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 소설

조정래 / ‘아리랑 7권’ 중에서

송담(松潭) 2021. 5. 17. 04:59

조정래 / ‘아리랑 7권’ 중에서

 

< 1 >

 

 

수국이는 들녘의 서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들녘은 그쪽으로 끝도 없이 펼쳐져 나아가고 있었다. 용정을 감싸고 있는 들녘이 용정들이었고, 서쪽으로 펼쳐진 것이 평강벌이었다. 평강벌 그 북쪽으로 올라가면 어머니가 묻혀 있는 곳이었다.

 

수국이는 눈길을 거둬 용문교를 바라보았다. 해란강을 가로지른 용문교를 따라 넓은 길이 들녘 가운데로 곧게 뚫려 있었다. 그 길은 모아산 중턱을 넘어 국자가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모아산 너머가 바로 국자가였고, 모아산이 양쪽으로 거느린 야트막한 산줄기는 용정과 국자가를 구분짓는 담이나 다름없었다. 그 길을 따라서 가면 걸어서라도 며칠이면 어머니 옆에 갈 수 있었다.

 

그러나 마음대로 떠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수국이는 흘러가는 물줄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신의 가슴에서도 그 강물처럼 서러운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용문교 왼쪽으로 물줄기 하나가 해란강과 합해지고 있는 것이 바라다보였다. 명동촌을 거쳐 흘러내리는 육도하였다. 육도하가 해란강에 흘러드는 것처럼 수국이는 자신의 가슴에서 흐르는 서러움을 해란강에 띄워보내고 있었다. 물 맑은 해란강은 평강벌과 용정들을 지나 두만강으로 흘러간다고 했다.

 

 

< 2 >

 

 

문고리를 건 공허는 홍씨를 와락 끌어안았다. 가녀린 몸이 품에 안겨들며 비릿하고도 싸아한 냄새를 상큼하게 풍겼다. 치자꽃냄새일까, 구절초냄새일까...... 그 야릇한 냄새를 여전히 꼭 짚지 못하며 공허는 혼곤한 뜨거움에 휩쓸리고 있었다.

 

공허는 몸이 타는 다급함으로 여자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여자는 잔잔하고 부드러운 몸놀림으로 옷 벗기는 것을 거들었다. 기약도 없이 어둠을 타고 떠났다가 기별도 없이 어둠을 헤치고 표연히 나타나는 사람. 어디로 가느냐고, 어느 때쯤 오느냐고 물을 수도 없는 사람. 바람이듯 왔다가 구름처럼 떠나버리고는 하는 허망 속에서도 인연의 씨를 뿌려 남편이 된 사람. 그러나 떠남을 붙들 수 없는 것처럼 남편이라고 부를 수 없는 사람. 그래서 기다림은 더 목마르고 그리움은 더 사무쳐 가슴에서 웅어리로 뭉치고, 행여 짐이 될까 하여 그런 마음을 말로 풀어내지도 못하는 처지. 오로지 품에 안기는 그 짧은 밤에 기다림의 목마름도 풀고 그리움의 사무침도 풀어야 했다. 홍씨는 알몸인 채로 서서 알몸이 되어가는 남자를 흐릿한 어둠 속으로 바라보며 알 수 없는 힘에 휘말리고 있었다.

 

알몸이 된 공허는 두 팔로 젖가슴을 가리고 선 여자를 끌어안았다. 뜨거운 여자의 몸에서 아까보다 훨씬 더 진한 살냄새가 물큰 풍겼다. 여자의 몸을 으스러지도록 꼭 껴안으며 부르르 떨었다. 여자도 진득한 신음을 흘리며 남자의 등을 끌어안았다.

 

남녀는 한덩어리로 요 위에 허물어져 내렸다. 남자는 이글거리는 불덩어리였고, 여자는 나비가 앉기를 기다리며 벙그러지고 있는 한 떨기 빨간 꽃이었다. 호랑나비는 긴 침으로 꽃의 씨방을 더듬었다. 꽃은 활짝 벙그러지며 씨방 언저리를 넓혔다. 호랑나비의 긴 침은 꽃이 열어놓은 길을 따라 씨방문을 찾아냈다. 침은 씨방의 진액에 빨려들 듯 씨방 안으로 파고들었다.

