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 / ‘아리랑 5권’ 중에서
< 1 >
7월의 무더위 속에서 들녘의 푸르름은 바닷빛으로 짙게 넘실거리고 있었다. 넓고 큰 날개를 느리게 펄럭이며 한가롭게 날고 있는 해오라기의 우아한 자태가 들녘의 푸르름 속에서 유난히 돋보이는 한 떨기 하얀 꽃이었다.
한가한 해오라기들과는 대조적으로 푸르름 속에서 바삐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푹푹 찌는 더위를 무릅써가며 논일을 하고 있는 농부들이었다. 절기에 맞춰 논일을 미룰 수 없는 농부들은 넓고 넓은 들녘에 수없이 많은 점으로 박혀 있었다. 그들은 불별을 온몸으로 받고 팥죽땀으로 온몸을 적시며 허리를 펼 짬도 없이 논일을 하고 있었다. 긴 다리로 겅중겅중 걷다가 우렁을 잡아먹고, 기다단 목을 세워 여기저기 살펴다가 큰 날개를 펼쳐 다른 논으로 유유하게 날아가고는 하는 해오라기들에 비하면 농부들의 신세는 너무 고달프고 힘겨운 것이었다.
< 2 >
해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 투명하고 청량한 빛살이 아침대기를 꿰뚫으며 곧게 뻗치고 있었다. 한낮과는 달리 안개 기운이 서린 아침대기 속에 빛살들은 그 곧은 모습을 수수억만 가닥의 부챗살처럼 선연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햇살이 퍼지기 시작하면서 아슴하게 넓은 안개바다에 금방 변화가 일어났다. 깊이 잠든 듯 잠잠하던 안개가 일렁이고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 일렁임과 꿈틀거림에 따라 수많은 안개발들이 풀어헤친 머릿결 모양을 하며 일어서고, 그 안개발들은 서로 뒤엉키고 휘감기고 몸부림하고 휘돌이하면서 연기처럼 자취를 감춰가고 있었다.
신세호는 또 그 신비스러운 변화에 경이감을 느끼며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밤이면 이슬이 내리면서 안개가 끼고, 아침에 해가 뜨면 안개가 건히는 것은 하나도 새로울 것이 없었다. 그리고 언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일 뿐이었다. 그러나 신세호는 그 범상속에 감추어진 자연의 오묘한 신비와 경이를 갈수록 새롭게 느끼고 있었다. 해의 그 무한한 생명력과 창조력을 새로운 깊이로 생각하게 되고, 만상의 생성과 소멸을 다시금 음미하게 되고, 삶의 소중함과 자연의 고마움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고..... 손수 농사를 짓게 되면서부터 눈과 마음이 더 깊고 넓게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
신세호는 언제나처럼 해를 향해 두 팔을 벌리며 가슴 가득 숨을 들이켰다. 그의 눈이 사르르 감기면서 얼굴에는 그윽한 미소가 잔잔하게 번지고 있었다. 그는 신선한 공기를 깊이 들이킬 때마다 형용할 수 없는 희열에 젖어들고 있었다. 맑고 싱그럽기 그지없는 아침공기가 전신 마디마디로 퍼져나가고, 그 아련한 기운이 새로운 활력으로 용솟음하는 상쾌한 만족감에 취하고 있었다. 그런 뿌듯한 기분은 농사를 짓기 전에는 맛보지 못한 것이었다. 농사짓기는 고달픔만큼 삶의 보람과 의미를 구체적으로 체득하게 해주었다.
< 3 >
폭넓은 강을 뒤덮은 빙판은 강줄기 따라 양쪽으로 끝없이 뻗어나가고 있었다. 물빛이 맑고 푸르기를 오리의 청록빛 머릿빛깔 같다고 하여 선사받은 이름 압록강. 저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하여 수많은 골짜기 골짜기들을 감돌고 휘돌며 2천 리가 넘는 긴긴 자태를 드리우며 대륙과 반도 사이를 무슨 운명인 것처럼 흐르고 있는 강, 대륙에서 홀러드는 크고 작은 물줄기와 반도땅에서 흘러드는 크고 작은 물줄기들을 다 거두어 받아들여 흘러내릴수록 커지는 몸피를 스스로 감당해 내며 수수만년 묵묵히 흐르고 있는 강. 몇 천 년에 걸친 대륙과 반도의 각축하는 역사 속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피가 낭자하게 흘러 그 몸을 더럽혀도 그저 담담하고 초연하게 그 피를 씻어내려 제 모습을 갖추어 흐르고 있는 강. 수없이 많은 험준한 산봉우리들을 호위병처럼 거느리고 온갖 종류의 무성한 나무들을 장식처럼 드리우고 장엄한 자태로 흐르고 있는 강.
