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 / ‘아리랑 1권’ 중에서
< 1 >
20원에 생때같은 자식을 팔아먹은 것만 같고, 아들이 영영 돌아오지 못할 것만 같은 불길한 생각이 갈수록 가슴에 감겨들고 있었다. 그냥 20원이면 적지 않은 돈이었지만, 그 돈을 받고 바다 건너 수만 리 밖 미국인지 하와인지 하는 땅까지 아들을 보내기에는 너무 하찮은 돈이었다. 다달이 새끼를 치며 무섭게 불어나는 빚돈만 아니었더라면 아들을 그 어딘지도 모를 땅으로 절대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아덜얼 배 태와 보내고 빚얼 씻는지, 그것이 싫으면 딸얼 나한테 내놓든지, 좌우지간 양단간에 하나로 결정얼 내려, 나도 참는 것에 한도가 있제, 요번에넌 아조 뿌리럴 뽑고 말 참인게로"
빚쟁이 김가는 밤낮으로 찾아와 닦달을 해댔다. 그는 시퍼런 기세로 사람을 몰아대는 한편으로 다 큰 딸자식을 음기 서린 눈으로 흘낏거리고는 했다. 그때마다 딸의 몸이 더러워지는 것만 같아 몸서리를 쳤던 것이다.
"미국이란 나라넌 길바닥에 금뎅이가 굴러댕기는 천국이요, 천국, 허고, 하와이라는 땅언 겨울이란 것이 없이 사시장철 선들선들해 일허기가 아조 편허고 거저 묵기요. 여그보담 반에반도 심이 안든다 그 말이오. 그러니 선금 착 받아 빚 깨끔허니 꺼불고, 몇 년 돈벌이 편허게 해갓고 와서 배 내밀고 살면 얼매나 좋겄소. 여그서 골빠지게 일해 봤자 앞길 캄캄허고, 빛은 빚대로 불어나 집구석 쫄딱 망허는 수밖에 더 있겼소."
때맞춰 역부를 모집한다는 왜놈과 함께 장칠문이가 드나들며 바람을 넣는 말이었다. 아무리 반편이라 하더라도 빚쟁이 김가와 장칠문이네가 한통속이라는 건 금방 알아차릴 수 있는 일이었다. 김가는 장칠문이네를 사이에 끼워넣어 빚빛을 손쉽게 받으려는 속셈이었고, 장칠문이네는 김가의 빚을 이용해 역부를 수월하게 모집하려는 계산속이었다.
감골댁은 나날이 목이 조여드는 것을 느끼면서도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고 안절부절이었다. 아들을 타국으로 보내지 않으려면 딸을 김가의 소실로 빼앗겨야 했고, 딸을 지키려면 어쩔 수 없이 아들을 바다 건너로 보내야 하는 막다른 형편이었던 것이다.
“예 말이오, 이 일얼 어찌야 좋단게라.”
감골댁은 바위가 얹힌 가슴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 말을 원망스럽게 토해내고는 했다.
저세상으로 간 남편에게 원망스러운 생각이 들기는 처음이었다. 농민군으로 나섰던 남편이 2년 만에 병든 몸으로 돌아왔을 때도 그저 살아 돌아온 것만을 감지덕지했던 것이다. 그때까지도 동학당을 잡아죽이는 판국이라 남편 돌아온 것을 쉬쉬해가며 밤봇짐을 싸면서도 생기가 났었다. 그리고 타향살이의 어려움에다가 남편의 병수발까지 겹쳤지만 그다지 힘드는 줄 모르고 살아냈던 것이다. 남편이 장하다는 생각뿐이어서 그저 병수발을 지성껏 했다. 그러나 남편의 병은 지성 다 바치는 것만으로 나을 병이 아니었다. 병이 자꾸만 깊어져 약값을 대느라고 빚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 정성을 바쳤지만 남편은 끝내 병을 이겨내지 못했다. 남편이 떠난 빈자리에 남은 것은 10원이 다 차가는 빚뿐이었다. 그 빚이 달마다 해마다 불어나서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목을 조여오는 올가미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엄니, 별수가 없소. 나가 없으면 몰라도, 보름이 신세들 망칠 수야 있겠는게라.”
