의 기본 군사훈련은 혹독하리만큼 강도가 높고 맹렬했다. 사격이며 분대전투 같은 훈련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유격전 훈련은 가히 살인적이라고 할 만했다. 먹을 것이라고는 조금도 지니지 않고 완전무장을 한 채 태항산록 그 끝없는 골짜기와 봉우리를 열흘 이상씩 타넘는 것이었다. 먹을 것은 어떻게 해서든 산중에서 구해야 했다. 뱀이고 개구리고 승냥이고 까마귀고 닥치는 대로 잡아먹어야 했다. 산열매도 따먹었지만 절대로 따먹으면 안 되는 것이 있었다. 감·호두· 대추가 그것이었다. 그것들은 태항산록을 따라 마을을 이루고 사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꾸고 있는 과실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생업으로 삼아오는 데다 수확량도 엄청나 그세 가지는 태항산 명물로 널리 알려져 있을 정도였다. 그 열매들을 단 하나도 손댈 수 없는 것은 '인민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인민을 전적으로 돕되 인민의 것은 지푸라기 하나도 손대선 안 된다. 이것은 중국공산당 군대인 팔로군의 절대적 강령이었다. 일본군 척결을 위해서 팔로군과 합작투쟁을 벌이고 있는 조선의용군은 당연히 그 강령을 따라야 했던 것이다. 팔로군은 인민의 재산만 축내지 않는 것만이 아니었다. 이동 중에 민박을 하더라도 절대로 방에 들어가는 일이 없었고, 기껏해야 헛간을 빌리거나 처마 아래서 이슬이나 서리를 피했다. 밥도 다 손수 해먹고 떠날 때는 집안 청소며 헌 울타리 같은 것도 고쳐주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팔로군은 태항산을 중심으로 한 해방구 안에 사는 인민들에게 일체의 세금을 물리지 않으면서 농번기와 추수철에는 농사일을 도와주었다. 그리고 일본군과 장개석의 국민당군으로부터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 주었다.

 

팔로군은 자신들의 그런 헌신적 행위에 대해서 누구나 이렇게 말했다.

"우리 팔로군은 인민의 군대다. 그리고 우리들 자신이 인민이기 때문이다."

 

팔로군은 두 개의 적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일본군이었고, 다른 하나는 국민당군이었다. 일본군을 무찌르기 위한 국민당과의 국공합작은 작년부터 깨지기 시작했다 팔로군의 세력이 자꾸 확장되어 나가자 위협을 느끼게 된 장개석은 일본군들로 하여금 태항산을 집중공격 하도록 유도했다. 그리고 자기군대를 동원해서 협공을 시도했다. 그런 상황 아래서 팔로군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은 바로 인민들이었다. 인민들의 지지가 늘어나는 만큼 팔로군의 세력은 확장되는 것이었다.

 

배를 끓으면서도 신병들은 불평 한마디 할 수가 없었다. 교관이며 다른 고참병들도 자신들하고 똑같이 생활하고 있었던 것이다. 먹이를 현지에서 해결해 가며 굶어가며 싸워야 하는 유격전에 적응하기 위한 훈련이니 불평이 나올 수 없기도 했다. 그리고 신병들 모두가 강제로 끌려온 것이 아니라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려고 사선을 넘어 모여든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 4 >

 

 

일제는 160여만 명을 강제 징용했고 30여만 명의 여자들을 위안부와 정신대로 끌어갔고, 4,500여 명의 학도병을 포함해 징병으로 전쟁터에 끌려간 젊은이들은 40여만 명이었다.

 

 

< 5 >

 

 

10년 8개월의 세월

 

「태백산맥」 10권 1만 6,500장을 6년 동안에 썼고, 이제 「아리랑」 12권 2만 장을 4년 8개월 만에 마친다. 두 작품을 쓰면서 10년 8개월의 세월이 흘러간 것이다.

 

그러나 10년 8개월의 세월은 꼬박 작품을 쓰는 데만 소요된 시간들이고, 실제로 흘려보낸 세월은 더 길다. 나는 「태백산맥」을 마흔 살에 시작했는데 이제 쉰이 넘어 있다. 그 세월 속에는 「아리랑」을 준비한 기간이 들어 있고, 또 「태백산맥」을 쓰기 전에는 그것을 준비한 기간이 놓여 있다. 그러니까 두 작품에 바친 실제 세월은 15년이 넘는 것이다.

나는 작품을 쓰는 동안에 가끔 혼란에 빠지고는 했었다. 이것이 사람 사는 것인가? 내가 왜 이러고 있는가? 내 인생은 어디에 있는가?

 

최남선으로 대표되는 반역의 역사에 대한 분노와 실망을 안은 채 대학생이 되었다. 문학에 일생을 걸기로 하고 대학에 가서 깨달은 '대학은 문학을 가르쳐주는 곳이 아니다'는 한 가지 사실일 뿐이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일제시대에 대한 의문도 ‘나 스스로 풀어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으며 대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작가가 되어 나는 그 문제를 풀기 위해 노력하면서 친일파의 문제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견지했다. 그래서 나는 1970년대에 선배들은 물론이고 같은 세대에 게도 '촌놈'이라는 비웃음을 곧잘 당했다. 그러나 나는 그런 태도를 오히려 속으로 강화해 가면서 식민지시대를 꼭 소설로 써야 한다는 결심을 굳혀가고 있었다.

 

친일파들이 모든 분야를 장악한 새 나라에서 독립운동가라서 취직이 안 되고, 일제의 고등계 형사질을 하며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했던 자들이 새 나라의 경찰로 둔갑해서 똑같은 지하실에서 다시 독립운동가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고문하고, 친일파들에 대한 연구를 하던 젊은 학자가 사회진출이 완전 차단되어 버린 사실 같은 것들을 구체적으로 확인해 가면서 나는 끝없이 괴로워했고 아픔을 겪었고 밤잠을 설쳤다. 그러면서 반역의 역사에 대한 나의 분노는 이성화되었고, 증오는 논리화되어 갔다.

 

우리 모두의 삶 속에 체질화되어 있는 무책임과 거짓말과 속임수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가. 대부분 전문가들은 돈이 절대 권능을 발휘하고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된 천민자본주의가 주범이라고 진단한다. 일정 부분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친일과 민족반역자들이 횡행한 이 사회의 40년과 직결되어 있다. 다시 말하건대 친일과 민족반역자, 그들이 누구인가? 기회주의자 이기주의자 파렴치한의 표본이 아닌가. 그들이 저 대통령에서부터 사회 구석구석의 기득권을 장악한 채 40년을 지배한 이 땅에 어찌 정의가 있고 양심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천민자본주의도 바로 그자들에 의해서 잉태되었음을 주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나는 「아리랑」을 통해서 친일과 민족반역자들이 얼마나 나쁜 짓을 했는가도 소상히 쓰려고 노력했고, 그들이 왜 민족의 이름으로 단죄되어야 하는지를 밝히고자 했다. < ‘아리랑을 마치며’ 중에서 일부>

 

조정래 / ‘아리랑 12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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