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 / ‘아리랑 6권’ 중에서
< 1 >
대종교단은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대종교는 총본사가 동만주에 있었지만 국내에서 종교활동을 하려면 그 법령을 피할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이미 만주 일대에서는 대종교가 일본의 노골적인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중국관헌들을 앞세워 북간도 화룡현의 무관학교를 없애려고 시도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서간도 환인현에서는 동창학교를 끝내 폐교시키고 대종교 관계자들을 강제로 추방하게 뒷조작을 했던 것이다.
그런 총독부가 인가를 내줄 리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국내 포교를 포기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한양의 남도 본사에서는 해결책을 긴급히 세워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 일을 해결하려고 교주 나철은 두만강을 건넜다.
남도 본사에 도착한 나철은 일단 서류를 내기로 결정하고 12월 21일에 신청서를 총독부에 제출했다. 그러나 총독부에서는 서류를 각하하고 말았다. 신교(神敎)가 아니라는 것이 이유였다. 그런데 평소에 유사종교로 취급받던 단체들의 서류는 모두 접수되었고, 각하를 당한 것은 오로지 대종교뿐이었다. 그 즉시 포교 금지령이 내려진 것은 더 말할 것 없었다.
한배님(단군)의 뜻을 받들어 민족정기를 되살리고, 그 정기를 한덩어리로 뭉친 큰 힘으로 조국의 광복을 이룩하고자 했던 대종교는 정작 국내 활동을 중단당하게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만주·중국 관내·노령 지역에 걸쳐서 30만을 헤아리는 교도들을 더욱 배가시키는 것만이 그 시련을 극복하는 것이라는 결의에 따라 전면적으로 조직활동이 강화되었던 것이다.
민족종교 대종교의 수난은 동포들에게 강한 호소력을 가지고 펴져나갔다. 동포들의 호응으로 조직의 활성화가 새롭게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주농민들이 부쩍 많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대종교에서는 온 힘을 다해 그 사람들을 맞아드리기 시작했다.
송수익은 무관학교에서 학생들에게 훈련을 가르치며 날을 보내고 있었다. 환인현에서 무송으로 옮겨오면서 설립된 독립군 무관학교였다. 그 운영은 동포들의 경제신장과 무장독립투쟁을 목적으로 조직된 흥업단에서 맡았고, 교육훈련은 독립군 부대에서 시키고 있었다. 그 독립군 부대는 홍범도와 함께 의병투쟁을 했던 차도선같은 지난날의 의병장들이 이끌고 있었다.
보름쯤 지났을까. 무송에 뜻밖의 비보가 날아들었다. 대종교 교주 나철의 자결 소식이었다. 사람들은 그 소식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철의 유서 앞에서 그들은 말을 잃었다.
나철은 유서 '순명삼조(殉命三條)를 통해 자신이 왜 목숨을 바치는지를 밝히고 있었다. 첫째 배달민족의 번성이 걸린 대교를 위해 죽는 것이며, 둘째 한배님의 은혜를 갚지 못한 죄로 한배님을 위해 죽는 것이며, 셋째 온 천하의 동포 형제자매가 암흑세상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대신 죽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계기로 하여 대종교가 더욱 번창하고, 그 힘으로 일본을 물리쳐 배달민족이 광명을 되찾기를 소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철은 대종교의 불법화에 대해 죽음으로써 항거하는 동시에 모든 대종교도들이 위축되지 말고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하고 교세를 더욱 확장시킬 것을 소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철의 죽음은 곧 순교이면서 순국이었다.
나철은 구월산 삼성사에서 목숨을 끊었다. 그곳은 단군이 승천한 곳이었다. 민족종교로서 만주땅에 가장 큰 교세를 일으켜놓은 전남 벌교 사람 나철은 창교 8년 만에 한을 품은 채 저세상으로 떠나간 것이었다.
< 2 >
향약은 대개 이렇게 시작되었다.
