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 소설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송담(松潭) 2023. 12. 19. 21:20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손채경 변호사님께

 

안녕하십니까. 뵙지 못한 상태로 인사드립니다. 저는 신문의 민노진 기자라고 합니다. 스마트폰 만능의 시대 현실에 안 어울리게 편지 쓰는 걸 이해하여 주십시오. 변호사님을 취재하려고 근무처로 열 번,예, 꼭 열 번을 찾아갔지만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대형 로펌의 파워가 엄청나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 저를 완전 차단, 거부하는 일을 당하면서 그 폐쇄적 파워를 여실하게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 완강한 배타적 조직 보호에 막혀 마음 단단히 먹었던 취재를 포기, 단념한다는 것은 기자의 근성상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수단으로 이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개인정보보호법에 가로막혀 변호사님의 핸드폰 번호를 알 방도가 없으니 다른 방법이 더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어찌 보면 이렇게 편지를 쓸 수밖에 없는 게 오히려 잘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할 얘기를 아무런 구애 받지 않고 길게 다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변호사님, 왜 제가 변호사님을 취재하려고 하는지 직감적으로 아시겠지요. 변호사님께서 당하신 일은 엄청난 충격이고, 분노이고, 고통일 것입니다. 그런 만큼 단단히 복수하고 싶고, 응징하고 싶고, 처단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그 더러운 기억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고, 덮고 싶고, 잊고 싶기도 할 것입니다. 변호사님께서는 지금도 이런 상반된 감정에 시달리고 계실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제가 변호사님을 꼭 취재하려고 하는 것은 그 사건이 너무나도 큰 사회적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에서 제가 분명히 밝혀둘 사실이 있습니다. 저는 사회부 기자이지 연예부 기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저는 변호사님이 당하신 사건을 반드시 대수술이 필요한 우리나라의 중대한 사회문제로 다루고자 하는 것이지 선정적 흥밋거리로 다루려는 것이 아닙니다.

 

정치적으로 몰아댄 이 나라의 급속한 압축적 경제발전은 숱한 문제점들을 야기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큰 문제가 재벌들의 특혜 육성이었고, 그와 함께 형성된 부익부 빈익빈은 우리 사회의 존망을 위협하는 가장 뿌리 깊은 고질병이 되었고, 그 천민자본주의의 황제로 군림하게 된 재벌들은 이 나라의 모든 분야를 맘대로 흔들어대는 무한 권력을 자행하게 되었습니다. 그 생생한 실례, 무도한 횡포 중의 하나가 바로 변호사님께서 당하신 그 어이없고 참담한 사건입니다.

 

어찌 감히 재벌 2세에 지나지 않은 인간이 여성 변호사에게 그런 만행을 저지를 수 있단 말입니까. 그 기막히고 끔찍한 사건은 유야무야 우물쭈물 묻혀가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현실을 도저히 묵인할 수 없었고,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사회부 기자로서, 이 사회가 인간다운 사회로 운영되고, 또 그런 사회가 되게 하기 위해 최소한이나마 역할을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변호사님을 심층취재하려고 근무처를 거듭거듭 방문했으나 결국은 좌절의 쓴잔을 마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랬으면서도 체념해 버리지 못하고 이렇게 편지를 쓰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취재가 성사되었을 때 변호사님께 드리고 싶었던 질문들을 간추려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둘째는 중대한 제보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취재 시 첫 번째 질문입니다. 변호사님이 가해자의 처벌을 원치 않아 재벌 2세인 그 폭행범은 무죄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처벌을 원치 않은 것은 변호사님의 뜻이었습니까, 아니면 조직으로부터 무슨 압력을 받은 것입니까. 둘째, 무슨 대화가 문제가 되어 가해자가 변호사님의 머리채를 낚아채서 마구 휘둘러댔는지요. 셋째, 가해자의 다른 손찌검은 또 없었는지요. 넷째, 동석한 남자 변호사 둘은 그 폭행이 자행되고 있을 때 어떻게 대응했는지요. 다섯째, 그 가해자는 술만 마시면 여자 종업원들을 괴롭히고 폭력행사를 하는 것으로 강남 일대에 소문이 자자합니다. 그날 그 가해자는 변호사님만이 아니라 남자 변호사들의 따귀를 갈겨댈 정도로 막 나가는 판이었는데, 변호사님한테는 머리채를 낚아채서 휘둘러댄 것 외에 다른 성추행을 저지르지는 않았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여섯째, 가해자 처벌을 원치 않게 된 데에는 가해자 쪽으로부터 손해배상을 한다는 뜻으로 돈을 받았기 때문인지요. 일곱째, 가해자 쪽에서 안 받았으면 직장인 로펌에서 무슨 특별한 조처라도 취해 줬는지요. 여덟째, 영업 관계상 이 사건을 무조건 덮기 위해 로펌 쪽에서 변호사님께 부당한 압력 행사 같은 건 없었는지요.

