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 소설

조정래 / ‘아리랑 3권’ 중에서

송담(松潭) 2021. 4. 28. 21:09

조정래 / ‘아리랑 3권’ 중에서

 

< 1 >

 

 

“아니, 지지리 가난한 조센징이 그런 호조건에도 말을 안 듣는단 말이오?" 하시모토의 눈째가 고약해졌다.

“예 죽어도 딸을 첩으로 내놓지 않겠다고 에미가 고집을 부린답니다.”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요. 가난한 조선사람들은 딸을 부잣집에 첩으로 넘기는 건 예사로 하는 일 아니오. 그런데 쌀 50가마니 돈이 싫다니, 내가 일본사람이라 그러는 것 아니오?"

.......

 

"나한테 한 가지 좋은 생각이 있긴 있소, 다른 게 아니고 마음에 있는 여자를 밤중에 몰래 자루에 넣어 업어오는 조선풍습이 있잖소. 그 방법을 쓰면 어떻겠소. 하룻밤 자버리면 꼼짝없이 내 여자가 되는 것이고, 돈이야 그 다음에 전하면 되잖소."

 

"아이고, 그건 큰일납니다. 그 방법이야 과부한테 쓰는 거지 처녀한테 쓰는 게 아닙니다. 그건 곤란합니다."

눈이 휘둥그레진 백종두는 고개를 마구 내저었다.

"아니, 뭐가 그리 큰일난다는 거요? 과부나 처녀나 다 똑같은 여잔데."

“아니지요, 아니지요. 과부하고 처녀는 천양지차지요. 과부야 헌 계집이고, 처녀야 깨끗한 몸 아닌가요. 만약 처녀를 그랬다가는 온 마을사람들이, 아니 우리 면민들 전부가 들고일어날 겁니다. 조선 사람들은 처녀 순결을 목숨처럼 귀히 여기니까요. 하시모토 상은 앞으로 우리 면에다가 대농장을 꾸밀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 일이 지금 착착 진행되고 있는데 괜히 그런 일로 인심을 잃어보세요. 그 일이 잘되겠습니까?”

 

하시모토는 면사무소를 나오며 또 그 처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 곱고 매혹적이던 모습이 곧 잡힐 것처럼 눈앞에 선하게 떠올랐다. 갖기가 어려우니까 더욱 갖고 싶은 욕심이 발동하고 있었다. 그 처녀는 그냥 예쁜 꽃만이 아니었다. 예쁘면 야하기가 쉽고, 고우면 되바라지기가 쉬웠다. 그런데 그 처녀는 그런 속기가 전혀 없었다. 화사한 듯하면서도 단아했고, 선정적인 듯하면서도 다소곳했고, 맑은 듯하면서도 슬픈 기가 서려 있었다.

 

석양 햇빛을 받고 있는 그 처녀를 보는 순간 가슴에서 일어난 회오리 바람은 걷잡을 수가 없었다. 인물 잘생긴 여자를 한두 번 본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처럼 일순간에 마음이 뒤흔들린 일은 없었다. 며칠 동안 마음에서 지우려고 애를 써보았다. 짐승과 다를 바 없는 하잘것없는 조센징이라고, 마늘냄새 고추장냄새 지독하게 몸에 밴 조센징이라고 자신을 타이르고 일깨웠다. 그러나 갖고 싶은 욕망은 조금도 묽어지지 않았다.

 

결국 그 욕망에 밀려 아내에게 더 준비가 필요하니 기다리라는 거짓편지를 띄우게 되었다. 그리고 처녀집에 사람을 보내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손쉽게 갖게 될 줄 알았었다. 그런데 갈수록 애만 태우게 만들었다. 자꾸 액수가 올라가는 것도 아까웠지만 부질없이 날짜만 까먹는 것은 더욱 아까웠다. 아내가 건너오기 전에 실컷 재미를 보려고 했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한번 마음먹은 일을 이루지 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남들보다 먼저 러시아로 갔던 것도, 거기서 사업을 확장시키면서 정보원으로 성공했던 것도, 부잣집 딸을 마누라로 삶은 것도 뜻대로 다 된 일이었다. 그런데 조센징 계집애 하나가 속을 썩이고 있었다.