남녀는 길에서 서로 내외해야 하며, 특히 남자는 부녀자들을 희롱해서는 안 된다. 과객에게는 성의껏 밥과 잠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하며, 걸인을 천시하거나 괄시해서는 안 된다. 대소 경조사에는 품삯 없이 정성으로 도와야 하며, 주인은 그 고마움을 두고두고 갚아야 한다. 어떤 연장이나 농기구든 빌려주는 데 인색해서는 안 되며, 빌려가는 사람은 그 물건들을 귀히 쓰되 손상을 시켰을 때는 즉시 변상하고 사과해야 한다. 이웃집에 불이 나면 모두 함께 나서서 불을 꺼야 하고, 양식을 갹출할 뿐만 아니라 복구에 정성을 모아야 한다. 옆집 굴뚝에 사흘 가까이 연기가 나지 않는 것을 모르고 지내서는 안 된다.
이런 내용들인 향약을 어겼을 때는 동회가 열려 처벌이 내려졌다. 동네 고랑치기에서부터 태형까지 처벌은 엄했다. 동회의 결정은 동네에서 제일 덕이 높은 연장자가 장이 되어 여러 유지들과 합의했다. 그린데 동회에서 내리는 가장 큰 벌이 바로 출향이었다. 마을에서 내몰리는 그 별은 죽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벌을 받은 사람은 소문 때문에 인근 100리 안에서는 살 수가 없으니까 아무 연고도 없는 수백 리 밖으로 떠나야 했던 것이다. 어느 동네에서나 출향 당한 자는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고, 물론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간통이나 근친상간을 저지른 자, 주색잡기가 고질이 된 자, 성품이 나빠 고자질 이간질로 계속 분란을 일으키는 자, 혼자 이익을 위해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거나 동네를 욕되게 한 자들이 대개 내몰림을 당하는 것이었다.
< 3 >
“야아, 동상 찾고 웬수도 갚아야제라” 득보의 다부진 대답이었다.
"잘되았다, 나허고 가자." 공허가 득보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중 노릇 허라고라?" 득보가 화들짝 놀라며 뒤로 주춤 물러섰다.
"놀래덜 말어. 여동상 찾어야 허는디 산속에 처박어 중얼 맨들어야 쓰것냐. 동상도 찾고 부모님 웬수도 갚을 일이 많은게, 가자"
공허는 득보를 깊은 눈길로 바라보았다. 총기 서린 득보의 눈이 함께 갈 뜻을 나타내고 있었다.
들마을에 파아란 저녁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먼 실연기들은 노올빛이 밴 하늘로 아른아른 사라지고 있었다. 득보는 언제나 저녁연기를 보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 파란 연기가 피어오르는 마을의 저녁풍경에서는 자신을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들리는 것이었다. 멍멍이 짖는 소리도 들리고, 여동생이 팔짝팔짝 뛰는 모습도 보이고, 아버지가 지게 지고 들녘에서 돌아오는 모습도 보였다. 그 어느 것도 눈물 아닌 것이 없었다. 득보는 어스름에 잠겨가는 들마을을 바라보고 걸으며 변함없이 사무쳐오는 그리움 속에서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의 이야기를 해나갔다 공허는 묵묵히 걷고만 있었다.
< 4 >
동포여 일어나라 독립을 찾자
기회가 왔다 강토를 탈환하자
외치자 대한독립 되찾자 조국강토
그런 전단을 누가 만들고 누가 뿌리는지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전단만 뿌려지는 것이 아니었다. 어느 때는 벽보가 나붙기도 했다. 사람들은 내놓고 이야기하지는 못했지만 그런 일들은 청년학생이나 학식자들이 한다는 것을 다 알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독립운동가들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일반사람들 사이에서는 독립운동가보다 훨씬 가깝고 한결 친근하게 느껴지는 ‘만세꾼’이란 말이 은밀하게 퍼지고 있었다. 어느 날 밤에 돌팔매질로 주재소나 면사무소의 유리창들이 박살이 났다. 또 어느 날 밤에는 전홧줄이 수십 발씩 절단되어 버리기도 했다. 일본농부들 집 앞에 똥이 질펀하게 부어지기도 했고, 마당에 불붙은 짚단들이 떨어지기도 했다. 그런 일들을 바로 만세꾼
들이 하는 것이라고 했다.
