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 / ‘황금종이1,2’중에서

송담(松潭) 2023. 12. 17. 18:10

 

 
 
< 1 >

 
이태하는 썰렁해진 감정으로 닫힌 문만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검사의 90퍼센트 이상이 반공주의자이고, 보수주의자이고, 출세주의자라는 말을 그는 새삼스럽게 곱씹고 있었다.
 
“이 검 이야기 들었소. 헌데, 그 생각을 바꿀 생각은 없소?" 이튿날 일찍 부장검사가 이태하를 불러 물었다. 예상했던 대로 신속한 대응이었다.
 
“부장님, 대기업의 그런 불법 행태는 사회불만을 증폭시키고, 그래서 사회불안을 가중시켜서 결국은 모두를 불행하게 만드는 반사회적, 반국가적, 반국민적 만행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번에 법과 원칙에 따라 철저하게 수사해서 엄벌해야만 다른 모든 기업들의 행태도 근절될 것이고, 국민적 호응도 받고, 국가도 정상 발전을 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태하는 미리 정리해 두었던 말을 한달음에 쏟아놓았다.“그게 이 검의 신념이오?" 부장은 의미 모호하게 미소 짓더니, “됐소, 신념은 자유니까" 하며 가보라는 손짓을 했다.
 
긴 복도를 걸으며 이태하는 등줄기에 싸늘한 냉기가 끼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 불길함은 이틀 만에 적중되었다. 수사 팀에서 배제된 것이었다.
 
자신이나 한지섭 선배의 의지는 발끝에 차이는 하나의 돌맹이처럼 그렇게 간단하게 제거되고 말았다. 기득권의 힘은 그렇게 가차 없고 막강했다. 그리고 그 후로 3개월 동안 아무런 일도 주어지지 않았다. 형벌치고는 참 견디기 어려운 형벌이었다. 그 소외감과 고립감 속에서 생각나는 것은 한지섭 선배뿐이었다. 그러나 연락할 수가 없었다. 서로 비참해질 뿐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해가 바뀌어 정기 인사가 시작되었다. 이태하는 발령장을 받고 헛웃음을 쳤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심한 험지 발령이었다. 거창지원-그건 귀양살이와 다름없었다.
 
이태하는 곧바로 반격을 가했다. 사표를 내고 변호사 개업을 했다. 그리고 보란 듯 민변에도 가입했다.
'그 친구 배부르게 변호사 노릇 해먹기 어려울걸. 그 기업에 팍 찍혔잖아.’
누군가가 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기업에 찍혀? 그럼 지놈들이 어쩔 건데?'
이태하는 기분이 획 상하면서 코웃음을 쳤다.
 
그 거대 기업에서 다른 큼직큼직한 기업들에게 '이태하 블랙리스트'를 쫙 뿌렸다는 것이었다. 그 어떠한 사건도 주지말라고.
 
그리고 반년 넘게 질질 끌던 그 수사는 '국민경제 위축 등 악영향을 고려하여……… 어쩌고 하는 그 상투적 이유를 반복하며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국가기관 그 어디든 사통팔달 로비력이 안 미치는 데가 없다는 그 기업의 막강한 힘은 그렇게 여실하게 입증되었다. '로비력'이라는 그 모호한 말은 다름 아닌 '금력'돈의 힘이었다.
 
'돈, 돈은 무엇인가……….
 
그지없이 허망하고 허탈한 감정에 싸여 이태하는 새삼스럽게 이 생각을 또 하고 있었다. 돈이면 이 세상 모든 일이 안되는 게 없다는 것쯤은 애들까지도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국가 공권력까지 그렇게 흐물흐물해지는 것은 끔찍스럽고 고통스러운 체험이었다. 그러고 보면 결국 그런 결의를 세웠던 한지섭 선배와 자신은 그 은밀한 야합적 현실을 잘 몰랐던 철부지였고, 돈키호테였던 셈이다.
 