 

대충 위와 같은 질문을 하고자 했습니다. 이 질문들 모두가변호사님을 곤혹스럽게 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이 편지에 대한 답장으로 그 응답이 오지 않으리란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열 번 찾아간 그 헛수고가 안타까워 이 편지를 쓰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둘째 문제, 중대한 제보를 할 차례입니다. 제가 이번 사건취재를 시작하면서 가해자 쪽도 동시에 했습니다. 그 결과 이번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서 가해자 쪽에서는 로펌에 100억을 전했습니다. 이 사실은 기자의 명예를 걸고 무한책임을 질수 있는 100퍼센트 확실한 정보입니다. 이 사실을 알려드리는 것은 변호사님께서 이미 이 사실을 다 알고 있을 수도 있고, 전혀 모르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변호사님 사건에 대해 기대했던 저의 마지막 소회를 적겠습니다. 박정희 개발독재의 철저한 비호 아래 급속도로 비대해진 이 나라 재벌들의 행태가 세계 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비정상임은 이미 다 알려져 있습니다. 그들이 행사하는 어마어마한 돈의 힘이 국가권력까지도 좌지우지하는 건 이미 오래된 일입니다. 그래서 재벌들이 자행하는 횡포와 병폐를 진보를 내세운 정권들도 전혀 수술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정경유착, 경언유착, 경법유착, 권경유착이 상시적으로 벌어지고 있으니 권력이 바뀔 때마다 '경제개혁, 재벌개혁' 구호를 요란하게 떠들어대지만 조금씩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우물쭈물 용두사미가 되고는 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그 진경을 언론에 몸담으면서 점점 명료하게 보게 되면서 실망이 절망으로, 절망이 완전한 좌절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변호사님 사건이 터졌습니다. 저는 그 사건을 변호사도 우습게 알고 술주정 폭력 대상으로 삼는 재벌 횡포의전형적, 표본적 사건으로 보았고, 이 사건이 적나라하게 폭로되고, 피해당사자 여변호사가 성추행 · 인권유린, 폭행 등으로 본격적으로, 적극적으로 법적 대응에 나선다면 이 나라 재벌들이 저질러대는 안하무인적 횡포와 무소불위의 병폐를 사회적으로 적극 문제시하고 비판하고 매도하여 대수술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고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그 큰 의미의 일에 미력이나마 저의 힘도 적극 보태기로 작정하고 변호사님 취재에 본격적으로 나섰던 것입니다.