“두고 봐라, 내가 누군데!”

눈꼬리에 독이 오른 하시모토는 침을 내뱉으며 걸음을 빨리했다.

 

 

< 2 >

 

 

넓고 넓은 들녘에 어둠살이 내리고 있었다. 어둠살은 연한 보랏빛이었다. 어둠살에 잠기고 있는 아슴한 들녘에는 그 넓이만큼의 고요가 가득했다. 띄엄띄엄 자리한 들마을들도 안개발 같은 어둠살에 물들고 있었다. 초가들은 고요 속에 서로 이마를 맞대고 저녁연기를 피워올리고 있었다. 푸르스름한 연기들은 그 연한 자태를 오래 간직하지 못하고 스러지고 있었다. 개 짖는 소리가 가끔 멀리로 들리고는 했다.

 

공허는 흥얼거리는 가락으로 독경을 하며 걷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저녁연기 피어오르고 있는 들마을로 가 있었다. 그는 그 아늑하기 그지없는 들마을에서 아이를 부르는 여자의 긴 목소리가 정겹게 들려오는 것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환청이었다. 아니 그의 마음속에 아로새겨져 있는 먼 기억의 소리였다.

 

그는 어느 곳에서나 저녁연기 피어오르는 마을을 볼 때마다 어린 자기를 부르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저 멀리서 아슴푸레하게 들려와 가슴 저리게 했고, 토장국 맛있게 끓이던 어머니의 따스한 온기가 사무쳐와 눈물겹고는 했다. 먹물옷을 입고서도 옛 기억을 떼칠 수가 없었고, 그럴수록 먹물옷을 입지 않을 수 없었던 신세가 한스럽기만 했다.

 

솔가지나무를 한 짐 해가지고 돌아왔는데 집이 불타고 있었다. 울며불며 어머니를 찾았지만 아무데도 없었다. 두 동생도 보이지 않았다. 불이 다 꺼지고 나서야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두 동생이 집과 함께 타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아니, 왜병들의 칼에 찔려죽은 다음 집과 함께 불태워진 것이었다. 마을사람들은 뼈들을 추려내 묘를 쓰게 하고는 서둘러 등을 떼밀었다. 어서 마을을 떠나라는 것이었다. 네가 살아 있는 것을 알면 왜놈들이 또 죽일 거라고 했다.

 

동학군으로 나갔던 아버지가 몸을 다쳐 돌아와 집 뒤 토굴 속에서 숨어 있었던 것을 까맣게 몰랐던 것이다. 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나이 여덟 살이었다. 몇 달을 굶주리며 떠돌았다. 이틀을 꼬박 굶고 어느 개울가에서 쓰러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옆에 중이 하나 앉아 있었다. 중이 말없이 내민 것은 주먹밥 한 덩이였다. 정신없이 주먹밥을 먹고 나자 중이 말했다. 갈 데가 없으면 함께 가자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 3 >

 

 

"머시라고라, 배 총각? 그 사람헌티 시집가느니 평상 혼자 살겄소.' 필녀는 소스라치며 펄쩍 뛰었다.

“저, 저, 가시네가 부끄럼도 몰르고, 시님 앞이서 선머심애맨치로 그것이 무신 버리장머리여!"

미안쩍은 마음에 손씨는 딸에게 호통을 쳤다.

"그래, 시악시넌 배 총각이 어찌서 그리 싫소?" 공허는 정겨운 소리로 물었다.

 

"저어··· 시님언 그 인물이 인물로 뵈시는게라? 그 두꺼운 입술허고, 툭툭 불거진 광대뼈허고, 못나도 어찌 그리 징허게 못날 수가 있당게라." 필녀는 울상이 되어 몸을 내둘렀다.

"요것이 그냥 뚫린 입이라고 못히는 소리가 없네. 니넌 잘난 것이 머시가 있냐 남자가 그만허먼 됐제." 손씨가 무지르고 들었다.

