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 소설

조정래 / ‘한강10’중에서

송담(松潭) 2021. 8. 23. 07:57

조정래 / ‘한강10’중에서

 

< 1 >

 

 

가지가지 색깔로 물든 단풍과 함께 지천에 넘실거리는 새하얀 억새꽃의 물결은 가을의 막바지에서 어우러지는 아름다움의 극치인지도 모른다. 형형색색의 단풍들은 억새꽃 무리의 티없이 하얀색을 바탕 삼아 더욱 선명하고 화려하게 돋보이고, 억새꽃들은 마지막 생명을 태우는 단풍들의 현란함으로 그 순백의 청아함과 우아함이 한층 살아올랐다.

 

단풍과 억새꽃은 서로를 북돋워주는 조화 속에서 가을산을 눈물겹도록 아름답게 수놓고 있었다. 그들이 시샘이라고는 모르고 그디지 사이가 좋은 것은 머지않아 서로에게 닥칠 똑같은 운명을 알아서인지도 모른다. 차가운 북풍을 타고 겨울이 닥쳐오면 그들은 어찌할 수 없이 삶을 마감해야 한다. 곱고 고운 단풍들은 낙엽이 되어 어디론가 휩쓸려가야 하고, 순백으로 풍성하게 부풀었던 억새꽃들은 거센 바람에 꽃씨들을 날려 보내며 뼈만 앙상하게 남게 된다. 단풍들은 한해살이를 끝내는 마지막 삶이라 노을처럼 그리도 찬란한 것이고, 억새꽃들은 긴긴 날들을 오래오래 참다가 꽃 중에서는 마지막으로 피는 꽃이라 들국화처럼 청초하면서도 쓸쓸한 것인지도 모른다.

 

억새꽃의 아름다움은 혼자 피는 것이 아니라 무리를 이루는 데 있고, 그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리고 쓸리고 나부끼고 출렁이면서 하얀 꽃들의 파도를 이루는 데 있었다. 억새들은 그 가늘고 긴 키의 호리호리한 몸매를 서로서로 의지해 가며 아무리 거센 바람이 불어도 부러지거나 꺾이는 일 없이 낭창낭창한 허리로 바람결을 타며 오히려 더 환상적인 군무를 이루어냈다. 굽이치고 솟구치고 자지러지고 너울거리는 억새꽃들의 하얀 춤사위는 그 어느 꽂도 흉내낼 수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P.30,31)

 

 

< 2 >

 

 

겨울 해변에는 물새조차 보이지 않았다. 가없이 넓은 겨울바다에는 배 한 척 떠 있지 않아 더 아득하게 넓어 보였고, 머나먼 수평선도 더욱 숨 자지러지게 멀어지고 있었다. 싸한 추위를 품고 있는 하늘도 쪽빛이었고, 무한의 무게를 담고 있는 바다도 쪽빛이었다.

 

서로를 닮은 하늘과 바다는 저 까마득하게 먼 곳에서 맞닿으면서 수평선이 하늘인지, 하늘이 수평선인지 분간할 수 없게 하며 그 깊이를 모를 정적에 잠겨 있었다. 그 정적은 쉼없이 밀려드는 파도에 실려와 해변에 겹겹이 쌓이고 있었다. 밀려오고 또 밀려오는 파도는 슬픈 노래 같은 소리를 앞세워 새하얀 물꽃을 피워내고는 백사장에 스러지곤 했다.

 

(P.63)

 

< 3 >

 

 

이상재는 기분이 확 상하고 말았다. 더러 공무원들을 대할 때마다 기분이 언짢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왜 그리 불친절하냐고 한마디하고 싶었지만 그냥 참고 돌아섰다. 그런 말을 한다고 고쳐질 그들이 아니었다. 자기들이 대단히 높은 자리에나 군림하고 있는 것처럼 길들여진 그 못된 버릇은 달리 고칠 도리가 없는 그들의 고질병이었다. 공무원들이란 국민의 세금으로 먹여살리는 무리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국민에 대한 봉사의 의무가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국민 위에 군림하여 제나름의 권력 횡포를 자행하는 존재들로 둔갑해 있었다. 그것은 군대에서 폭력 행사를 당연시하는 것과 함께 일제 식민지시대의 악습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는 못된 행태였다. 총독부 시절에 일본인 공무원들이 조선식민지 백성들 위에 얼마나 무도하게 군림했던가. 그 못된 버릇이 세월 따라 고쳐지기는커녕 독재권력이 길어지면서 더 심해져가고 있는 양상이었다. 독재권력은 정권 유지를 위한 한 세력으로 공무원 집단을 이용하고, 공무원들은 그 우산 아래서 멋대로 부정 부패하며 횡포를 일삼고 있었다. 그건 더없이 잘 어울리는 공생 관계였다. 나라를 위해 독재권력은 무너뜨려야 하고, 썩은 공무원들을 일소시키기 위해서도 독재권력은 무너뜨려야 했다. 정직하고 양심적인 공무원들도 적지 않겠지만, 어떻게 된 것이 눈에 띠는 공무원은 다 그 모양이었다.