 

“아으으.......” 꽃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으흐, 으흐......” 호랑나비가 큰 날개를 퍼득거렸다.

 

수없이 많은 꽃들이 흐드러지게 판 꽃밭이었다. 아니, 아득하게 넓은 푸르른 들판이었다. 아니, 그것도 아니었다. 물결 눈부시게 반짝거리는 아슴한 바다였다. 꽃밭이었다가 들판이었다가 바다였다가 그것들이 한덩어리로 뒤엉키며 흔들리고 출렁거리고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홍씨는 그 혼미한 황홀함 속에서 기다림의 응어리도 그리움의 응어리도 흔적 없이 녹아내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석류의 신맛도 아니었다. 홍시의 단맛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유자의 향그러운 맛도 아니었다. 안개에 묻힌 것인가, 구름에 실린 것인가. 바람을 타고 솟는 것인가. 공허는 형용할 수 없는 맛에 도취하며 어딘가로 붕붕 떠가고 있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었다. 억세게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였다. 땅을 박차며 뛰는 황소였다. 그 불길에 타는 황홀함이여. 그 물줄기에 부서지는 아련함이여, 그 발급에 짓밟히는 후련함이여. 더 타 올라라, 더 쏟아져라, 더 뛰어라...... 여자는 온몸이 저릿거리고 간질거리고 부풀어오르는 절묘함에 취하고 또 취하며 남자의 동작에 맞추어 몸짓하고 있었다.

 

온몸을 태우는 굴이었다. 온몸이 빨려 들어가는 굴이었다. 온몸이 녹아내리는 굴이었다. 끝이 어디인지 모를 굴이었다. 그 크지 않은 몸에 이리도 깊은 굴이 있을 수 있는가 남자는 화끈거리고 옴죽거리고 짜릿거리는 굴의 오묘함에 마취되면서 마침내 폭발하고 있었다.

“으흑, 으으으으으...........”

 

그 터져오르는 불길에 여자는 온몸이 산산이 부서지는 막바지 황홀감에 휩쓸리며 남자를 부둥켜안고 떨었다. 수없이 많은 불똥들이 튀고 있었다. 하얀 천들이 무수히 나부끼고 있었다.

 

공허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홍씨 위에 무너져내렸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것 같았다. 온몸이 재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그러나 그 후련하고 말끔한 기분은 어떤 일에서도 느낄 수 없는 흡족함이었다.

 

불똥들이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었다 하얀 천들이 시나브로 처져내리고 있었다. 홍씨는 질긴 아쉬움을 떼치며 공허의 넓은 가슴을 떠받쳐올렸다.

“편허니 누시제라!”

공허의 가슴은 땀으로 끈적하게 젖어 있었다. 그 땀이 자신의 젖가슴을 다 적신 것을 홍씨는 뒤늦게 느끼고 있었다.

이 문풍지 떠는 추운 밤에도 땀이 저리 나는가!

 

 

< 3 >

 

 

"누군 장가가기 싫어서 안 가는 줄 아나, 말만 하지 말고 쓸 만한 여자부터 구해와. 러시아년들이야 흔해빠졌지만 쏠모없이 색이나 밝혀대고, 조선처녀들이야 어디 있어야 말이지" 조강섭은 찬장에서 무언가를 꺼내며 농조로 말했다.

 

집은 방과 부엌이 따로 구분되지 않은 함경도식 한 칸짜리였다. 한쪽 벽에 세워진 투박한 책꽃이가 유일한 치장물이었다.

 

"러시아처녀들 좀 예쁜가. 자네야 여자들이 좋아하니까 하나 골라보지 그래, 젖도 출렁출렁한 게 조선처녀야 댈 게 아니잖나" 윤철훈이 다리를 쭈욱 뻗으며 빙글거리고 웃었다.