"음마, 아부지 눈도 요상허시요 이. 송 대장님 인물에 비허먼 그것이야 어디 사람얼굴이간디라?" 아버지의 기세에 맞선 필녀의 다부진 말이었다.

“아니, 이년이 참말로 못허는 소리가 없네, 니 어디라고 그 양반얼”

공허도 속으로는 놀라고 있었다. 처녀가 송수익 같은 인물을 마음에 품고 있다면 배두성이가 눈에 차지 않을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공허는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처녀가 송수익을 좋아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만한 생김을 원하는 것인지 알수 없었던 것이다.

 

"송 대장님언 저그 먼 만주땅에 기시는디, 거그꺼정 가볼 맘이 있소?“ 공허의 말에 놀란 손씨가 고개를 후딱 돌렸다

“야아, 어디 기신지 알먼 가제라."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는 필녀는 아버지의 눈초리도 모른 채 가느다란 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이, 그러면 아조 잘되았소 배 총각허고 혼인허먼 거그 갈 수 있소. 송 대장님이 배 총각 오기럴 기둘리고 기신게." 공허는 마지막 숭부수를 던졌다.

"음마, 송 대장님이 그 사람얼 기둘려라? 그 사람이 그리 중허당가요?" 고개를 반짝 드는 필녀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 눈에 놀라움이 담겨 있었다.

 

"그러요. 배 총각이 워낙에 심지가 굳고 맘이 선헌 디다가 몸실허고 용맹이 큰께 송 대장님이 그전보돔 귀허고 중허게 생각허셨소, 나도 또 배 총각얼 믿고 애끼고 있소, 사람이야 다시 없소." 공허는 중매쟁이 노릇을 하느라고 자신도 모르게 배두성이를 그저 좋게만 말하고 있었다. 고집이 세다거나 술버롯이 좀 고약하다거나 하는 것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글먼 거그넌 언제 가는디요?" 필녀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언제라고 딱 못박을 수년 없어도 그리 오래 안 걸릴 것이오. 송대장님이 우리가 어서 오기럴 기둘리고 기시고, 우리도 얼령 갈라고 애쓰고 있응게."

필녀는 무슨 생각을 하는 얼굴로 고개를 보일 듯 말 듯 끄덕이고 있었다.

"어찌 혼인얼 허겄소?" 공허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고삐를 잡아채는 기분으로 물었다.

필녀는 고개를 수그리며 가느다랗게 대답했다.“야아.....”

 

"호인허기로 맘묵었으면 메칠 안으로 날 잡아 해치우는 것이 안좋것능가요. 그 총각도 숨어사는 몸으로 지닌 것이야 몸띵이뿐일 것이고, 우리도 사는 꼴이 이러니 머시가 있간디요. 양쪽 다 날만 보내봤자 생길 것도 붙일 것도 없는 처진께 옷이나 깨끔허니 뽈아 입고 찬물 정히 떠놓고 혼례식 올리면 안 되겄는게라. 시님이 축원만 지성으로 해주시먼야 그보담 더 존 일이 어디 있간디요. 허고, 아까 들은게 배 총각이 만주땅으로 가는갑는디, 그리되면 즈그덜 움막 새로 안 지어도 된게 우리 집서 살다가 뜨먼 되느만요." 공허는 손씨의 폭넓은 생각에 동의할 뿐만 아니라 고마움까지 느꼈다.

 

"어허, 생붕알만 차고도 장개갈 질이 티이네 이. 참 잘되았구만." 천수동이가 반색을 했고, "저 인물에 어디 여자복이 들었능고, 저 인물에 필녀럴 각시 삼는 것언 선녀 차지허는 택이여"

강기주가 배두성의 속을 긁고 들었다.

 

"강샌, 배아프제라? 나가 인물언 못났어도 그 기운이 바우럴 뚫어불게 씨다는 것얼 필녀가 딱 알아봐분 것이요. 필녀가 남자 보는 눈이 있당게라 허고 강샌, 나가 생붕알만 차고 있는지 아시요? 비단옷언 못해줘도 광목 치마저고리에 백통비녀 히줄 돈언 있소,"

배두성이는 광대뼈 불거지고 입술 두꺼운 얼굴을 연상 벙글거리며 상대방들의 말을 척척 받아넘겼다.