이태하는 스스로의 감정을 다스리고 소화시키기 위해 한선배에게 자신이 겪은 일을 며칠에 걸쳐 자세하게 써나갔다. 그건 경과 보고서이면서 하소연이고 넋두리였다. 그리고 외로운 동지애의 확인이기도 했다.
 
-돈의 위력이 참으로 실감 난다. 썩고 병든 세상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겪고 보니 생각보다 훨씬 심하구나. 그런 잇속으로 뒤얽힌 정글을 어찌해보겠다고 마음먹은 우리가 지극히 순진하고 어리석었던 게 아닌가 싶다. 도대체 돈이 무엇일까…………, 다시금 생각한다. 돈은 우리 사람들의 생존을 유지해 가는 소중한 도구이되, 공권력까지 그렇게 무력화할 만큼 안 되는 것이 없는 괴력을 발휘하니 그건 흉물이기도 하다.
 
 

< 2 >

 
이태하는 정겹게 말하며 쓰다듬는 눈길을 강남길에게 보냈다.
"변호사님,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강남길은 감격 어린 목소리로 고개를 깊이깊이 숙였다.
 
이 험하고 몰인정한 세상에서 저런 선한 변호사도 계시다니. 우리같이 가난하고 힘없는 것들을 업신여기지 않고 이렇게 다정하게 도와주시다니. 고맙고 고마우셔라. 하느님이 따로 없지. 저런 양반이 바로 하느님이시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변호사가 사라지고 없는 저쪽을 바라보며 강남길은 고개를 숙이고 또 숙이고 있었다.
 
이태하는 월세를 4배로 올려 받으려고 하는 건물주의 탐욕을 다시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리 돈이 좋다지만 그렇게도 무도한 욕심을 부리다니…… 처벌법이 없어서 그렇지 그 무도함이 바로 죄였다.'돈…………. 돈…………. 돈은 무엇인가…………?
 
이태하는 '인생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보다 훨씬 더 자주 회의에 빠지는 그 물음을 또 곱씹고 있었다. 그러나 인생에 대한 물음이 그렇듯 돈에 대한 물음에도 선명한 답이 없었다. 아니, 이런저런 답이 많았지만 결정적인 것 하나를 고르기가 어려운 것인지도 몰랐다. ‘정치와 종교가 인간세상의 2대 필요악이라는데, 돈을 더해서 3대 필요악이 아닐까・
이태하는 전에 가끔 했던 생각을 또 하고 있었다.
 
'돈 안 생각하고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 도와주는 마음씨 좋은 변호사 선생님들이 모인・・・・・・
 
전관예우를 받아 한 해에 몇백억을 벌고, 어지간한 경력자면 연봉 10억씩을 예사로 버는 변호사들에 비하면 민변에 소속된 변호사들은 세상 물정 모르는 특이한 사람들일 수밖에 없었다. 자기들이 매달 회비를 내서 사무실을 운영하며 무료 변론에 나서고 있으니.
 
-이 형은 그 자리를 굳건히 지켜야 하오. 해마다 불어나는 순수한 동지들이 있지 않소. 그 일이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자기희생적인 세상의 빛이오.
 
한지섭 선배의 편지였다. 자기는 그 순수한 동지들이 없어서 정계를 떠났다는 의미가 강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민변은 처음 51명이 발족시켰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그런데 30년을 넘기며 그 수가 1천2백여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현실을 모르는 철없고 정신없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들이 서로서로를 받쳐주고 가려주는 둔덕이 되고 울타리가 되는 것을 느끼며 이태하는 나날을 버티어갈 수 있는 보람과 의미와 힘을 얻고 있었다.
 
 

< 3 >

 
“응, 교수는 개론에 어울리도록 여러 철학자들이 정의한 짤막짤막한 인생론들을 소개하고 있었어. 그게 성인의 삶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대학 1학년생들에게는 아주 유익하고 흥미로운 일이잖아.
 