 

저는 이번 사건으로 그 재벌 쪽에서 100억을 내놓은 것에 대해서 전혀 놀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재산은 수십조에 이르고, 그들에게 100억은 시쳇말로 '껌값'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편지를 끝내면서 한 가지 '기우'를 전하고자 합니다. 저의 하찮은 기자로서의 감각과 판단은 어쩐 일인지 변호사님께서 그 100억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계실 것 같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변호사님은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햇병아리 변호사이시고, 그 로펌은 그저 돈만 밝히는 닳고 닳은 노회한 백여우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편지를 끝내겠습니다. 긴 편지를 읽어주신 고마움에 대한 선물을 하나 드릴까 합니다. 만약 100억의 존재를 저의 편지를 보고 아셨다면, 변호사님은 어찌하시겠습니까. 저는 그 돈을 변호사님이 변호사님의 것으로 꼭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그 일은 변호사님 혼자 힘으로는 쉽게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제가 그 일을 일거에 명쾌하게 해결할 수 있는 적임자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제가 기자 생활을 통해서 알게 된 수많은 변호사들 중에서 그분은 가장 양심적이고, 가장 정의롭고,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믿을 만한 분입니다. 그분은 이태하 변호사이고, 변호사님의 대학 대선배이시기도 합니다.

 

어서 상처 회복하시기를 빌며, 이만 편지 마칩니다.

 

손채경은 다 읽은 편지를 손에 든 채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편지가 던진 충격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민노진 기자의 예리함은 마치 탐조등 같았다.

 

그 기자는 그날 현장에서 모든 것을 목격한 것처럼 '성추행'을 지적하고 있었다.

 

그날의 사건에 대해 신문에 보도된 것들은 아주 짧았고, 사건도 머리채를 낚아채서 흔들어댔다는 것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이름 뒤에 '가명'이라고 표시되어 적힌 이름은 전혀 딴 이름이었다. 그 기사에서 사실이 사실대로 명료하게 밝혀진 것은 두 가지였다. 재벌 회사 이름과 로펌 이름이었다.

 

그런데 자신은 그 기사를 보고 순진, 단순하게도 자신의 이름이 감추어진 것만을 큰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 대형 로펌에는 변호사들이 100여 명이었고, 여성 변호사들도 20여 명이었으므로 가명이 씌어진 이상 자신의 존재가 드러날 위험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은 위험에 처한 조개처럼 입을 꼭 다물고 그 누구에게도 그 사건을 얘기한 적이 없었다. 그렇게 자기 보호에만 웅크리고 있으면서 그 사건이 어떻게 해서 신문에 보도된 것인지를 따져볼 생각은 전혀 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민 기자의 편지를 받고 보니 그 발설자가 누구인지 단박에 드러나고 말았다. 발설자는 바로 로펌이었다.

 

"그거 미친개에게 물렸다고 생각하시오. 술 먹은 미친개라는 말이 있지 않소. 그리고 똥 밟았다고 생각하고, 똥 밟은 발은 씻으면 그만 아니오. 알겠소?" 로펌 대표호탕하게 웃어댔다.

 

자신은 어찌할 수 없이 겨우 대답을 했다. 자신으로서는 그날 받은 충격으로 매일 밤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고, 삭일 수 없는 분노 때문에 날마다 일손이 전혀 잡히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일만 조용히 잘 넘기면 내가 대학 선배로서 손 변 장래는.... 알겠소?" 대표의 그런 의미심장한 말은 100여 명 직원 변호사들이 하나같이 듣고 싶어하는 감언 (甘言)이었다.

"네에,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대표는 자신을 독대해 주는 것으로 그 사건을 깨끗하게 정리해 버렸다.

 

그날 남자 변호사 둘과 그 재벌 2세를 만났던 것은 상견례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 회사는 자기네 로펌의 단순한 클라이언트(고객)가 아니었다. 많은 클라이언트 중에서도 최고로 꼽는 VVIP 클라이언트였다. 그 그룹의 여러 회사들 중에서 하나를 곧 물려받게 되어 있는 그 2세에게 담당 변호사로서 인사를 하러 간 것이었다.