 

(P.117)

 

 

< 4 >

 

 

그 조직은 4·19 정신을 이어받아 민주주의를 추구하고 민중의 삶을 이끄는 지성인의 모임이었다. 그 대상은 모든 대학에 걸쳐 있었지만 회원 가입은 은밀하면서도 까다로운 편이었다. 좋은 대학이라고 해서 가입이 쉬운 것이 아니었다. 역사와 사회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불의와 모순에 맞설 수 있는 굳은 의지를 인정받아야 했다. 그 선정 기준은 정의로움을 품고 있는 대학생들의 정서와 잘 부합되었고, 가입의 비밀스러움과 엄격함은 회원들의 자부심과 긍지감을 상승시키는 구실을 했다.

 

학사주점이 성업을 이루었던 것은 특별히 술맛이 좋아서도 아니었고, 술값이 싸서도 아니었다. 일반 막걸리집들에서 맛볼 수 없는 특이한 분위기 때문이었다. 대학생들이 무의식 중에 갖는 공통점은 스스로 지식인이라는 우월의식이었다. 그런데 그 우월감은 자기보다 나은 지식인들을 향해서는 곧 열등감으로 바뀌게 마련이었다. 지식에 대한 과시욕과 선망이 교차시키는 예민한 감정 변화였다. 학사주점은 상호에서부터 분위기까지 그런 감정을 위로받고 충족시킬 수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서는 대학생들이 선망하는 신진 지성인들을 쉽게 볼 수 있었고, 술기운에 실린 그들의 유창한 언변은 지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신문이나 잡지에서 대할 수 있을 뿐인 그들을 술집에서 가까이 만나게 되면서 대학생들은 자기들도 수준이 한 급 올라가는 기분에 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조직이 어느 날 갑자기 통일혁명당이라고 지목되었다. 그와 동시에 대규모 간첩단으로 몰리고 말았다. 그건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월남으로 몸을 피해가서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건 너무 황당하고 억울하기 짝이 없는 누명이었다. 토론회에서 가끔 민족 분단이 의제가 되긴 했지만 통일을 혁명적으로 해야 한다는 의제가 등장한 일은 없었고, 박정희의 강압정치를 비판한 적은 있지만 간첩 노릇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분명한 사실이지만, 만약 위에서 혁명적 통일을 위해 이북의 편을 들어야 한다는 낌새라도 보였더라면 단연코 그 조직에 등을 돌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통령일 뿐이면서 황제적 권한을 휘둘러대는 박정희도 싫을 뿐만 아니라 1인 독재로 우상이 되어 있는 북의 김도 똑같이 싫었고, 민족 통일에 관한 한 끝도 한도 없이 반목만을 일삼고 있는 남과 북의 정치 집단에 대해 용서할 수 없는 불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 사건은 70명이 넘게 기소되었고, 3~4명이 사형, 수십 명이 실형을 받고 마무리되었다. 사형은 감형이 되지 않았고, 실형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지금까지도 옥살이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애써 잊으려고 했던 그 조직에 대해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많았다. 자신은 민족사상연구회에 속했을 뿐인데 수사기관에서 발표한 수사 결과는 상상할 수도 없이 끔찍스러운 내용들로 차 있었다. 민족사상연구회는 통혁당의 하부조직들 중의 하나로 되어 있었다. 자신은 그 하부조직들 중에서도 학생회원이었을 뿐이라 화를 모면한 셈이었다.

 

