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 / ‘한강3’중에서
< 1 >
창경원의 긴 담길에는 플라타너스 큰 잎들이 무슨 슬픔처럼 뚝뚝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여러 가지 감도의 갈빛으로 물들어 있는 잎들마다 곱고 아름답기 그지없는 추상화들이 그려져 있었다. 낙엽들은 서로 닮았을 뿐 그 하나하나가 제각기 다른 형상과 채색의 그림을 담고 있었다. 플라타너스 큰 잎들이 낙엽 져 흩날리는 것은 최고 걸작의 추상화들이 무수하게 날아가고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옛 정취 그윽한 돌담길에 낙엽은 지고, 낙엽들이 흩날리는 속에 전차가 느릿한 여유로움으로 굴러가는 정경은 꽤나 낭만적이기도 했다. 그 창경원 돌담길이 서울에서 제일 아름다운 길로 꼽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 길에 버금가기로는 덕수궁 돌담길이 있었다. 덕수궁 돌담길 중에서도 대로변인 앞길보다는 한적한 뒷길이 단연 운치가 빼어났다. 샛노란 은행잎이 낙엽 지는 운치야말로 눈물겹도록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 길은 날이 어두워지면 곧잘 통행이 차단되고는 했다. 미국 대사관에서 경비를 하는 거였다. 젊은 연인들은 발길이 막히고서도 어디다 항변 한마디 하지 못한 채 덕수궁 돌담길의 낭만은 사라져갔다.
김선오는 창경원 돌담길을 따라 걸으며 어느 때보다도 깊게 인생을 생각하고 있었다. 심정은 착잡하고, 낙엽은 지고, 계절의 우수가 감정을 자극하며 삶의 비애감과 허무감을 자꾸 키워가고 있었다.
내 인생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나. 형제간은 많고 재산은 없고, 도대체 앞날은 어찌 될 것인가 이렇게 고달프고 힘들게 산다고 무슨 가망이 있을 것인가 언젠가 고등고시에 붙는다 한들 판검사 자리가 요술방망이가 아닌 바에야 집안 사정이 달라질 것은 뭐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을 것인가 인생이 사막길이라더니 내 인생이 그 꼴 아닌가. 사람의 일생이라는 것도 결국은 저 낙엽들처럼 사라져가는 것인데...... 이다지 힘겹게 아둥바둥 몸부림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아니야, 그건 종교적 결과론일 뿐이고, 한 인간이 하루하루 목숨을 부지하며 살아간다는 건 얼마나 심각하고도 중대한 문제인가. 죽어버릴 수 없는 그 하루하루의 가난하고, 배고프고, 헐벗은 삶..... 그 처절함 앞에서 종교적 허무타령은 배부른 자들의 관념이거나 감정의 사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어찌 됐든 힘을 내야 한다. 아버지가 바라고 또 바랐던 것처럼 농부 신세를 벗어나 사람답게 살라면 어줍잖게 딴생각을 하지말아야 한다. 아버지......
(P.41)
< 2 >
"너도 이쪽은 잘 모르는구나. 길게 말할 것 없이, 기술자 열에 일곱 정도는 손가락 한두 개씩은 잘려나가는 판이야. 프레스란 기계에 말야."
"뭐야? 그게 그렇게 위험한 일이냐?" 이경식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말 마. 손가락 한두 개 잘리는 건 그래도 약과야. 어떤 사람은 글쎄 손가락 다섯 개가 몽땅 잘려나가 버렸어. 딴사람이 기계를 빨리 정지시켰지만 그땐 벌써 손가락들이 다 으깨져서 다시 붙일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어. 근데 일은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야, 그 사람은 결국 회사에서 쫓겨났어. 한 손이 병신이니까 더 쓸모가 없었거든, 그 사람이 어디서 무엇을 해먹고 사는지 두고두고 잊을 수가 없어, 또, 나도 앞으로 그 사람 꼴이 되면 어쩌나 하는 겁도 나고."
나복남이 침울한 얼굴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거 참 문제는 문제네, 그럼 어쩐다지?"