'인생은 원인의 철학도 아니고 결과의 철학도 아니고 경과의 철학이다. 칸트,
'인연을 맺지 말라. 원수는 만나서 괴롭고, 그리운 사람은 만나지 못해서 괴로우니라. 석가모니
'가장 행복한 것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고, 그 다음은 빨리 죽는 것이다. 쇼펜하우어.
'절망의 반대편에서 삶은 시작된다. 사르트르,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일절 구속하지 않을때 나는 비로소 참 나가 될 수 있다. 노자
'살아야 할 이유가분명한 사람은 그 어떤 고난도 이겨낼 수 있다. 니체,
'명성을 남기려고 급급하지 말라. 그대가 앞선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듯이 뒤따라오는 사람들도 그대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으리니' 아우렐리우스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자기 자신을 알아내는 일이다. 탈레스,
 
이렇게 열댓 가지 적어나가면서 부연 설명을 끝냈는데 한 학생이 불쑥 손을 들었어. '질문이 한 가지 있습니다. 교수님 강의와 직접 관련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질문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돈이란 무엇입니까?' 이 질문은 아주 돌발적이었고, 신선했어. 그런데 교수는 분필든 손등을 입에 댄 채 고개를 숙이고는 교단을 끝에서 끝으로 뚜벅뚜벅 걸었어. 그 발걸음이 옮겨질 때마다 구두가 교단을 울리는 소리만 조용한 강의실에 퍼지고 있었어. 그런데 교수는 또 교단의 끝에서 끝까지 걸어갔어. 교단끝에서 휙 돌아선 교수가 칠판 빈 데다 쓰기 시작했어. '돈은 인간에게 실존인 동시에 부조리다.' 이렇게 쓴 교수가 돌아서더니 '오늘 강의는 끝!' 하고는 강의실을 나갔어. 다른 것들과 달리 아무 부연 설명도 없이 그때 모든 학생들의 시선은 일제히 칠판의 그 짧은 문장에 박혀 있었어. 그 한 줄의 문장은 학생의 질문만큼 도발적이고 신선했거든.
 
이태하는 진지하게 긴 이야기를 끝내고 목이 마르다는 듯 술을 단숨에 비웠다.
 
소송 사건들의 90퍼센트 이상이 돈에 얽힌 것이고, 그러다 보니 현규 같은 끔찍한 사건이 적지 않아 남자와 여자의 입장이 반대로 바뀌었을 뿐이지 현규네와 거의 같은 사건이 몇 년 전에도 벌어졌었어. 문제의 발단은 남자가 행시에 합격하자마자 변심을 했기 때문이었어. 사시와 행시 합격자들을 노리는 마담뚜들의 포충망에 걸려든 남자가 너무 좋은 조건에 그만 마음이 변하고 말았어. 그런데 중요한 문제는 그 남자가 4수 끝에 행시에 합격한 것인데, 그 뒷바라지를 별로 잘살지도 못한 애인이 직장 생활을 해서 한 것이었어. 그러니 그 변심은 용납할 수도 없고, 용서할 수도 없는 배신이 된 거지. 그런 여자의 입장에 맞서서 남자도 배은망덕한 배신을 절대 되돌리려고 하지 않았어. 새 여자네 집의 엄청난 황금에 눈이 뒤집힌 거지. 무슨 수를 써도 남자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게 되자 여자는 남자를 단념하기로 했어. 그래서 이별의 조건으로 마지막 데이트를 청했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기고 싶다면서. 그래서 남자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응했지. 그래서 둘이는 서해안 바닷가로 나갔고, 술을 마셨고, 키스를 했어. 그런데 그 키스가 문제였어. 여자가 남자의 혀를 물어뜯었어. 남자가 사력을 다해 발버둥 치고,여자를 떠밀어대고 했지만 여자는 남자의 혀를 놓아주지 않았지. 결국 남자의 혀가 끊어지고 말았어. 그런데 또 문제는 여자가 잘린 혀를 바로 뱉은 게 아니었어. 바로 뱉으면 집어서 빨리 병원에 가 봉합수술을 할 수 있는데, 여자는 그것을 질겅질겅 씹은 다음 뱉은 거야. 혀 토막이 걸레가 됐으니 남자는 꼼짝없이 벙어리가 됐고, 행시 합격은 무효가 됐고, 마담뚜도 등을 돌렸지. 그리고 재판이 열렸는데 여자의 태도가무시무시했어. 칼로 찔러 죽이고 싶었는데 그건 기운이 딸릴 것 같아서 혀를 끊은 것이라는 말을 당당하게 했거든. 그리고 자기는 반성하지 않는다는 말도 거침없이 했어. 배은망덕하고 파렴치한 배신에 대해서 꼭 해야 할 정당한 복수를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어. 결국 그 여자는 살인미수와 반성을 모르는 불손한 태도 때문에 법정최고형을 받았어. 그런데도 그 여자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당당하기만 했어. 그리고 감방으로 돌아가 영웅 대접을 받기 시작했다는 거야."
 