이상재는 그와 약속한 다방으로 나가며 그동안 의식의 저편으로 떨어져 있었던 통일문제를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통일….. 그것은 바쁘고 힘겨운 나날의 삶 속에서 곧잘 잊혀지거나 추상화되기 예사였다. 통일……. 그게 이루어지기는 이루어질 수 있는 문제일까? 언제나 그렇듯 또 막막한 회의가 앞을 가로막았다. 어쩌면 그것이 통일에 대한 정답일지도 몰랐다. 미국과 소련이 정면대결하고 있는 속에서 통일이라는 말 자체가 몽상일지도 몰랐다. 그 구도 자체가 통일과는 정반대였고, 굳이 통일을 하려면 다시 전쟁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다시 전쟁………, 그건 끔찍스런 일이었다. 그런데 더욱 답답한 것은 남과 북의 정치세력이었다. 그들은 미국과 소련이 만들어놓은 구도를 지키는 데 충실했을 뿐 전쟁 없는 통일에 대한 모색은 한 일이 없었다. 지난날 자신이 통일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 새삼스럽게 순진무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통일? 글쎄, 그거 꿈같은 얘기 아닌가? 양쪽에서 서로 반목을 조장해 대면서 그 위기를 독재 강화에 써먹고 있으니 분단은 갈수록 견고해질 수밖에 없잖아. 한 가지 좋은 예가 있어. 거 김신조 부대 사건 있잖아? 난 그 덕에 6개월이나 더 군대에서 썩었는데, 그 사건이 터지자 이쪽에서는 김일성이 곧 쳐내려올 것처럼 난리 법석을 떨며 250만 향토예비군을 창설했어. 그걸 보고 저쪽에서는 가만히 있었겠어? 그랬을 리가 없지. 보나마나 미 제국주의자들과 그 앞잡이 괴뢰도당들이 북침 준비를 하고 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하며 독재 강화의 호기로 삼았겠지. 그 맥락에서 통일을 운운하면 어떻게 되지? 재깍 빨갱이로 몰리잖아. 그러니까 어설프게 통일| 내세우는 건 바보짓이야. 남과 북이 똑같이 내부의 독재부터 제거 해야 돼, 분단을 악용하고 있는 독재 말이야 내 말 틀려?”

 

(P.124~134)

 

< 5 >

 

 

“....대학 총장들이나 설립자들 태반이 혁혁한 친일파들입니다. 연대 백낙준, 이대 김활란, 고대 유진오, 중앙대 임영신, 서울여대 고황경, 상명여대 배상명, 성신여대 이숙종 등등, 이들 중에 지금은 총장을 물러난 사람들도 있고, 제가 책을 낼 당시에는 대학이 아닌 중·고등학교만 가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어찌 됐거나 문단에 국한되었다 하더라도, 친일파들의 뒤를 캐는 저 같은 인간을 그들이 좋아할 까닭이 없지요. 그래서 그쪽으로는 애초에 마음을 두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교육계도 그렇습니까? 저는 교육계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요.”

한인곤은 어깨가 처져내리도록 한숨을 토해냈다.

 

"뭐 구분하고 말고 할 것이 없습니다. 이 나라 모든 분야는 친일파들이 장악하고 있다고 보면 틀림없는 답입니다. 이 한 가지 사실만 기억하면 됩니다. 우리나라 양쪽 끝인 두만강변에서 제주도까지, 일제시대에 있었던 일본인들은 조선 총독부터 숯장사까지 다 합쳐서 80만 명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빌붙었던 친일파들은 150만 명을 넘었습니다. 그들 중에서 단 한 명도 처벌받지 않고 고스란히 기득권을 누리며 살고 있는 곳이 이 대한민국입니다."

 

(P.231)

 

< 6 >

 

 

"나도 그놈의 지방색은 이제 넌덜머리가 나요. 박 통이 갔으니까 그놈의 차별이 싹 없어져야 하는데, 손바닥만한 놈의 나라에서 망할 징조지요. 근데 그 하와이라는 것 말이지요. 내가 알기로는 이래요. 해방이 되고 나서 남쪽의 제일 큰 정적 두 사람은 이승만과 김구였어요. 이승만은 미군정의 도움을 받으며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하고 있었고, 김구는 민족을 분단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반대하며 서로 팽팽하게 맞섰어요. 그런데 김구는 미군정의 지지를 못 받는 입장이니까 그 대신 대중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전국 순회강연을 나섰어요. 김구는 가는 지방마다 환영을 받았는데 특히 전라도 지방에서는 그 환영이 아주 열렬했어요. 그게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강연은 큰 도시에서만 하게 되어 있었는데, 작은 군에서 사람들이 몰려나와 겹겹이 기찻길을 가로막는 바람에 김구는 예정에 없던 강연을 하고서야 기차가 움직일 지경이었어요. 그런 동태가 이승만에게 빠짐없이 보고된 것은 말할 것도 없지요. 그런 보고를 다 받은 이승만이 기분이 나빠져 한마디 내뱉은 것이 '하와이놈들 같으니라구!'였어요.