겨울새벽의 적막은 한없이 깊기만 했다. 그 적막 속에서 길고 큰 강은 출렁거림을 멈추고 죽은 듯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몇만 년을 그렇게 잠이 들어 있는 것처럼 아득하고 막막했다. 이 땅의 사람들이 또다시 피흘리는 기구한 삶을 시작한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압록강은 깊은 적막 속에서 그보다 더 깊은 침묵의 잠을 자고 있었다.
공허는 끝없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망연히 바라보며 가슴 가득 슬픔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대로 주저앉아 얼음판을 치며 엉엉 목놓아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가슴 답답한 사연들을 하소연하고 싶었던 것이다.
< 4 >
짜아 시구시구 들어가는디이, 어얼 시구시구 들어간다아 저얼 시시구시구 들어간다아, 어절시구 들어간다아 저절시구 들어간다아, 푼파바푼파바 자리헌다아 푸부품파 자리헌다아, 어허어 작년에 왔든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 왔네, 어절 시구시구 들어간다아 저리절 시구시구 들어간다아, 일자나 한자나 들고나 봐아 일본놈에 시상 되어 10년 세월 다 돼가니, 이자나 한자나 들고나 보니 이 시상이 지옥살이 2천만이 통곡헌다, 삼자나 한자나 들고나 봐아 3천리라 금수강산 토지조사로 묶어놓고, 사자나 한자나 들고나 보니 4년이고 5년이고 땅뺏기에 혈안이라, 오자나 한자나 들고나 봐아, 오지겄다 왜놈덜아 그 맛이 꿀맛이겄다. 푼파바 푼파바 자리헌다아 푸부품파 자리헌다아, 어얼 시구시구 들어간다아 저얼 시구시구 들어간다아, 품바 품바 들어간다아, 육자나 한자나 들고나 봐아 육십 영감 분통터져 감나무에 목얼 매고, 칠자나 한자나 들고나 보니 칠십할멈 절통혀서 저수지에 뛰어드네, 팔자나 한자나 들고나 봐아 팔자에 없는 만주살이 떠나는 이 그 누군가, 구자나 한자나 들고나 보니 구만리 장천에 기러기도 슬피 우네, 십자나 한자나 들고나 보세 10년이야 넘겄느냐 왜놈덜아 두고 보자, 어허 품바 자리헌다.
방바닥을 토닥거리며 장단을 맞추던 회초리를 크게 끊어치며 늙은 거지는 장타령을 끝냈다.
'으쩌냐?"
타령을 할 때와는 다르게 허리가 구부정해진 늙은 거지는 흐릿하게 웃으며 가늘게 뜬 눈으로 득보를 올려다보았다.
"할아부지! 그것 허다가넌 잽혀가서 죽기 똑 좋겠구만이라."
득보는 겁도 나고 불만스럽기도 한 얼굴로 뿌루퉁해져 있었다.
"잉, 되았어 되았어. 니놈이 귓구녕얼 지대로 열어놓고 있었구만 그려." 늙은 거지는 좋아서 어깨를 들썩이며 키들키들 웃어대더니,
"그려, 목심이 천하라는디 장타령 한분으로 죽을 수야 있간디? 그려서 다 방비책얼 세와놓고 있덜 안컸냐. 자아, 어떤 장터서 사람덜도 좋아라 허고, 여그저그서 어얼싸 잘 넘어간다 험서 장단도 맞치고, 그 바람에 얼씨구나 신바람이 나서 타령이 날개럴 달고 날르는 판인디 저짝서 순사고 헌병놈이 온다 허먼 그때년 겁묵덜 말고 숨 한분 넉넉허니 쉬고 사설얼 바꾸는디, 춘삼월 호시절에 춘향이허고 이 도령이 광한루서 눈맞추고, 공양미 삼백 석에 심청이넌 몸얼 폴아 아부님께 효도허니, 요로크름 사리살짝 바꿀 것이 얼매든지 있는겨. 고것이야 이따가 시 놈이 밥 얻어갖고 오먼 어찌허는지 들어보먼 알제."
"할아부지, 그 사설언 할아부지가 지셨는게라?"
"하이고 요런 이쁜 자석아, 나가 고런 기맥힌 사설얼 질지 알먼 요런 꼬라지로 여그 앉었겠냐." 늙은 거지는 또 키들거리고 웃더니,
"그것언 딱 누구 한 사람이 진 것이 아니여, 이 사람, 저 사람, 수많은 사람덜 맘이 모타져 지어낸 것이제, 니 민심이란 말 아냐? 이, 똑똑타, 그 민심이란 것이 이리 궁굴고 저리 궁굴고 험서 한매디씩맨글어낸 거이다."
"글먼 왜놈덜이 다 없어지먼 새 장타령이 맨글어지는감요?"
“아이고, 아이고, 저, 저 영특헌 것이 딱 내 손지새끼시! 하먼, 새 장타령이 맨들어지고말고 고것이 민심이여.”
조정래 / ‘아리랑 5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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