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 소설 61

조정래 / ‘아리랑 11권’ 중에서

조정래 / ‘아리랑 11권’ 중에서 조선족에게 쏘련은 도대체 무엇인가. 쏘련은 왜 조선족을 이렇게 핍박하는가. 전 인류적 해방을 외치고 있는 공산주의 모국 쏘련이 왜 이 모양인가. 약소민족의 독립을 지원한다는 쏘련이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그건 다 거짓이고 위장인가? 아니, 강제이주를 시키는 어떤 이유가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정당하게 사람 대접을 해야 할 게 아닌가. 왜 할 일은 제대로 안 하고 바른말을 하는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죽이는가. 제놈들에게 사람을 개 잡듯 죽일 권한이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죄인이고 노예라 해도 이렇게 가혹하게 취급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아니, 짐승도 이렇게는 취급할 수가 없다. 흉악무도한 놈들! 인민해방, 인민혁명, 인민의 천국, 전 인류적 해방, 약소민족의 독..

조정래 소설 2021.06.06

조정래 / ‘아리랑 10권’ 중에서

조정래 / ‘아리랑 10권’ 중에서 낙엽들이 구르는 10월의 싸늘함 속에 서럽도록 맑고 밝은 달빛이 만주벌판을 끝 간데 없이 비추고 있었다. 밤이 깊어 정적도 깊고, 벌판이 너무 아득하게 넓어 달빛도 까마득히 펼쳐져 있었다. 이어지다 꿇기고 다시 이어지는 낙엽 구르는 소리가 슬픈 흐느낌처럼 더욱 사무치고, 잎들을 다 떨군 채 가지 앙상하게 줄지어 선 방풍림들의 모습이 더욱 쓸쓸하고 외로웠다. 송가원은 그 달빛 속에서 가슴을 온통 서러움으로 적시고 있었다. 벌판에 가득한 달빛을 쓸어낼 수가 없듯이 가슴을 가득 채운 서러움도 몰아낼 길이 없었다. 아버지를 잃은 것이 이다지도 깊고 진한 서러움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고향 선산에 모시지 못하고 만주벌판에 뿌린 탓인지도 몰랐다. 아니면 아버지와 정을 ..

조정래 소설 2021.06.02

봉숭아물

봉숭아물 금님이와 금예는 봉숭아꽃을 따면서 연상 토닥거리고 있었다. 어스름이 내리고 있는 좁은 마당가에는 여름꽃들이 울긋불긋 화사하게 피어 있었다. 키 껑충한 접시꽃, 작은 장난감 나팔 같은 분꽃, 새초롬한 색시 같은 도라지꽃, 방싯거리는 것 같은 봉숭아꽃. 그러나 담을 타고 있는 나팔꽃과 땅에 다붙은 난쟁이 채송화는 잠꾸러기답게 해가 지면서 꽃들이 오므라들었다. 그런데 접시꽃도 분꽃도 도라지꽃도 한 가지 색만이 아니었다. 흰색과 분홍색, 노란색과 주황색, 보라색과 흰색 등으로 어우러져 있었다. 그중에서도 봉숭아꽃은 제일 다채로워 빨간색 흰색 노란색 분홍색을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꽃밭은 더욱 화사하고 풍성했다. "안직 꽃이 덜 여물었는디 발써 물얼 딜일라고 그러냐 머시가 급허다고” 보름이는 가게 쪽에서..

조정래 소설 2021.06.01

조정래 / ‘아리랑 9권’ 중에서

조정래 / ‘아리랑 9권’ 중에서 목포 시가지와 수많은 섬들이 떠 있는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다도해, 이름 그대로 바다에는 섬들이 많고 많았다. 날씨가 맑은 데다 초겨울의 냉기까지 서려 바다색깔은 투명하게 푸르렀고, 수평선은 까마득하게 멀었다. 가지각색의 모양을 한 크고 작은 섬들도 그 윤곽을 선명하게 드러내며 바다를 신비스러운 아름다움으로 꾸미고 있었다. 가끔 볼 때마다 저절로 감탄이 터져나오곤 했던 그 바다에서 박동화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그 아름다운 풍광이 슬픔이 되고 있었다. 시위를 시작하기 전에 이것저것 많이 생각했었다. 그러나 결국 주동자의 일원이 되었다. 박동화는 평소에 듣고 또 들었던 땅 빼앗긴 이야기와 할아버지가 옥사한 이야기가 가슴에 만들어온 분노를 ..

조정래 소설 2021.05.28

조정래 / ‘아리랑 8권’ 중에서

조정래 / ‘아리랑 8권’ 중에서 그들은 나무숲을 배경으로 해서 사진 찍을 준비를 했다. 방대근과 윤주협 그리고 또 한 사람이 가운데 서고 다른 사람들이 양쪽 옆으로 섰다. 오늘의 주인공은 가운데 선 세 사람이었다. 사발이 위에 사진기를 받친 사진사가 검은 천을 둘러쓰고 사진기를 조절하는 동안 그들은 언제 떠들고 웃어댔나 싶게 심각해져 있었다. 아니, 그들의 얼굴은 모두 비장해져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사진은 단순히 훗날의 추억을 위해 찍는 것이 아니었다. 의열단원들은 동지들이 새 임무를 맡아 떠날 때마다 기념촬영을 했다. 그런데 그 기념촬영 거의가 영원한 이별이 되어왔던 것이다. 5년의 세월 동안 300여 명이 사진만 남겨놓고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니 떠나는 사람이나 보내는..