 

그게 무슨 말인고 하니, 일제시대에 이승만은 독립운동을 한다고 미국 본토에 있다가 나중에 우리 동포들이 많은 하와이로 옮겼어요. 그런데 거기에는 이미 박용만이라는 사람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는 우리 동포들을 모아 독립투쟁을 할 군인들을 양성하고 있었어요. 이승만은 독립군보다는 외교 능력으로 독립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하와이에 가자마자 박용만과 대립하기 시작했어요. 두 사람을 따라 동포들이 갈라지기 시작했는데, 결국에는 이승만쪽에 몇 사람이 남지 않게 되어 이승만은 궁지에 몰리고 말았어요. 이승만은 박용만 쪽으로 쏠린 동포들에게 감정이 많았는데, 김구를 대대적으로 환영하는 전라도사람들이 옛날 하와이의 동포들처럼 보인 겁니다. 그 다음부터 전라도사람들을 하와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정 부장이라는 사람은 입담 좋게 이야기하고는 맥주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것 참 재미있는 얘길세, 김구는 비운에 가고, 이승만이 승자가 되었으니 그 12년 동안에 전라도사람들에 대한 나쁜 인식을 전국적으로 퍼뜨리고 차별하고 할 수 있었겠군. 그거 아주 일리 있는 얘기요.”

최 감독이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서울에 전라도사람들이 특별히 많지 않았는데, 그보다 10년 전부터 서울 전체에 전라도사람들을 유난히 나쁘게 보는 인식이 퍼져 있었다는 것은 사회학적 연구 대상이기도 하죠. 결국 서울사람들 태반은 전라도사람들을 겪어보지도 않고 험담하고 불신했던 셈인데, 그 배경에는 그런 정치적 영향력이 작용하지 않았나 하는 의심이 가기도 하지요." 정 부장이 오징어다리를 질겅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승만 시대에 그렇게 당하고, 박정희 시대에는 그보다 더 심하게 당하고, 박정희가 죽었는데도 지금 또 당하고 있으니 우리 전라도사람들은 분하고 억울해서 어떻게 살아요, 글쎄" 김명숙은 술기운 번진 눈으로 하소연하듯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허! 그 말 듣고 보니 그렇군요, 결과적으로 보니까 이승만은 전라도에 대한 나쁜 인식을 뿌리깊게 심었고, 뒤따라 박정희는 모든 권력기관마다 자기네 사람만 편파적으로 쓰면서 전라도 차별을 철저하게 조직화하고 구조화시켰어요. 누구나 다 아다시피 그 차별과 괄시가 얼마나 심했어요. 그건 참 망국적 범죄행위였어요." 최 감독이 혀를 차며 땅콩을 까서 입에 넣었다.

 

“박정희, 그 사람 대통령을 하기 전까지의 생애도 한마디로 하기 어렵게 복잡한데, 대통령을 한 동안의 공과도 한마디로 하기 어렵게 복잡해요. 그런데 잘못한 것 중에서 유신독재 다음으로 꼽혀야 하는 게 바로 그 지방색을 뿌리깊게 박은 지역 차별주의지요. 그것도 독재체제를 유지해 나가기 위한 한 방편으로 필연적인 산물인데, 어쨌든 그건 박 통이 크게 잘못한 거고, 나라 꼴을 위해서도 하루빨리 일소시키지 않으면 안 돼요." 정 부장이 술 마신 사람답지 않게 심각하게 말했다.

 

“저는요, 테레비 드라마는 통 안 보고 살아요." 김명숙이 정 부장의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고, "아니, 영화는 그리 좋아하면서 왜 드라마는 안 봐요? 물론 영화하고 텔레비전 드라마는 다르지만." 최 감독이 의아해했다.

 

"예, 감독님은 제 심정 잘 모르실 거예요. 글쎄, 양장점에 옷 맞추러 오는 돈 많은 손님들 중에 경상도말 하는 여자들이 자꾸 많아지는 것도 슬그머니 속이 꼬이고 사르르 기분이 상하고는 하는데, 테레비 드라마를 보면 으레껏 잘살고, 점잖고, 좋은 사람들은 경상도말을 쓰고, 식모에, 깡패에, 나쁜 사람들은 거의가 전라도말을 쓴다니까요. 테레비 보는 건 재미있자고 보는 건데, 화나고 분하기만 한 그따위 드라마를 뭐 하러 봐요.”

 

(P.376~379)

 

< 7 >

 

 

민족 이야기의 인류 보편성

 

 

"나는 한국인으로서 한국의 파란만장한 역사에 대해 오랜 세월동안 가슴 아파해 왔고, 한국의 작가로서 그 역사의 비통함과 쓰라림을 작품으로 충실하게 쓰려고 노력해 왔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태백산맥』이다. 『태백산맥』에는 단순히 한국인의 굴절 많은 슬픈 역사만 그려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속에는 세계 열강들의 각축이 내포되어 있고, 인류가 지향하는 평화가 왜 쉽게 이루어지지않는가 하는 세계적 숙제까지 담고 있다."