 

자꾸 심해지는 술기운을 이겨내려고 애쓰며 손채경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머리 좋은 사람은 젖통이 작다고 하던데 손 변은 아주 크잖아 그거 진짜야. 가짜야?" 이 말과 함께 2세가 손채경의 가슴을 덮치고 들었다."어머나!" 2세의 커다란 두 손이 자신의 젖가슴을 움켜잡는 것을 느끼며 손채경은 그를 힘껏 떠다밀었다.

“화아, 이거 진짜잖아!" 2세는 끄떡도 않고 외쳐대더니 다음 순간 그의 손이 스커트 밑으로 쑥 들어왔다.“사람 살려!" 손채경은 울부짖으며 두 손으로 2세의 얼굴을 힘껏 할퀴었다.

 

“하, 요런 쌍년이 버릇없이! 이년아 영광인줄 알어." 2세가 침을 내뱉으며 손채경의 머리채를 낚아채서 마구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손채경은 꼼짝달싹 못 하고 휘둘리면서 비명을 질러댔다. 두 변호사가 양쪽에서 2세를 붙들며 말렸다. “이 새끼들아, 이거 놔! 저년이 감히 내 얼굴을 할퀴어. 이 새끼들아, 이거 놓으라니까!" 2세는 이렇게 외쳐대다가 손채경의 머리채를 놓고 두 변호사의 따귀를 갈기기 시작했다. 그 틈을 타서 손채경은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대며 방을 뛰쳐나가고 있었다.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려 편지의 글씨가 보이지 않았다. 손채경은 편지를 책상 위에 놓고 티슈를 뽑았다. 눈물이 그렇게 흐르는 것은 이 세상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수치와 치욕과 억울함과 분노를 그 편지는 자상한 손길로 따스하게 어루만지며 위무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노진 기자라는 사람은 칼날같이 예리한 추리력과 판단력으로 사건전모를 꿰뚫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전혀 모르고 있었던 중대 정보를 알려줌과 동시에 해결책까지 제시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손채경은 여러 가지로 생각하다가 이태하 변호사를 직접 만나는 것보다는 먼저 편지부터 보내기로 했다. 말로 설명하기보다는 민노진 기자의 편지를 동봉하면 이 변호사가 사건전모를 파악하는 것이 명료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처음 뵙는 이태하 변호사님께

 

저는 K 로펌에 근무하는 손채경입니다. 저는 3년 전에 변호사의 말석을 얻게 되었고, 변호사님의 대학 후배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글월 올리는 것은 다름이 아니오라 저의 일신상의 중대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변호사님께서 힘을 베풀어주시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여기, 변호사님을 저에게 소개해 주신 ㅊ신문의 민노진 기자님이 저에게 보내주신 편지의 사본을 동봉합니다. 그 편지를 읽어보시면 제가 어떤 일을 당하고, 어떤 곤경에 처해 있고, 변호사님께 부탁드리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명쾌하게 아시게 될 것입니다.

 

변호사님께서 저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로 마음 정하시면, 죄송하지만 저에게 전화 좀 주십시오. 변호사님께서 전화 주시면 그날로 사표 내고, 바로 변호사님을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변호사님의 전화를 학수고대하면서, 후배 손채경 올림.

 

손채경은 등기 속달로 이태하 변호사에게 편지를 부쳤다. '변호사님,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그녀는 우체국을 나오며 이런 말을 기도하듯이 저절로 되었다. 사흘이 지나 이태하 변호사에게서 전화가 왔다."만납시다. 사표내고 바로 오시오.”

 

뼈만 추린 그 한마디가 남긴 여운 속에서 손채경은 민노진 기자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분은 가장 양심적이고, 가장 정의롭고,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믿을 만한 분입니다.

손채경은 미리 써두었던 사직서를 대표의 비서실에 내고 아무런 미련 없이 로펌을 등졌다.

 

“민 기자의 편지를 읽고 사태를 충분히 파악했소. 한시도 시간을 끌 일이 아니니까 오늘부터 바로 일을 시작합시다." 서로 명함을 주고받으며 인사가 끝나자 이태하 변호사가 말했다.