“아하, 그거야말로 '돈은 인간의 실존인 동시에 부조리다'에 꼭 맞아떨어지네!"
 
 

< 4 >

 
"말도 마라. 너희 둘은 먹여 살려야지, 입혀야지, 어서 셋방살이는 면해야지. 헌데 느이 아빠 벌이는 네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니 어째야겠냐. 체면이고 창피고 다 내던지고, 진일이고 마른일이고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돈벌이에 나설 수밖에. 그래서 느이들이 대학교 문턱을 넘었고, 연립주택이나마 우리 집도 지니게 된 게야."
 
자신과 남동생은 어머니의 이런 수십 년 된 재방송을 지겹고 지긋지긋하도록 듣고 또 들으면서도 절대로 지루하거나 싫은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건 어머니의 쓰라린 고생담이었고, 한스러운 인생 고백록이었고, 슬픈 여인사 술회였고, 인생 성공담이었고, 자식 정신교육용 교재였던 것이다. 또 남편 공격용 제압용 무기였음은 물론이다.
 
“너, 엄마가 자꾸 되풀이하는 똑같은 얘기 듣기 싫지?" 초등학교 6학년인 남동생에게 물었다.
"누나는?" "너 듣기 싫구나?" "알면서 왜 물어."
 
이 말은 어머니가 신세 한탄 다음으로 많이 한 말이었다.자신과 남동생은 그 간절한 어머니의 바람을 너무나 잘 알았다. 그래서 공부를 잘하려고 열심히 했다. 그러나 공부라는 것은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도 남동생도 애쓰는 만큼 성적이 올라가주지 않았다. 둘 다 머리가 그저 그랬던 것이다. 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 어머니는 그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 바람을 접은 것이었다. 자신이나 남동생이나 어머니한테 가장 면목 없고 미안한 일이 그것이었다. 영어 단어 하나를 종이에 다섯 번 이상 써대도 외워질까 말까 그랬고, 연대나 지명 같은 것도 기를 쓰며 외워 겨우 머리에 들어갔다 싶은데 얼마 지나지 않으면 아리송하게 잊어먹게 되는그런 머리가 야속하기만 했다.
 
머리가 그 모양이라 어머니가 바라는 출세나 신분 상승은 틀린 일이니 조금이나마 어머니를 위로하고 도울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다. 그것이 편의점 알바였다. 대학생들의 시간제 알바는 식당이나 카페 같은 곳도 있었다. 그러나 일의 강도나 감정 소모 같은 것을 비교해 보면 그래도 편의점이 좀 더 나았다. 오후 7시부터 밤 11시까지 하루 4시간씩의 편의점 알바는 그런대로 자신이 원하는 바를 해결해 주었다. 어머니에게 사소하게 손을 벌려야 하는 일이 없게 해주는 것이 제일 먼저 살 것 같았다. 시급 9,620원이 일으키는 마술 같은 고민 해결이었다. 그 돈은 자신의 용돈만 충당해 주는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 모르게 남동생에게도 일요일마다 조금씩 쥐어주게 해주었다. 그 돈을 주게 되면서부터 남동생은 얼마나 고분고분해졌는지 몰랐다. 흔히 말하는 '돈의 위력'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생생하게 실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실감은 바로 '지배의 통쾌함'이기도 했다. 그렇다, 지배의 통쾌함. 그 기분은 참 야릇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뭐라고 꼭 찍어서 말할 수 없는 그 기분은 떳떳함이고, 뻐근함이고, 당당함이고, 승리감이고………… 참 여러 가지 기분이 뒤엉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소한 돈이 이런데 큰돈이면 또 그 기분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 응답처럼 재벌들 이야기가 생각났다.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재벌들은 청와대로 불려가 대통령 앞에 빳빳이 둘러앉아 대통령의 일장 연설을 들으며 드의 소리 없이 이렇게 말한다는 것이었다. ‘느네들은 5년일 뿐이지만 우리는 영원하다.’ 그 말은 틀림이 없어 대통령들은 5년이 되면 하루도 어김없이 그 자리에서 밀려나 빈 권력이 되지만 재벌들은 자꾸자꾸 재산이 불어나 더 큰 부자가 되어가는 것이었다.
 