이것은 일본에서 완역 출판된 태백산맥을 읽은 독자들에게 보낸 글의 한 대목이다.

 

민족의 문제를 거론하거나, 민족사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면 즉각적인 거부감을 드러내거나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하는 지식인들이 뜻밖에도 많다. 특히 외국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이 그 정도가 심하다. 더구나 ‘세계화’라는 묘한 바람이 불면서 민족의 이야기는 마치 반인류적이고 비세계화인 것처럼 몰아버리는 경향이 더 커졌다. 그것은 아주 잘못된 불구적 인식이고, 단편적 사고이고, 사대주의적 의식이다.

 

그들이 공박으로 내세우는 것은 민족주의는 공격적이고 파괴적이고 폐쇄적이라는 것이다. 그 주장의 근거는 히틀러의 민족주의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 타당성이 없지는 않다.

 

그런데 히틀러가 사라지고 일본이 패망하면서 20세기 후반의 지구를 지배한 것은 두 개의 신제국주의였다. 미국은 패권주의로, 소련은 팽창주의로 제국주의화한 것이다. 그 제국주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약소국들이 힘을 모으는 데는 민족주의밖에 없었다. 그 민족주의는 강대국의 민족주의와는 반대로 방어적이고 공생적이고 개방적일 수밖에 없다. 힘이 약하니 누구를 공격할 수도 없고, 공격을 못하니 파괴할 것도 없고, 생존을 유지해야 하니 폐쇄적으로 살 수가 없는 것이다.

 

약소국들이 민족주의로 힘을 응집시켜 저항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것이 제국주의자들인 것은 더 말할 것이 없다. 그들과, 그들을 뒤따르는 다른 강국들은 히틀러의 민족주의를 모델로 내세워 그 폐해를 역설해 가며 약소국들의 민족주의를 죄악시하고 무력화시키기에 열중했다. 그 이론 개발에 동원된 것이 그 나라 학자들이었고, 소위 유학파라는 지식인들은 귀국해서 그 논리의 앵무새 역할을 하기에 바빴다.

 

그런 영향을 받은 때문일까, 아니면 반도민족의 뿌리깊은 사대주의 때문일까?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인 유대인들이 학살당한 것에서는 인류적 공분을 느끼면서도 정작 우리가 일본 지배 아래서 참살당한 사실에서는 민족의 문제만으로 국한시킬 뿐이지 인류적 공분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인류 보편성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시기도 같고, 죽은 수도 비슷한데도 말이다.

 

6.25라는 전쟁의 의미를 매몰시킨 것도 마찬가지다. 월남전은 15년이 넘는 기간 동안에 180만이 죽었다. 그런데 6·25는 단 3년 동안에 300만이 넘게 죽었다. 그럼에도 월남전은 신제국주의의 악을 세계에 고발하는 데 성공했는데, 6·25는 세계 어느 한구석에서 일어났었던 사소한 전쟁으로 묻히고 말았다. 냉전을 빙자한 반인류적 열전이 6·25였고, 냉전시대의 가장 비인간적 학살전이 6·25였다. 6·25에서 인류 보편성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통일의 길은 또한 멀다.

 

그런 의미에서 정신대 문제를 우리나라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15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끈질기게 노력해 세계화시킨 것은 더없이 값진 인류 보편성 획득의 결실이다. 정신대 문제는 식민지 피해의 일부분이고, 우리 스스로 수치스럽게 생각해 덮고 망각하려고 했던 사건이다. 그런데 뜻있는 여성 한 사람이 일을 시작해 끝내는 동남아 피해국들과 연대하게 되었고, 그 힘은 UN을 움직이기에 이르고, 전세계는 일본의 악행을 전 인류적 범죄로 확정하게 된 것이다.

 

인류 보편성, 그것을 강대국들의 자기합리화를 위한 유희의 언어가 되게 방치해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가 개개인의 자유가 보장되는 토대 위에서 피어나는 꽃이듯이 인류 보편성이라는 것도 모든 민족들의 존재가 공평해질 때 비로소 빛나는 보석으로 제 모습을 갖출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명제는 여전히 유효하다.

 

4~5년 전부터 바람을 일으킨 세계화는 이제 비로소 미국 일국주의의 횡포라고 비판이 시작되었다. 세계화의 바람에 휩쓸려 민족주의를 더욱 매도하고 나섰던 이 땅의 지식인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P. 394~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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