조정래 소설 2021.05.22

그 깊은 한

그 깊은 한 겨울과 함께 명태철이 오면 어란공장에서는 밤일을 시작했다. 며느리는 온몸에 비린내를 묻혀가지고 밤늦게 돌아오고는 했다. 그러나 밤일 품삯은 보잘것이 없었다. 일본사람들치고 생선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없지만 어란은 유별나게 좋아했다. 특히 목포에서 나는 명란에 환장한다는 것은 이미 널리 퍼진 소문이었다. 그런데 조선사람으로 목포 명란젓을 제일 많이 사는 사람은 광주의 현 부자라고 했다. 그것을 사교 선물로 쓴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영암군수로 오는 사람들은 누구나 영전을 해간다는 소문도 퍼져 있었다. 목포 명란젓을 총독부 관리들에게 부지런히 바친 까닭이라고 했다. "참, 시상이 지랄 겉이 얄굿어진게 알 통통허니 밴 명태국 한분 씨언허니 낋에묵털 못허고 사요 이. 맛난 알언 왜놈덜이 미리 다 빼..

조정래 소설 2021.05.19

조정래 / ‘아리랑 7권’ 중에서

조정래 / ‘아리랑 7권’ 중에서 수국이는 들녘의 서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들녘은 그쪽으로 끝도 없이 펼쳐져 나아가고 있었다. 용정을 감싸고 있는 들녘이 용정들이었고, 서쪽으로 펼쳐진 것이 평강벌이었다. 평강벌 그 북쪽으로 올라가면 어머니가 묻혀 있는 곳이었다. 수국이는 눈길을 거둬 용문교를 바라보았다. 해란강을 가로지른 용문교를 따라 넓은 길이 들녘 가운데로 곧게 뚫려 있었다. 그 길은 모아산 중턱을 넘어 국자가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모아산 너머가 바로 국자가였고, 모아산이 양쪽으로 거느린 야트막한 산줄기는 용정과 국자가를 구분짓는 담이나 다름없었다. 그 길을 따라서 가면 걸어서라도 며칠이면 어머니 옆에 갈 수 있었다. 그러나 마음대로 떠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수국이는 흘러가..

조정래 소설 2021.05.17

조정래 / ‘아리랑 6권’ 중에서

조정래 / ‘아리랑 6권’ 중에서 대종교단은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대종교는 총본사가 동만주에 있었지만 국내에서 종교활동을 하려면 그 법령을 피할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이미 만주 일대에서는 대종교가 일본의 노골적인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중국관헌들을 앞세워 북간도 화룡현의 무관학교를 없애려고 시도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서간도 환인현에서는 동창학교를 끝내 폐교시키고 대종교 관계자들을 강제로 추방하게 뒷조작을 했던 것이다. 그런 총독부가 인가를 내줄 리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국내 포교를 포기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한양의 남도 본사에서는 해결책을 긴급히 세워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 일을 해결하려고 교주 나철은 두만강을 건넜다. 남도 본사에 도착한 나철은 일..

조정래 소설 2021.05.12

조정래 / ‘아리랑 5권’ 중에서

조정래 / ‘아리랑 5권’ 중에서 7월의 무더위 속에서 들녘의 푸르름은 바닷빛으로 짙게 넘실거리고 있었다. 넓고 큰 날개를 느리게 펄럭이며 한가롭게 날고 있는 해오라기의 우아한 자태가 들녘의 푸르름 속에서 유난히 돋보이는 한 떨기 하얀 꽃이었다. 한가한 해오라기들과는 대조적으로 푸르름 속에서 바삐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푹푹 찌는 더위를 무릅써가며 논일을 하고 있는 농부들이었다. 절기에 맞춰 논일을 미룰 수 없는 농부들은 넓고 넓은 들녘에 수없이 많은 점으로 박혀 있었다. 그들은 불별을 온몸으로 받고 팥죽땀으로 온몸을 적시며 허리를 펼 짬도 없이 논일을 하고 있었다. 긴 다리로 겅중겅중 걷다가 우렁을 잡아먹고, 기다단 목을 세워 여기저기 살펴다가 큰 날개를 펼쳐 다른 논으로 유유하게 ..

조정래 소설 2021.05.05

조정래 / ‘아리랑 4권’ 중에서

조정래 / ‘아리랑 4권’ 중에서 해마다 그랬던 것처럼 펑퍼짐한 산마루에는 달집이 높직하게 솟아 있었다. 수십 개의 짚단과 생솔가지로 엮어세운 달집의 생김새는 둔한 듯하면서도 듬직해 보였다. 짚으로 만들어진 물건들이 특유하게 품고 있는 질감이고 형체감이었다. 그러나 달집의 둔한 듯한 느낌은 꼭대기에 꽃힌 솔가지다발의 특이한 형상으로 색다른 세련미를 갖추고 있었다. 달집을 만든 짚단들은 집집마다 추렴한 것이었다. 살림의 형편에 따라 많이 내고 적게 내고는 각자의 마음에 달린 것이었지만 살림이 궁하다고 하여 한 단도 내지 않는 집은 한 집도 없었다. 누가 강압하는 것이 아니었다. 농사를 지으며 마을을 이루고 살아온 오래고 긴 날에 걸쳐서 그렇게 마음 마음을 모아온 것이었다. 농사를 지으며 사는 사..

조정래 소설 2021.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