만세꾼들이 하는 일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삼베보자기에 보리밥 덩이를 싸가지고 장터를 찾아다니며 시위에 앞장서고, 수십 명씩 떼를 지어 이 마을 저 마을을 돌며 사람들을 시위에 나서게도 했다. 그런가 하면 달이 밝은 밤마다 이 산 저 산에서 독립만세나 구호들을 불러대는 산호(山呼)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만세꾼들이 하는 가장 신바람 나는 일은 봉화올리기였다. 캄캄한 밤에 봉화는 이 산 저 산에서 너홀너홀 타올랐다. 그 큰 불길 둘레로는 작은 횃불들이 수십 개씩 겅중겅중 춤을 추고, 함성소리들이 먼 메아리처럼 아득하게 울렸다. 농부들은 그 불길들을 보고 함성소리를 들으며 가슴이 두근거리고 감정이 들뜨며 집을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에 휘말렸다. 그리고 그들은 생생하게 떠오르는 지난날의 기억들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봉화와 횃불과 산호..... 그것들은 갑오년 농민군들이 올렸던 기세였고, 10여 년 전에 의병들이 올린 기세였던 것이다.
"그려, 만세꾼덜언 예삿사람덜이 아니여. 요것조것 허는 일덜얼 보면 그간에 짚이짚이 숨었든 동학군이고 의병덜이 새로 박차고 나슨 것이여."
“나도 첨에넌 그 소문이 긴가민가혔는디 갈수록 봉게 그 사람덜이 틀림이 없구마. 근디, 그 사람덜언 참 찔기기도 찔기구마.”
"하면, 맘덜이 강단진 디다가 한이 맺힌 사람덜잉게."
"참말로 용혀, 왜놈덜이 그리도 지독시리 잡아내서 씨럴 몰릴라고 혔는디도 어디서 그리 잘덜 피해 살었능고."
< 5 >
‘자아, 들어보시오. 신채호 선생은 성균관 학사가 되실 정도로 철저한 유학자셨소. 헌데 열강의 세력들이 우리나라에 뻗치면서 국운이 쇠퇴해 가자 그분은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소.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유학으로 안 된다는 걸 깨달으신 것이오. 그래 그분은 애국계몽운동에 가담하면서 신문에 논설을 쓰는 논객으로 변모한 것이오. 그리고 을사조약으로 일본에 나라를 뺏길 것이 확실해지자 백성들을 일깨우고 힘을 주기 위해 을지문덕이며 이충무공의 전기를 짓기도 했소. 그러다가 왜놈들의 마수를 피해 독립운동을 펼치려고 만주로 망명했소, 만주에서 그분은 대종교도가 되셨소. 대종교는 조국의 독립 실현을 목표로 삼는 단군신앙이었기 때문이오. 그리고 상해임정의 설립을 놓고 보황주의냐 공화주의냐로 국체논쟁이 치열하게 벌어졌을 때 공화주의를 가장 열렬하게 조장한 사람이 누군지 알지요? 바로 신채호 선생이시오. 보황주의자들은 수만 많았지 논쟁에서 신채호 선생을 이길 수 없으니까 어제했소? 젊은이들을 시켜 감금까지 시켜가며 국체를 보황주의로 결정하려고 했소. 그러나 신채호 선생은 끝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소. 신채호 선생 같은 분이 아니었더라면 임정은 국체를 공화주의로 내세우기가 어려웠을 것이오. 한마디로 말하자면 신채호 선생은 나라의 독립을 절대적인 목표로 세워놓고 일거일동을 그 수단으로 총동원하시는 거요. 이동휘 선생도 신채호 선생과 마찬가지라 생각하오."