"그래서 하는 말인데, 뭐 좀 다른 쪽으로 옮겨볼 수 없을까? 저어 네가 하는 일은 어떠냐?"
나복남은 조심스럽게 말하며 이경식의 눈치를 살폈다.
"미쟁이 말이냐? 아이구 말도 마. 그것도 사람 할 짓이 아니야. 말이 나왔으니 톡 까놓고 말하자면 말야, 그거 아주 드런 놈에 직업이야. 그게 손가락이 잘리는 일은 아닌데, 일만 잔뜩 힘들었지 장래성이 전혀 없는 직업이라고, 왜냐면 말야, 날이 추워 얼음이 얼면서부터 날이 풀릴 때까지 반년 가까이는 일이 없는 거야. 겨울에 벽돌 쌓았다간 그대로 부실공사 되거든 그렇다고 여름에 돈벌이가 배로 되는 것도 아니야 여름엔 또 비가 많이 오잖아. 그게 밖에서 하는 일이니까 비가 왔다 하면 틀림없이 공치는 날인 거야. 그렇게 계산하면 1년에 반년 일거리 잡기가 어려워. 그러니 우리 오야지가 미쟁이 30년에 자기가 벽 친 집이 수백 채는 될 텐데 정작 자기는 아직도 집 한 채 없다고 투덜대는 거야. 거기다가 노상 땡볕에서 일해야지, 요새 자꾸 건물들이 높아지고 있으니까 발밑은 아슬아슬해지지. 나도 좀 배운 게 있다면 그 짓 당장 때려치우고 딴 기술 배우고 싶어." 이경식이 고개를 저으며 떫은 입맛을 다셨다.
"그게 그렇구나, 그럼 우린 어떻게 해야지?" 나복남이 어깨한숨을 쉬었다.
"별수 있냐. 국민학교밖에 못 나온 우리 같은 것들이야 하바리 인생 될 수밖에. 큰 회사에 들어가 월급 제대로 받는 고급 기술자되려면 못해도 공고는 나와야 하는데, 하루 벌어 하루 먹기도 다급한 우리 처지에 공고는 관두고 기술학원엔들 다닐 수 있겠냐. 어쨌거나 몸으로 때우면서 살아가야지."
"몸으로 때우면서."
나복남은 침통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의식 속에서는 아버지가 떠오르고 있었다. 아버지는 정말 몸으로 때우다가 아직도 젊은 나이에 그리도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런데 또 자신도 손가락 병신이 되도록 몸으로 때우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그는 또 다른 말도 듣고 있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고, 배운 도둑질이니 어떡해." 손가락 잘린 기술자들이 술에 취해 하는 말이었다.
"야 복남아, 그렇게 속썩이고 고민할거 없어. 어떡허냐, 우리 팔자가 그런 걸. 우리 나이도 이젠 스물이 넘어버렸고, 빼지도 박지도 못하게 되어버렸으니까 그냥 그럭저럭 살아갈 수밖에 없어. 죽어라고 고민해 봤자 뭐 달라질 게 있냐. 다 부모 잘못 타고난 게 죄니까 용 빼는 재주 없잖아. 전부가 다 손가락 병신 되는 것도 아니고, 가자, 오랜만에 만났는데 어디 가서 깡소주라도 한잔해야지."
이경식이 나복남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의 손은 직업을 말해 주듯 투박하게 크고 거칠면서 어떤 손톱에는 검푸른 피명이 들어 있었다.
밖으로 나온 나복남은 고개를 젖히며 한숨을 토해냈다.
내 나이 스물두 살인데.....
나복남은 이대로 주저앉아 그럭저력 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추운 날씨처럼 싸늘한 이 세상 어디에도 기댈 데라고는 없었다.