 

"네에,그럼 선임료는 내일 준비...” 일이 너무 빨리 진행되는 것에 손채경은 약간 당황하며 말했고, “아니오, 아니오, 바로 제소하는 게 아니라 그 전에 한 가지 할 일이 있소." 이태하 변호사가 흐릿하게 웃음 스치는 얼굴로 말하며 손을 저었다.

 

"......?" 손채경은 무슨 뜻인지 알아챌 수가 없어서 이태하 변호사를 쳐다보기만 했다.“아, 다른 게 아니고 제소하기 전에 오늘 중으로 저쪽에 내용증명을 띄우겠소."

 

“내 이름으로 내용증명이 날아가면 정면공격이 시작되었다는 걸 실감하고 다급하게 사건 수습에 나설 수밖에 없소." “.......”

 

말이 없는 손채경의 눈길은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 사건이 제소되어 그 로펌 대표가 직원의 피해보상금을 착복한 파렴치 행위가 세상에 폭로되면 어찌 되겠소? 그 로펌까지 문 닫게 될 것이오. 더구나 내가 내용증명과 함께 민기자의 편지도 동봉할 것이오. 그럼 그 대표가 어찌 되겠소.”

 

"아니, 민 기자의 편지는 사신인데···“ 손채경은 당황스럽게 말했다.

 

"그래서 내가 민 기자한테 미리 전화했어요. 그랬더니 민기자가 흔쾌히 동의했어요. 자기도 보내기 바란다고." "어머나, 민 기자님이....” 손채경은 너무 고마워 감탄이 절로 흘러나왔다.

 

손채경은 눈물이 복받쳐 오르는 것을 느끼며 더 말을 잃고 있었다. 타인이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큰 호의를 베풀어주는 것은 최초의 일이었던 것이다.

 

“아마 내 예측으로는 제소할 것 없이 내용증명으로 문제가 마무리될 것 같소. 여기 은행 계좌번호 적어놓고 가서 좀 쉬시오.” “계좌번호요…………?” 손채경은 더욱 못 알아듣는 얼굴이 되었다.

 

“아, 돈 받아야 될 거 아니오. 내용증명에 적어 보내야지요." 이태하 변호사가 비로소 편안하게 웃으며 손채경 앞으로 메모지를 밀어놓았다.

 

손채경은 손아귀에 잔뜩 힘을 주며 계좌번호를 적어나갔다. 어쩐 일인지 가슴도 손도 와들와들 떨리고 있었다. 그 번호로 그 어마어마한 돈이, 100억이라는 돈이 들어오리라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손이 떨리지 않게 하려고 있는 힘을 다 주었지만 종이에 씌어지고 있는 숫자에는 손떨림이 여실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됐소. 그럴 리도 없겠지만, 만약 그쪽에서 전화 오면 절대 받지 마시오. 지금부터 그쪽과 하는 말은 이쪽에 치명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할 수가 있소. 알겠소?" 이태하 변호사가 웃음 싹 가신 얼굴로 냉정하게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엿새째 되는 날에 손채경은 이태하 변호사의 전화를 받았다. "다 끝났소. 입금 확인하시오."

“네에……?” 결론만 간추린 이태하 변호사의 말에 손채경은 또 어리둥절했다. “아, 저쪽에서 손 변 계좌로 요구액 입금 완료했다는 연락이 방금 왔소. 손 변은 은행에 가서 입금 확인하시오."

 

"어머나, 변호사님!" 손채경은 정신이 아찔한 것을 느끼며 탄성을 질렀고, “그럼 전화 끊겠소." 이태하 변호사는 더 할 말 없다는 듯 전화를 끊었다.

 

"고객님, 확인하시지요. 100억입니다." 은행원이 통장을 내밀며 말했다. '뭐라고...…?' 손채경은 가슴이 쿵 울리는 것을 느꼈다. '정말이네!'