마침내 아들이 내린 결정이었다. 감골댁은 그저 눈물만 떨구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빛 18원 갚고, 남는 2원으로는 보름이 시집이나 보내씨요. 엄니 혼자서 동상들 살리자면 입얼 하나라도 줄여야 쓸 것 아니겠능게라.”
아들이 집을 나서기 전에 한 말이었다. 그 속 깊은 말에 감골댁은 가슴이 미어졌다. 아들은 장가를 가서 새살림을 꾸려야 할 스무 살 나이에 엉뚱하게 집을 떠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길은 누구나 한사코 피하는 멀고 혐한 길이었다.(P.26~29)
< 2 >
그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철도공사가 아니라 온갖 잡세들을 하루빨리 없애주는 것이었다. 갑오년 농민군이 들고일어나자 주춤해졌던 잡세는 농민군이 자취를 감추면서 앙갚음이라도 하듯 다시 되살아났고, 관의 닦달도 전과 다름없이 극성스러웠던 것이다.
이것저것 이름 붙인 잡세가 30가지가 넘었는데, 애를 낳았다고 출산세, 사람이 죽었다고 출상세를 물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고, 군수 떠난다고 송별세, 군수 새로 왔다고 부임세, 관청 출입했다고 문지방세, 타작했다고 타작세, 술 빚었다고 탁주세, 길쌈철이라고 김쌈세, 돼지 새끼 쳤다고 양돈세, 그 이름을 헤아리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래서 어떤 입 거친 사람은, 요런 도적놈들아 월경했다고 월경세, 밤일했다고 흘레세는 왜 안 붙이나며 분통을 터뜨렸고, 어떤 싱거운 사람들은 방귀를 뽀오옹 뀌고는, 이놈아 소리내지 말고 나와라, 방구세 물린다, 하기도 했다. (P.62)
< 3 >
백종두는 화가 난 까닭을 알았다는 듯 허허대고 웃으며 윗몸을 눕히고는 "세월은 유수라 시물다섯꺼지 3년은 눈 깜짝헐 촌각이여, 시물둘 나이도 이팔청춘으로보톰 꼽자면 시든 꽃이요, 쉔 죽순이여" 그는 시조라도 읊듯 가락을 넣고 있었다.
"하이고 서러라. 남자 나이 사십은 5월 나비고, 첫배 황소제라이." 옥향이는 오금을 박고는, "그러덜 마씨요. 기생년 나이 시물다섯은 환갑인지 몰라도 여자 나이 시물다섯은 만개헌 작약이요. 흐드러진 수국이란 것이나 알아두시게라. 남정네덜이 이팔청춘 찾아쌓는디,. 그 나이에 그것덜이 몸이 지대로 피기럴 혔소, 또 그 풋것덜이 밤일 묘리럴 알기나 허요. 당장에 그 풋것덜이나 찾아갔씨요.
옥향이는 백종두의 다리를 떠다밀며 몸을 일으켜버렸다.
"요런 버르장머리 없이.
백종두는 그만 머쏙해져 버렸다. 그리고 가라앉으려던 화가 다시 치밀기 시작했다. 저것이 내 말을 안 들어? 그는 무시당했다는 생각이 왈칵 들었다. 그러자 새롭게 화가 머리꼭지를 치받고 올랐다. 그는 무시당하는 것을 그 무엇보다도 치떨려했다. 아전으로 평생을 살아오며 관상(官上)과 양반들에게 끝없이 굽실거리고 비위맞추면서도 무시는 무시대로 당하는 것이 뼈에 사무쳐 있었다. 학식으로나 머리로나 양반을 못 당할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그 아전이라는 피를 잘못 타고나서 당하는 수모고 한이었다. 그 울분을 자신보다 더 아랫것들이나 기생방에서 풀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기생년한테 면전에서 무시를 당한 것이었다. "야이 옥향이년아, 당장 이리 못 나오냐"
백종두는 숨을 고르고 나서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말코지에 걸린 옷을 하나씩 내려 꿰입기 시작했다.