(P.71~73)
< 3 >
"이거 한참 잘 나가는데 김 빼고 그러지 말어. 그러니까 말야, 그런 사실을 날마다 지구본 빙빙 돌리면서 손바닥 들여다보듯 환히 알고 있는 케네디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게 뭐겠어. 공산주의의 마수로부터 남한을 철통같이 지켜내는 일이라 그거야. 그럼 그 위대한 소임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는 적임자가 누구냐! 그건 바로 별 넷에 빛나는 4성 장군 박정희다 그런 말씀이야. 아까 누가 케네디한테 실망했다고 하던데, 제발 그런 순진한 소리 하지 마. 그건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미국 대통령 케네디한테 무슨 기대를 했었다는 뜻인데, 미국 대통령은 미국 국내에서만 민주정치를 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을 뿐이지 국외인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민주정치를 하든 독재정치를 하든 아무 관심도 없어. 그런데, 미국은 자기네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국가의 지배자들에게 공통적으로 요구하는 불변의 조건이 한 가지 있어. 그게 뭐냐! 바로 투철한 반공주의야, 혁명공약 제1항에 반공주의를 내세운 박정희를 결국 케네디가 미국으로 초청해 백악관에서 손 어루만진 건 당연한 결과야, 우린 이 현실을 직시해야 해, 거기서 우리의 앞길에 대한 해답도 나오는 거니까."
(P.101)
< 4 >
"야, 근디, 검사 영감님헌티서넌 무신 존 소식이 있는게라?"
그것은 서울로 언제 이사 가느냐는 말이었고, 동네사람들이 영암댁에게 으레껏 하는 인사이면서 관심거리였다.
"안직 초년생잉께. 국사가 더 급허제."
영암댁은 순식간에 턱을 끌어당긴 잦바듬한 자세를 취하며 대꾸했다. 그 얼굴에는 근엄한 기색까지 드러나 있었다. 영암택은 작은아들의 이야기만 나오면 '검사 영감님'의 체면을 살리는 동시에 그 어머니로서의 체통도 살리려고 애썼다. '아직 초년생잉께. 국사가 더 급허제' 하는 대꾸도 아들의 말과 편지 내용을 생각하고 또 생각해 요약한 것이었다. 그 효과는 아주 신통했다. 누구나 그 말에 고개 끄덕이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며 자신과 작은아들을 함께 소쿠리비행기를 태우기도 했다.
"검사 영감님이 비문헐랍디여. 영암댁이야 인자 윗논에 물 실어놓은 팔자고, 기차표 사둔 팔잔께라. 사람이 한평상 삼스로 그리 달고 꼬시게 팔자 확 피는 일도 한 분은 있어야 허는디요 이,"
아낙네는 돌아갈 기미는 전혀 없이 수다를 떨며 차지게 입맛까지 다셨다. 영암댁을 바라보는 그 여자의 눈에는 부러움이 가득했다.
사람들은 누구나 그 아낙네처럼 영암댁하고 친하려고 했고, 무슨 이야기든 오래 하려고 했다. 그런 변화도 농사일을 하지 않게 된 것만큼 달라진 현상이었다. 작은아들은 더는 농사일을 하지 말라며 매달 생활비를 보내왔는데, 뼛골 빠지게 일을 해도 쌀밥을 먹을 수 없는 농촌사람들에게 손에 흙 안 묻히고 세 끼 밥 편히 먹을 수 있는 것은 더없이 부러운 팔자가 아닐 수 없었다.
이 사람, 저 사람을 상대로 작은아들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영암댁의 크나큰 낙이었다. 별로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가 되풀이되는 것이었지만 영암댁은 전혀 지루하거나 싫증이 나지 않았다. 아들을 낳을 때마다 고추를 보고 보고 또 봐도 자꾸 보고 싶었던 것처럼 작은아들의 이야기도 골백번 되씹어도 새록새록 새롭고 단물이 나왔다.
(P.292~293)
< 5 >
"니 누구 찍어줄 챔이냐?"
"아직 모르겠어요." 유일표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나는 박정희 찍어주기로 결정 봤다."
"예에.· ?"
"와따, 불총 맞은 멧도야지맹키로 워찌 그리 놀래고 그냐?"
유일표는 정신 나가지 않았느냐는 눈길로 서동철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런데 서동철은 느린 손놀림으로 담배에 불을 붙이며 비식비식 웃다가 입을 열었다.