 

"처녀 때 예쁘고 젓만 크면 대순가. 애 하나만 낳고 나면 모두 돼지가 돼버리고, 그놈에 구멍이 맞어야 말이지."

 

"옳지, 이실직고하는구먼. 그간에 러시아처녀들 얼마나 더 버려놨나? 사람이 양심이 좀 있어야지. 처녀들 버려놓기만 하고 장가는 안 들겠다니 원."

 

"허, 남 말하고 앉었네. 과부한테 불알 잡히고, 유부녀하고 그 짓하다가 들켜 빨가벗고 도망친 게 누군데 그래. 이 동지 앞에서 다 까발려놔야 입다물겠어?"

 

“이허, 나야 독립자금 긁어내느라고 봉사투쟁한 거 아닌가, 점잖은 이 동지 물드는데 그만두세그려." 윤철훈이 껄껄대고 웃었다.

 

이 동지가 점잖다고? 그렇겠군. 러시아땅에서 얼마 안 된 데다 투쟁만 하셨으니, 헌데 그것만은 점잖아서 좋을 게 없이요. 그 기계도 안 쓰면 녹이 스니까요. 러시아여자들이 몸집이 큰 만큼 그 구멍도 크지만 그래도 겨울에 몸풀기는 아주 최고예요. 그 밑이 뜨끈뜨끈하고 화끈화끈한 게 화로가 따로 없어요. 왜 거기가 그리 뜨거운지 압니까? 지독하게 추운 날씨에 냉병 걸리지 말라고 하느님이 그리 만들어준 겁니다. 그 맛과 이 맛을 제대로 알아야 러시아 땅에 살 자격이 있어요."

조강섭은 웃지도 않고 그런 말을 하며 술병을 흔들어 보였다.

............

 

“그렇지, 우리 빨치산들 먹이고 입히느라고 애쓰고, 일본군들한테 위협당하고 폭행당하고 죽고, 동포들이 겪은 온갖 고생을 생각하면 가슴 아프고 면목이 하나도 없지.” 윤철훈의 목소리가 더 침통해졌다.

 

"아니, 면목이 없지야 않지. 아직 나라를 완전히 해방시키지는 못했지만 빨치산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고, 얼마나 많이 죽었는가. 결국 왜놈들 군대를 연해주에서 싹 몰아내지 않았는가. 그것만으로도 우리 빨치산들은 체면은 세운 거 아닌가. 이제 연해주 동포들이야 맘놓고 살 수 있으니까."

조강섭의 말은 다리에 부상을 당한 용사답게 당당했다.

 

이광민은 조강섭의 말에 동감했다. 일본군들이 작년 10월에 연해주에서 철수한 것은 조선인 빨치산들이 러시아 적군과 협동한 결과였다. 조선인 빨치산들의 활동이 없었더라면 일본군들은 지금까지도 연해주에 버티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조선 빨치산들의 활약에 대해서는 러시아 적군들만이 아니라 일반인들한테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조선 빨치산들은 러시아 적군과 협동해 일본군을 몰아내고 시베리아땅을 혁명정부에 되돌려준 동시에 연해주의 우리 동포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공을 세운 것이었다.

 

"그래, 조선은 아직 해방시키지 못했어도 연해주는 해방시켰다! 자네 말이 맞네, 동포들도 그 공이야 잘 알고 있으니까." 윤철훈이 조강섭의 진정을 잘 안다는 듯 활기차게 말하며 밝게 웃었다.

 

"일본놈들, 어리석고도 지독한 놈들이야. 몇 년 버티지도 못하고 밀려날 놈들이 시베리아를 다 집어먹을 속셈으로 벽돌로 막사를 그렇게 견고하게 지어대다니." 조강섭이 이를 갈 듯이 말하며 술병과 잔들을 옮겨놓았다.