대통령 권력도 우습게 아는 재벌들의 그 이야기가 떠오를 때면 또 한 가지 이야기가 잇따라 떠올랐다. 대학 축제 때 외부 강사가 한 인문학 강연이었다. 강연 제목이 '돈의 마력과 인간 사회'라고 아주 자극적이었다. 그래서 학생들이 다른 즐길 거리들이 수두룩했는데도 강연장을 가득 채웠다.
 
“돈이 있은 이후에 인간 사회는 줄기차게 돈에 지배되어왔다.” 강연의 첫마디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50분 동안 강연은 줄곧 그렇게 자극적이고 박진감 넘치고 숨 가쁘게 이어졌다. "인간 사회를 지배해 온 두 개의 권력은 정치와 종교다. 그런데 그 두 가지를 지배하는 권력이 있다. 그것이 돈이다."
 
“자본주의는 돈의 위력과 만능성을 최고의 가치로 떠받들어 올린 주의다. 그것은 곧 인간 스스로 돈의 노예화를 선언한 것이다."
 
“모든 종교의 신들은 다 죽었고, 생살여탈권을 가진 돈만이 오로지 살아 있는 신이다."
 
"세계 최고의 역사학자이면서 소설가로도 꼽히는 중국의 사마천은 벌써 2,200여 년 전에 이렇게 말했다. 백금으로는 형벌을 면하고, 천금으로는 죽음을 면하고, 만금으로는 세상을 얻는다. 바로 그 세상을 얻는다는 말은 현대 자본주의 국가의 재벌들이 국가권력까지 쥐고 흔들어대는 작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런 말들이 돌에 깊이 판 비문처럼 뇌리에 또렷하게 박혀있었다. 그런데 그 말들 중에서 특히 충격적으로 가슴을 친 것이 '모든 종교의 신들은 다 죽었고, 생살여탈권을 가진 돈만이 오로지 살아 있는 신이다'였다.
 
그 말 중에서 '살아 있는 신이다'보다 더 실감 나고 무서운 말이 '생살여탈권'이었다. 사람의 목숨을 죽이고 살리고를 마음대로 하는 것'이 돈의 힘이라는 것이었다. 자살자들의 많은 수가 돈이 없기 때문이니 그 말은 틀림이 없었고, 돈의 힘이 그렇게 세니 소름 끼치도록 무서웠던 것이다.
 
 

< 5 >

 
"그러니까 이만 우리 관계 정리해." 김수희가 담담하게 말했다. "아니, 갑자기 왜 그러냐고." 신영식은 당황한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갑자기가 아니야. 아주 오래, 심각하게 생각해 온 문제야.""그러니까…… 내가 이번에 또 취업이 안 돼서 그러는 거지?" 신영식이 손을 맞비비며 울상이 되었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니야. 이 말은 안 하고 싶었지만 안 할수가 없는데………… 영식 씨는 우리처럼 별 볼일 없이 후지고찌질한 인생에 연애며 결혼 같은 게 어울린다고 생각해?" 김수희는 눈길을 들어 신영식을 빤히 건너다보았다. “그게…………, 글쎄…....” 신영식은 더 당황해하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거봐, 영식 씨도 앞날이 암담하고 답답하고 한심하다고생각하잖아." "그렇지만 아직 살아보지도 않고 미리부터..." 신영식이 김수희의 눈치를 보며 어물거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막연하고 무책임하게. 꼭 살아봐야 알아? 우리 어머니 아버지 들 살아온 것 실컷 봤고, 요새 가난한 젊은 부부들이 얼마나 고생하며 허덕거리고 사는지 얼마든지 보고 있잖아. 그게 그대로 우리의 앞날이고 미래잖아. 그렇게 숨 막히고 가망 없는 인생을 나도 똑같이 살면서 불행하고 비참해지고 싶지 않아." "그러면 어떻게 살 건데?",
 