"자네가 무신 돈이 있다는 것이여?" 강기주가 못 믿겠다는 얼굴이었다.

"안 믿기면 믿지 마씨요. 남자가 이 험헌 시상 살아갈라면 한두 놈 떡칠 기운이 있어야 허고, 급작시리 무신 일 당혀도 닷새 묵을 돈이야 지니고 있어야 허능 것 아니당게라?"

배두성이는 강기주를 약을 올리듯 놀리듯 하고 있었다.

"아이고메 저 사람, 겉 달르고 속 달르시. 쑹허기가 꼭 곰 아니라고.“

.

두 집 아이들이 잔칫날이 온다고 어른들에 앞서 좋아서 신바람을 냈던 것이다. 신부집에 혼인 날짜를 통고하면서 공허는 있는 돈을 다 털어내 배두성의 돈에다가 보태 신부집에 보냈다. 함 대신이었다. 천수동과 강기주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천수동네는 술을 담그고 신랑의 버선을 짓고, 강기주네는 떡을 하고 신랑의 토시를 만들기로 했다.

 

배두성이는 혼인 날짜가 잡힌 날부터 도끼를 들고 정신없이 나무를 쳐댔다. 그리고 사방에다 덫을 놓고 다녔다. 혼인하기 전에 장작짐을 져내려 옷이라도 한 벌 더 해주겠다는 것이었고, 토끼를 서너 마리 잡아 잔칫날 쓸 작정이라고 했다. 배두성이의 그 억척스러움에 모두는 놀라고 감탄했다. 공허는 필녀에게 그리도 마음쓰는 배두성이의 열성이 가슴 시큰해 함께 나무를 쳐넘겼다. 이틀 동안 나무를 쳐넘긴 배두성이는 다음날 밤늦도록까지 도끼질을 해댔다. 절생활에서 도끼질은 이골이 난 공허도 손을 놓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쌓인 장작더미가 대여섯 짐도 넘어 보였다.

 

상작은 네 짐으로 나누고도 두 짐이 넘게 남았다. 배두성이는 남은 장작을 반으로 갈라 천수동이네와 강기주네 부엌에다 날라다 주었다. 네 짐으로 묶인 나뭇짐을 공허까지 나서서 지고 네 사람은 산골의 새벽안개를 헤치며 아랫세상으로 내려갔다.

 

혼인식 전날 신부집에서 신랑의 무명 바지저고리와 두루마기를 지어서 보내왔다. 배두성이는 그 뜻하지 않은 예물을 받고 마치 어린애처럼 눈물을 뚝뚝 흘려서 사람들의 마음을 찡하게 하는 한편으로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혼례식은 손씨가 말한 것처럼 입던 옷 빨아입고 찬물을 떠놓고 올리는 눈물나는 것이 아니었다. 신랑 신부가 호화로운 예복은 입지 못했을망정 말끔하게 새옷을 차려입었고, 혼례상에도 청실 홍실까지 갖출 것은 거의 갖추어져 있었다. 가난한 살림 속에서도 딸가진 부모답게 손씨네가 여러 해에 걸쳐서 준비를 해온 덕이었다.

 

공허는 예식에 따라 혼례식을 진행시킨 다음 목탁 없는 독경으로 두 사람의 백년가약을 축원했다. 공허는 지성으로 독경을 하면서 마음 뿌듯한 보람을 느끼는 동시에 어느 때 없이 허전함이 밀려드는 것도 느꼈다. 이상하게도 자신은 혼자라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사무쳤던 것이다.

 

공허는 술이 거나하게 취해 천수동과 강기주네 가족들과 산등성이를 넘고 있었다. 뒤처져 걷던 공허는 산등성이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맑은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올려다보았다. 바쁘게 보낸 며칠이 그렇게 보람스러울 수가 없었다. 세월은 험해도 사람은 이렇게 가지 치며 살아내는 것이라 싶었다.