“그려, 니가 그리 놀랠 만허제. 1년간 똥줄 빠지게 그 쪼꼬라지 당허고도 무신 초친맛으로 박정회 찍을라고 허냐 그런 뜻이겄제? 근디 말다, 그 쬐깐헌 사람이 좌익을 혔다고 안 혀? 따지고 보면 그 사람이 한 시절에 우리 아부지하고 동지였던 심인디, 고것이 신통방통하고 솔찬허덜 안혀?"
박정희가 15만여 표 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런데 전라남도에서 몰표가 나왔다. 그러자 '박정희는 전라도 덕에 대통령 되었다’는 말이 금세 퍼졌다.
부정선거를 규탄하며 윤보선이 '내가 정신적 대통령'이라고 한말이 신종 유행어가 되는 가운데 알쏭달쏭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여순반란사건에 연루된 사상 문제가 터지자 박정희는 고심한 것이 아니라 무릎을 쳤다는 것이다. 그 결과가 전라도에서 몰표로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그 야릇한 소문을 일순간에 휩쓸어버린 사건이 터졌다. 케네디 대통령 암살이었다. 대통령 자리를 확보한 박의장은 죽은 대통령을 만나러 여유롭게 비행기에 올랐다.
(P.319~320)
< 6 >
김명숙도 탄식하듯 말하며 맥이 빠지고 있었다. 김명숙은 몸수색에 치를 떨면서도 막상 할 말이 없었다. 날마다 징그럽고 분한 꼴을 당하면서도 돈을 감추었다가 들통나는 차장들이 더러 불거져 나오고는 했다. 그리고 서로 입에 담지는 않지만 용하게도 돈을 숨겨 삥땅에 성공하는 애들도 있는 눈치였다. 솔직하게 말해 몸수색을 하지 않을 경우 뺑땅 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그동안 자신도 수없이 돈욕심에 마음이 오락가락했었다. 돈을 보고 있으면 자신만은 꼭 들키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고, 그 생각은 자꾸 부풀어 오르면서 정신을 혼란스럽게 했다. 그 간질간질한 유혹은 끈질기게 마음속에 살아 있었고, 그걸 떼치고 이겨내야 하는 고통은 여간 힘드는 게 아니었다.
감찰이란 남자들은 누구나 다 똑같았다. 음탕한 짓을 하지 않고 검사만 깨끗하게 하는 남자는 하나도 없었다. 감찰을 두고 이런저런 말이 많기도 했다. 감찰에게 들켜 몸을 내주고 무사하게 된 애들이 많다는 말부터, 예쁜 애들은 감찰이 눈감아 주어 계속 부수입을 올린다고 하는가 하면, 어떤 애들은 먼저 감찰에게 꼬리를 친다고도 했다. 그래서 회사에서는 감찰도 믿지 않아 너무 예쁜 애들은 아예 뽑지 않는다는 말도 있었다.
(P.371)
< 7 >
데모의 열기는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었다. 학생들이 분노하는 것은 두 가지 사실 때문이었다. 첫째는 뒤늦게 공개된 김종필과 오히라 사이의 메모가 이미 2년 전에 작성되어 국민을 속였다는 것이고, 둘째는 36년에 걸친 민족적 피해에 대한 보상이 고작 3억 달러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나머지 3억 달러는 되갚아야 할 빚인 차관이었다.
허진이 그렇듯 유일표도 학생들의 그런 비판에 전적으로 동감하고 있었다. 3억 달러는 아무런 구체적 근거 없이 주먹구구로 정해진 액수였고, 마땅히 제2의 매국으로 매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학과나 경제학과 교수들에 의하면, 36년 동안에 직접 간접으로 저질러진 400만에 달하는 살상, 농산물· 광산물· 수산물·임산물의 탈취,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전국적으로 농토를 강탈해 챙긴 부당이득, 강제 징병 ·징용 · 정신대의 피해와 임금 착취 같은 것들을 세목별로 따져야 하고, 국제기준의 인플레에 맞춰 계산하면 30억 달러로도 모자랄 것이라는 추산이었다.
(P.394)
조정래 / ‘한강3’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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