 

“당연하지, 7만 병력을 투입했을 때야 꼭 시베리아를 집어삼길 작정이었지. 러시아혁명군을 얕잡아보았으니 그런 몽상을 할 만도 하지 않나. 시베리아를 먹어치우면 만주야 더 쉽게 손아귀에 넣을 수 있으니까. 왜놈들의 왜소한 대가리들이 벌인 탁상공론이지.” 윤철훈이 코웃음을 쳤다.

 

 

< 4 >

 

신한촌 앞에 펼쳐진 블라디보스토크만(灣)에 봄햇살이 부서지고 있었다. 만은 그 폭이 어찌나 넓은지 건너편 산들이 섬처럼 아득하게 보이고, 길이는 너무 길어 아예 끝이 보이지 않아 마치 넓고 넓은 바다 같았다. 그 만 가득 햇살의 반짝거림이 눈부시게 넘치고 있었다. 보드라운 봄바람이 간지르는 잔물결 위에 따스한 햇살은 현란한 꽃으로 피어나고 있었다.

 

그 햇살의 반짝거림은 노을이 물든 것과는 사뭇 달랐다. 노을에 물든 빛이 환상적이고 황홀하다면 그 반짝거림은 약동적이고 찬란했다. 노을에 물든 빛이 광택 없이 스러져가는 빛이라면 그 반짝거림은 광택 넘치게 용솟음하는 빛이었다. 그리고 노을에 물든 빛이 소리 없이 짓는 다소곳한 웃음이라면 그 반짝거림은 발랄하게 터뜨리는 낭자한 웃음이었다.

 

그 햇살의 무수한 반짝거림이 유난스레 투명하고도 현란한 것은 바닷물이 맑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블라디보스토크 앞바다는 언제나 청록색으로 맑기 그지없었다. 반 길이 넘는 물 속의 모랫바닥에서 해삼이 꼬물거리고 조개들이 입 벌리고 있는 것이 환히 들여다보였다.

 

신한촌의 산비탈에서는 어디서든지 그 넓은 만이 시원스레 바라다보였다. 그 풍광 그윽하고 소담한 만은 마치 신한촌 사람들의 전용공원 같았다. 신한촌의 조선사람들은 잔잔한 파도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고, 파도소리를 들으며 잠이 깨는 이국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이광민은 독립문거리에 서서 봄별 충만한 만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만의 왼쪽으로 나아가면 바다가 열렸다. 그 바다를 따라 하루 뱃길이면 원산에 닿는다고 했다. 원산에서 한성까지 기차로 하루, 한성에서 이리까지 또 하루, 사홀이면 집에 당도할 수 있었다. 집을 떠나온 지가 벌써 몇 년인가, 어느덧 1924년이니 6년 세월이 흘러간 것이었다.

 

"이쪽 서울거리로 가실까요” 윤선숙이 왼쪽으로 꺾어돌았다.

'서울스카야'라고도 하는 그 길은 산비탈을 따라 내려가며 해변으로 맞뚫려 있었다. 신한촌의 일곱 개의 큰길 중에서 그 길만이 유일하게 ‘서울’이라는 조선말이 붙어 있었다. 그건 조선사람들의 집단촌이기 때문에 러시아관청에서도 어쩔 수 없이 그 명칭을 허용한 것이었다. 나머지 길들은 모두 러시아의 지명을 따서 붙인 이름이었다.

 

야산의 아래서부터 개발되어 집들이 위로 지어져 올라가고 있는 신한촌에는 다섯 개의 큰길이 산을 감아돌듯 하며 가로로 뻗어있었다. 그리고 두 개의 큰길이 산자락 아래서부터 위로 뻗어 올라가며 다섯 개의 길들과 교차하고 있었다. 그 두 개의 세로길 중에 독립문 쪽의 것이 서울거리였다.

 

신한촌 야산에는 이제 거의 빈터가 없었다. 야산을 타고 돌아가며 집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 5천여 가구의 집들 사이에 예배당 네 개도 제각기 자리잡고 있었다.

 

 

조정래 / ‘아리랑 7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