신영식은 맥이 다 빠진 눈길로 김수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글쎄, 나도 잘 몰라. 요새 우리처럼 후진 인생의 젊은이들이 결혼을 자꾸 늦추고, 결혼을 해도 애를 안 낳기로 하고, 그리고 혼자 살겠다는 사람들이 자꾸 많아지는 건 왜 그렇겠어. 다들 앞날이 불안하고 가망이 없으니까 그렇잖아. 우리 같은 인생, 결혼해서 둘이 맞벌이를 한다고 해도 대기업이나 전문직이 아니면 그 수입 뻔하잖아. 수입 보잘것없는 직업가지고 둘이 죽어라고 일해서 벌어봤자 애들 어떻게 키우고, 어떻게 가르치고, 집은 언제 장만하고, 생활은 언제 안정되고・이런 것 다 말하면 뭘 해. 절망만 점점 커지지. 난 그래서 사랑이며 결혼이며 그따위 것 다 포기하기로 했고, 사는 날까지 그저 혼자 사는 게 가장 홀가분하고 가장 편할 것 같다는 결론에 도달했어."
 
김수희는 그동안 생각해 왔던 것을 속 시원히 털어놓았다. “혼자…………? 그거 너무 외롭잖아." “외로워?" 김수희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흘렸다. "그럼 한 가지 방법이 있잖아." "......?" "우리도 요즘 유행하는 것처럼 결혼도 늦게 하고, 애도 안 낳고 살면 되잖아.” 신영식의 목소리에는 약간 생기가 돌고 있었다.
 
“결혼도 늦게 하고, 애도 안 낳고…………” 김수희는 한마디, 한마디를 꼭꼭 씹듯이 천천히 되풀이하고는, "영식 씨, 우리 만날 때마다 데이트비 부담되고 있는 것 어떻게 생각해?" 그녀는 불쑥 물었다. "데이트비?” 신영식은 말문이 막히며 얼굴이 굳어졌다.
 
“우린 그 정도의 능력밖에 없는 사람들이야. 영식 씨가 취업이 되고, 내가 졸업해서 알바 아닌 취업을 한다고 해도 어느 세월에 전세비 모으고, 집 살 돈 모으고 하겠어. 앞길이 막막하고 한심하다니까. 그러니까 영식 씨도 사랑이니 연애니 다 때려치우고 혼자 살 궁리나 해. 그게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구."
김수희는 핸드폰을 꺼내 시계를 보았다.
 
"난....난 안 되는데……….” 신영식이 울상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나 알바 시간 다 됐어.” 김수희가 몸을 일으켰다.

 

<1 > ~ <5>
조정래 / ‘황금종이1’중에서

 
 
< 6 >
 
개보다 못한 사람

 
“있잖아, 아까 그 강아지 봤지? 걔한테도 회장님 모시는 거하고 똑같이 잘해야 돼. 왜냐면 외롭게 사시는 회장님께서 끔찍히 사랑하시는 반려견이거든. 더 물을 말 있으면 물어."아줌마가 정답게 웃었다. “예, 뭐 별로……….”
 