 

 

< 4 >

 

 

박건식은 마당으로 나서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서늘한 기운이 섬뜩하게 옷 속을 파고들었다.

 

"아이고메, 가을이 요리 영글었능가"

 

박건식은 팔짱을 끼고 몸을 웅숭그리며 사립을 나섰다 어둠 어디에선가 가을벌레소리가 가녀리고 투명하게 들리고 있었다. 그 사무치는 흐느낌 같은 애잔한 소리에 박건식은 불현듯 마음까지 추워지는 것을 느꼈다.

 

가을벌레가 밤 깊은 줄 모르고 울어대면 찬바람을 타고 기러기떼가 날아오고, 기러기떼가 끼륵끼륵 울어대며 하늘가를 줄지어 날면 울긋불긋 단풍 든 나무들은 잎들을 떨구기 시작하면서 겨울이 닥쳐왔다. 그 절기 변화를 따라 벼를 베고 타작을 하고 볏단을 쌓는 가을걷이가 이루어졌다. 나락섬을 차곡차곡 쌓다 보면 가을걷이의 힘겨움도 몰랐고, 미처 갈아입지 못한 삼베옷을 파고드는 추위를 느낄 겨를도 없었다.

 

그러나 그런 가을은 떠나고 없었다. 논을 빼앗기게 되면서 마음은 가을걷이를 하기 전부터 벌써 추위를 느끼기 시작했다. 애써서 가을걷이를 해보았자 수확의 절반은 빼앗기고 말았다. 절기보다 먼저 겨울이 마음에서 시작된 것이 벌써 몇 년째였다.

 

 

< 5 >

 

 

손가락들의 기민한 움직임 속에서 돌은 돌대로, 싸라기는 싸라기대로, 피는 피대로 골라지고 있었다. 열 손가락은 제각기 지네발처럼 빠르게 움직이면서 정확하게 그런 것들을 쌀알과 구분해 내고 있었다. 잡물들과 분리된 토실토실한 쌀알들은 손바닥 끝부분에 밀려 유리판 아래 받쳐놓은 함지박으로 쉴새없이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부슨 기계처럼 재빠르고 빈틈없이 움직이고 있는 여자들의 마디 굵은 손가락에는 쌀겨가 희게 묻어나고 있었다. 여자들은 웅크리고 않은 채 그 일을 반복하고 있어서 일핏 보면 아무 일도 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잘“못혔구만이라, 지가 잘못혔구만이라”

여자는 질질 끌려가면서 실성한 듯 똑같은 소리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두 십장은 여자를 문밖으로 끌고 나갔다. 여자들 사이에서는 그때서야 긴 한숨소리가 흘러나오고, 코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수국이도 소리 없이 울며 자꾸만 흘러내리는 코를 들이마시고 있었다. 자기가 벌지 않으면 아버지 없는 아이들이 굶어죽게 된다는 그 여자의 애원이 귀에 쟁쟁히 울리고 있었던 것이다.

 

과부인 그 여자가 예쁘게만 생겼더라도 쫓겨나는 것은 면했으리라고 수국이는 생각했다. 그런 생각은 수국이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모든 여자들이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만큼 감독은 예쁜 여자들을 밝혔고, 얼굴이 좀 반반하게 생긴 여자들이 저지르는 잘못은 어물쩍 넘겨주었다.

그런데 그들이 제일 엄하게 금하고 감시하는 것이 한 가지 있었다. 쌀을 한 톨이라도 입에 넣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어겼다 하면 인정사정없이 불벼락이 떨어졌다. 알곡이건 싸라기건 가리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쌀을 입에 넣었다가 들켜 십장들에게 그리 험하게 두들겨맞고 쫓겨나는 것을 보면서도 사홀이 멀다 하고 그런 사람들은 또 생겨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수국이는 어느 순간 문득 사람이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했다. 자신도 어느 때 불현듯 쌀을 한입 가득 넣고 와득와득 씹고 싶은 충동에 휘말리는 것이었다. 그런 때는 대개 점심때가 한참 지나 속이 쓰릴만큼 배가 고플 때였다. 쌀을 먹고 싶은 생각이 불현듯 일어나면 어금니 사이에서는 신 침이 스물스물 나오면서 정신이 아릿거리기까지 했다. 쌀이 김 나는 밥으로 보이면서.