“그럼 신채호 선생도 필요하면 공산주의자가 될 수 있다는 겁니까?” 누군가가 불쑥 물었다.
“글쎄요, 그것까지야 내가 뭐라고 단언할 수 있겠소? 그건 숙제로 남겨놓고 우리 모두가 지켜보도록 합시다.” 김명훈이 씨익 웃었다.
“근디, 공화주의허고 공산주의허고넌 안 맞는디 어찌 이동위 선생이 임정 국무총리럴 허시는지."
"아, 그거 좋은 질문이오."
이광민은 의문 많은 생도 같은 표정이었고, 김명훈은 성실한 선생 같았다.
김명훈은 손바가지로 개울물을 떠서 한 모금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그 문제도 복잡하고 어렵게 생각할 게 없소, 아까 말한 것과 똑같이 이해하면 되는 거요. 상해임정이야말로 최대 목표가 뭐겠소? 대한민국의 독립 아니겠소? 그 목표를 성취시키기 위해서 상해임정은 국체를 공화주의로 내세운 속에 복벽주의자, 공화주의자, 공산주의자들이 연합을 이루고 있는 것이오. 그 연합은 아주 중요한 문제고, 소중한 결실인 것이오. 그런데 그렇게 주의 주장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정부를 이룬 것은, 내가 알기로는 이 세상에 하나도 없소. 임정 요인들은 독립을 달성시켜야 하는 우리의 특수 상황을 이해해서 서로가 양보하고 인내해 가며 세계에서 유일한 성격의 정부를 탄생시킨 것이오. 그 불가능한 일을 해내자니 오랜 논쟁을 거친 것은 당연한 일이오. 그런데 총독부의 왜놈들은 그 건설적인 논쟁을 조선놈들의 고질적인 파당싸움이니, 지방색을 드러낸 파벌싸움이니 했던 것이오. 그건 임정이 설립되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했던 왜놈들이 고의적이고 악질적으로 임정을 모함하고 헐뜯으려고 지껄여대는 악담이었소. 그리고 왜놈들한테는 군국주의 하나밖에 없으니까 그저 명령과 복종이 있을 뿐이고 논쟁이나 토론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야만인들이오. 다시 말해 임정의 연합은 독립운동 방책의 시범이고 모범을 보인 것이라는 점을 여러분들은 잘 이해해야 할 것이오. 다들 그렇게 이해가 됩니까?"
“예, 인자 알것구만요.”
< 6 >
독립군들을 뒤쫓다 놓쳐버린 일본군들은 조선농민들 토벌을 더 확대해 나가고 있었다. 북간도 일대를 휩쓸고 있는 토벌은 11월을 넘겨 12월로 이어지고 있었다. 일본군의 간도출병으로 시작된 학살은 벌써 넉 달째 계속되고 있었다.
날마다 이곳저곳에서 요란한 총소리들이 진동하고, 마을이 불타는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흰옷 입은 시체들이 언덕바지며 산비탈이며 개울가에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 삭풍이 몰아치는 만주의 하늘은 언제나 음산한 구름이 끼여 있었다. 그 우중충한 하늘만큼 음산한 울음을 뿌리며 까마귀들이 수백마리씩 떼를 지어 여기저기로 날아다녔다. 너무 많은 시체들을 치울 사람도 없었고, 까마귀떼를 막아낼 사람도 없었다.
"우리는 이번 토벌작전에서 불령선인들의 은거지와 동조 지역을 집중공략한 결과 학교· 시교당· 예배당 등을 포함하여 도합 3천여 채 이상 소각했고, 그 협조자와 동조자들을 1만여 명 처단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는 불령선인들이 다시는 준동하지 못하게 하는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이번 작전에 앞장서 수고한 여러분들의 공을 치하하는 바이다."
작전참모장이 만족스럽게 장내를 둘러보았다.
1920년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독립군들이 밀산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풍문과 함께 사람들은 그 대학살을 경신참변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조정래 / ‘아리랑 6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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