전진혜는 '개 수발까지 들어야 하나' 생각하며 어물거렸다. 개 먹이도 비싼 외제가 수두룩하고, 개 병원, 개 유치원, 심지어 개 영어학원까지…… 그 비용이 가난한 집 생활비보다 더 많이 든다는 말을 가끔 들을 때면 전진혜는 속이 뒤틀려오르고는 했다. “미친것들, 개 새끼한테 영어를 가르쳐? 미국이 그렇게도 좋으냐? 웃기고 자빠졌네.”너무 역겨워 이렇게 욕을 해댄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이다.
 
"지금부터 하는 얘기 잘 들어. 이 강아지 이름이 '해피'인데, 나한테는 없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존재야. 다시 말하면 자식 같은 존재다 그거야 무슨 말인고 하니, 자식들은 다섯이나 되지만 다 즈이 새끼들 데리고 사느라고 부모는 나 몰라라 해버리니깐 없는 거나 마찬가지고, 언제나 내 옆에 딱붙어서 말 잘 듣고, 재간 부리면서 날 웃게 하는 건 이 해피뿐이야. 그러니까 뭐랄까, 이 해피는 내 막냇자식이나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자네도 앞으로 해피를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것처럼 그렇게 하라고. 개는 사람 말을 대강 100가지에서 200가지를 알아듣는다고 하는 말이 있는데, 내가 직접 길러보니 그보다 더 많이 알아듣는 것 같았어. 안 통하는 말이없으니까. 특히 이 몰티즈 종이 영리한 데다, 사람을 잘 따르는 심성을 지녔으니까. 그러니까 자네가 진심으로 잘해주고 사랑하면 자네하고도 금방 친해질 거야. 집에서 기르는 짐승들은 즈네들에게 밥 주는 사람한테 가장 충성한다는 말이있네. 그러니 오늘은 얼굴을 익히고, 낼부터는 밥을 자네가 맡아서 주도록 하게 알아들었나?"
 
회장은 전진혜를 빤히 건너다보았다. 눈이 동그랗게 크고, 작은 몸이 새하얀 털로 뒤덮인 개도 주인 따라 '알아들었나?' 하는 듯 전진혜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네, 회장님. 저도 개를 좋아합니다. 해피가 해피하도록 잘하고, 많이 사랑하겠습니다." 전진혜는 속마음과는 전혀 다르게 이렇게 응답하며 고개까지 공손하게 깊이 숙여 보였다.
 
"어허허허, 해피가 해피하도록 해주겠다? 그 말 한번 멋지다. 그 말재주 한번 맘에 들었어. 어허허허………”
 
"밥 먹고 나서 해피도 목욕 좀 시키게 이놈이 털이 길어서 목욕을 잘 시키고, 털을 잘 닦아 잘 말려줘야 해. 눈도 잘 씻겨줘야 해. 눈이 동그랗게 커서 예쁘지만 그 대신 눈병이 잘 걸리거든. 그리고 입과 항문도 잘 씻겨주고. 몸 청결한 걸 좋아하니까." 회장은 말끝마다 '잘, 잘'을 빼놓지 않았다. "네, 알겠습니다.”
 
전진혜는 비위가 싹 상했지만 공손하게 고개 숙이며 대답했다. 아무리 외로움을 덜어주고 귀엽다고 하지만 개 새끼를 그렇게 위한다는 게 영 역겹기만 했다. 개 새끼는 개 새끼일 뿐이지 그 털 빠지고, 냄새 나고, 오줌 싸고, 똥 싸는 개 새끼를 사람 사는 집 안에다 함께 살게 한다는 게 전진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회장이 원하는 것이고, 회장의 마음에 들어야 하니까 전진혜는 해피를 해피하지 않은 마음으로 회장이 만족할 수 있도록 목욕시켰다.
 
“김 변 급한 일이니 나 좀 빨리 만납시다. 여기 병원이오."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변호사가 회장을 만나러 왔다. 두 사람이 얘기하는 동안 진진해는 밖에 나와 있었다. 변호사는 오래 있지 않고 돌아 갔다.
 