 

수국이로서는 하루종일 쪼그리고 앉아 쌀을 고르는 힘겨움보다, 배고픔에 시달리며 쌀을 입에 넣고 싶은 유혹을 이겨내는 것보다. 더 견뎌내기 어렵고 괴로운 일이 따로 있었다. 그건 날마다 받아야 하는 몸조사였다.

 

몸조사는 그 누구도 피할 수가 없었다. 자기가 아무리 쌀을 훔치지 않았다 하더라도 십장이나 감독은 그것을 믿지 않았다. 그 결백은 몸조사를 받고 나서야 인정될 뿐이었다. 몸조사는 매일 일을 끝내고 미선소를 나가면서 받게 되어 있었다. 여자들은 번호 순서대로 감독의 칸막이방을 거쳐서야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몸조사는 감독 혼자서 도맡아했다. 몸조사란 여자들이 쌀을 훔쳐 옷 속에 감춰가지고 간다고 해서 하는 것이었다. 옷 속에 작은 주머니를 달아 쌀을 훔쳐내는 여자들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그 주머니를 찾아낸다는 명목으로 감독은 제 마음대로 여자들의 온몸을 더듬어댔다.

 

"허, 쌈빡허시!"

 

첫날 칸막이방으로 들어서자마자 감독이 눈을 빛내며 불쑥 한 말이었다 그 순간 두근거리고 있던 수국이의 가슴은 딱 얼어붙었다. 묘한 눈빛으로 수국이를 바라보는 감독의 입가에는 비릿한 웃음이 어려 있었다. 수국이는 그 눈빛과 웃음이 무서워 고개를 숙였다.

“어디 보드라고”

감독의 손이 양쪽 겨드랑이를 더듬는가 싶더니 이내 젖가슴을 덮쳐왔다. 수국이는 눈을 질끈 감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전신에 찬 기운이 찌르르 퍼지며 소름이 쭉 끼쳤다. 온몸이 굳어지고 오그라들고 있었다.

젖가슴을 떠난 감독의 손은 허리를 더듬어내려 아랫배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 손이 치마 속으로 불쑥 들어왔다. 수국이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감독의 손은 속곳의 앞뒤를 더듬어대고 있었다. 치마 속에 입은 것이라고는 삼베 속곳 하나뿐이었다. 감독의 손길이 여기저기 닿을 때마다 수국이는 섬뜩섬뜩 놀라며 진저리를 치고 있었다. 옷이 다 벗겨져 알몸이 되는 것 같았고, 온몸이 뱀에게 친친 감기는 것 같았고, 지네가 스물스물 기어다니는 것 같았다. 그 창피스러움과 징그러움과 소름 끼치는 고통에 떨며 수국이는 두 다리를 꼭 붙이고 서 있었다. 넓게 트인 속곳 밑으로 그 손이 금방 들어올 것 같았던 것이다.

 

“쌈박헌 인물에 몸도 탱탱허시.”

감독이 짭짭 입맛을 다시며 손을 뗐다. 수국이는 정신없이 문을 박차고 나왔다. 감독이 금방 덮칠 것만 같았던 것이다.

 

밖으로 나온 수국이는 눈물을 훔쳤다. 눈물이 나오지 않게 하려고 애를 썼지만 눈물은 자꾸 삐질삐질 흘러나오고 있었다.

"을지 말어, 다 그리 사는 것잉게."

앞서 나와 있던 부안댁이 한숨을 내쉬며 수국이의 등을 다독거렸다.

“아줌니.....”

수국이는 일굴을 가리며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부안댁의 말을 듣자 참고 있었던 을음이 터져나왔다. 창피스러움과 분함과 서러움이 뒤법벅되어 복받쳐오르는 걷잡을 수 없는 울음이었다.

 

 

조정래 / ‘아리랑 제3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