 

손채경은 눈앞이 흐려지는 것 같아 정신을 차리려고 마음을 가다듬으며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야무지게 훔쳤다. 그리고 통장을 받아 들고 눈길을 모았다. 눈앞에 주루룩 줄을 선 동그라미들. 그것이 몇 개인지, 너무 많아 셀 수가 없었다. 자신의 동생렇게 많은 수의 동그라미들을 본 것은 그야말로 세상에 태어나서 최초의 일이었다.

 

손채경은 집에 오자마자 이태하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입금 확인했습니다." “틀림없었소?" “네, 틀림없었습니다." “아, 아주 잘됐소.”

 

"변호사님, 내일 아침 10시쯤 찾아냈으면 하는데요.""아니, 잘 끝났으면 됐소. 올 것 없어요."“아닙니다. 아직 처리할 일이 한 가지 남았습니다."

 

“뭐요, 전화로 말하시오." “전화로는 안 될 일입니다. 내일 찾아뵙겠습니다. 시간 오래 안 걸립니다."

 

“다름이 아니라 그 돈의 절반을 민 기자님과 변호사님께드리고 싶습니다." 이튿날 이태하 변호사와 마주앉자마자손채경이 한 말이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요? 25억씩을 말이오?" 이태하 변호사가 깜짝 놀랐다. “네. 그 돈은 저만의 것이 아닙니다. 두 분이 아니었으면 그돈은 영영 못 찾게 되었을 것이고, 두 분께서 찾아주셨으니까 그 돈은 공동 소유입니다."

 

“그 말은 꽤 그럴사한 말 같지만 합리성과 타당성이 전혀 없으니 그런 말을 괴변이라고 하는 거요. 그리고 그 돈을 나한테 주려는 것은 손 변이 나를 그 로펌 대표와 똑같은 도둑놈 만드는 것이오. 그건 절대 안 될 일이니 그만 돌아가시오. 민 기자도 그 얘길 들으면 고마워하는 게 아니라 모독감을 느낄 것이오. 근데 그런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 있소. 이제 모든 일이 다 잘 끝나고 시간 여유도 갖게 되었으니 손 변 건강부터 살피시오. 그 사건으로 받은 상처가 클 텐데 어서 병원 치료부터 받으시오. 그런 상처 잘못 방치했다가는 평생 트라우마가 될 수 있어요.”

 

“네, 염려 말씀 감사합니다. 근데 제가 두 분께 은혜를 못갚게 하시면 변호사님께서도 저를 로펌 대표처럼 도둑놈 만드는 것입니다.”

 

"알겠소. 그 마음만 받겠소. 그 마음 참 고맙소. 그리고 이 길로 빨리 병원이나 찾아가시오.”

 

이태하 변호사가 먼저 몸을 일으키며 손채경을 내쫓듯 문을 향해 두 팔을 휘저었다.

 

열흘쯤 지나 이태하 변호사는 비서로부터 한 통의 서류봉투를 건네받았다. 발신자가 손채경이었다. 이 변호사는 당황해서 서류봉투를 뜯었다.

 

제가 이렇게나마 하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하는 것이니 이 보은을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여 주시고 받아주십시오. 민 기자님도 제 마음을 헤아려주시리라 믿습니다.

 

변호사님이 이 편지를 받으실 즈음이면 저는 딴 나라를 향해 하늘을 날고 있을 것입니다. 철학을 하고, 디자인을 하는 친구 둘과 함께 긴 외국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여러 나라의 문화와 문명을 여유롭게 살피며 저의 앞날의 삶에 대해서도 진지하고 심각하게 생각하는 시간을 갖고 싶습니다. 마음의 상처가 어느 만큼 다스려지면 귀국해서 연락 올리겠습니다. 건강하십시오. 존경합니다.

 

이 편지와 함께 5억짜리 자기앞수표 2장이 들어 있었다. “참 사람도…………” 이태하 변호사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민노진 기자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조정래 / ‘황금종이2’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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