"이보게, 미스 진,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거짓 없이 진심으로 대답해야 해. 알겠는가?" 회장이 진진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네에, 회장님.” 그 심상치 않은 회장의 눈빛에 긴장하며 진진혜는 고개까지 끄덕였다. "자네, 해피가 예쁜가, 안 예쁜가?" "네, 아주 예쁩니다." "음, 내가 귀하게 여기는 만큼 자네도 귀하게 위해 줄 수 있는가?" “네, 갈수록 정이 드니 그럴 수 있습니다." "정말 나처럼 할 수 있어?"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래, 고맙군." 회장은 전진혜의 손을 꼬옥 잡더니, "해피가 한 살 먹어 나한테 와서 7년을 함께 살았어. 자식들 다 품 떠나고 외로운 내 곁에서 온갖 재롱을 다 부리며 나를 즐겁게 해줬지. 평균수명이 15년 정도라니까 해피는 절반 정도 산 셈이야. 나머지 7년 정도를 자네가 내가 하듯이 그렇게 해피를 사랑하고 돌봐줄 수 있다. 그런 말인가?" 회장이 손을 더 꼭 잡으며 물었다. "회장님, 왜 그런 말씀을” “아니야, 나 얼마 못 살아. 내가 다 알아. 자네, 그 약속 할수 있어?" 회장이 전진혜의 눈을 더 똑바로 쳐다보았다. “네, 회장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틀림없이 약속하지?" “네, 회장님, 약속드립니다." "정말 틀림없이?" “네, 틀림없이 약속드립니다." “그래, 고마워. 우린 세 번 맹세했어. 난 자넬 믿어. 자넨 심성이 착하니까." 회장이 전진혜를 끌어안았고, 전진혜도 회장을 꼭 끌어안았다.
 
이튿날 변호사가 와서 서류를 작성했다. 회장의 전 재산을 반려견 해피에게 유산으로 남기되, 개에게는 상속권이 없으니까 해피가 자연사할 때까지 돌봐주는 조건으로 가족이 아닌 제3자로서 전진혜에게 물려준다는 서류였다. 전진혜는 변호사가 시키는 대로 인적 사항을 다 적고, 사인하고, 도장이 없어 지장을 찍었다.
 
그러면서 전진혜는 속이 뒤집어지는 배신감을 꾹꾹 누르고 있었다. '아니, 내가 개 새끼만도 못하단 말인가!' 자신에게 남겨진 것은 단 한 푼도 없고, 자신은 오로지 개새끼 시중꾼일 뿐이었다.
 
변호사가 돌아가고, 전진혜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모독감을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신은 회장이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었다. 회장은 육체적으로 성적 기능이 전혀 없으면서도 정신적으로는 욕구가 살아 있다는 것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샤워할 때마다 자신의 몸을 탐했다. 두 손으로 자신의 몸을 샅샅이 더듬었고, 입술을 맞추었고, 젖가슴을 핥아댔다. 싫고, 징그러웠지만 애써 참아냈다. 그랬는데 모든 재산을 개 새끼한테 넘기고, 자신은 개 새끼 시중꾼으로 만든 것이었다. '좋아, 나도 방법이 있어!' 전진혜는 뿌드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갈아붙였다.
 
회장은 급격하게 체력이 떨어져가더니 열흘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전진혜는 그날로 해피를 안고 그 집을 떠났다. 상속 서류와 함께.
 
이튿날 아침 일찍 전진혜는 먼 아파트촌의 공원을 찾아갔다. 아침이 일러 산책객이 드문드문했다. 그녀는 해피의 목줄을 나무에 살짝 묶어놓고, 아침밥 그릇을 놓아주었다. 해피는 꼬리를 흔들어대며 먹기 시작했다. 그녀는 슬슬 뒷걸음질쳤다.
 
'난 개 새끼한테 매달 몇십만 원씩 들일 돈이 없어. 사람이 굶어 죽어가는 세상에 말야. 잘 가. 새 주인 만나서 잘 살어' 해피는 그저 먹기에 정신을 팔고 있었다.
 
전진혜는 뒤돌아서 힘껏 뛰기 시작했다.
 
조정래 / ‘황금종이2’중에서 (부분 생략, 발췌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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