내가 실수혔제. 한 년허고 오래 구녕 맞추다가는 지집이 버르장머리가 없어진다는 말얼 지켰어야 허는 것인디. 근디, 저년 것이 예삿것이었어야제. 어디 그것만 찰떡이었는감. 코피리는 얼매나 잘 불고, 남자 호시 태우는 쌧바닥 기술은 또 얼매나 좋고, 그러니 정신얼 채릴 수가 있었어야게, 저년이 시방 저리 콧대 세우고 뻔대는 것. 지년 기술이 넘보담 낫고, 나가 지년헌티 빠진 것얼 알기 땀새여. 허나 지년 기술이 자아무리 좋아도 오늘로 끝장이여.
백중두는 큼큼 헛기침을 하며 마루로 나섰다. (P.93~96)
< 4 >
폭넓은 금강포구에 바닷물이 가득 실려 있었다. 만조를 이루고 있는 포구는 더욱 넓어 보였다. 만조를 따라 서쪽으로 열려 있는 바다도 한결 넓게 펼쳐져 멀고 가까운 섬들을 더욱 포근하게 감싸고 있었다. 썰물과 밀물의 차이가 심해 섬들은 썰물 때는 커져 보이고, 밀물 때는 작아져 바다에 안긴 듯이 보였다. 포구 건너편으로는 산줄기 하나가 열서너 개의 그만그만한 봉우리들을 이루어내며 해변 쪽으로 뻗어가고 있었다. 그 산줄기가 끝나는 어름에 꽤 큰 마을이 자리잡고 있었다. 충남 장항이었다. 충남 장항과 전북 군산은 서로 빤히 건너다보고 있으면서도 먼 사이였다. 포구가 가로놓여 뱃길이 아니고서는 오갈 수가 없는 탓이었다.
포구에 바닷물이 가득 실려 있을 때 군산 쪽에서 바라다보면 건너편의 낮춤한 산줄기는 바닷물에 그대로 비쳐드는 듯한 정취를 자아냈다. 섬들을 품고 서쪽으로 펼쳐진 바다, 아슴하게 멀고 긴 수평선, 그리고 그 산줄기는 서로 어우러져 그지없이 아담하고 고운 풍광을 이루고 있었다. 그 풍광은 어느 때나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겨 머물게 하는 힘을 지녔지만 특히 빼어난 아름다움으로 치장할 때는 따로 있었다. 물안개가 잠포록이 끼었을 때, 노을이 낭자하게 불붙었을 때, 달이 한적하게 기울 때가 그때였다. 물안개가 자욱하게 피어나는 이른 아침이면 그 풍광은 한없이 신비스러웠고, 노울이 황금빛 현란함으로 타오를 때면 그 풍광은 더없이 황홀했으며, 빛이 사위어가는 달이 적막 속에 기울어져 가고 있을 즈음이면 그 풍광은 그지없이 환상적이었다. 그러나 비가 내리는 날은 비가 내리는 대로 애상적이었고, 눈이 내리는 날은 눈이 내리는 대로 허무적이었다.
그리고 산줄기는 꿇긴 듯 이어진 뜻하며 동쪽으로 어미줄기를 찾아 뻗어가고 있었는데, 그 오른쪽으로는 들판이 널따랗게 펼쳐져 나갔다. 바다와 대칭을 이루고 있는 그 벌판 가운데로 기다란 몸짓을 지으며 유유하게 홀러내리는 물줄기가 금강이었다. 몇백 리인지 모르게 굽이굽이 흘러내린 금강이 제 몸을 바다에 풀어 맡기는 지점에서 오른쪽 포구에 장항이 자리잡았고, 왼쪽 포구로 군산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군산이 바다를 넓게 안고 있어서 예로부터 항구로 긴요하게 쓰였고, 수군 초소도 자리잡아 오게 되었다. 일본이 군산을 개항시킨 까닭도 거기 있는 데다가, 군산은 또 광대한 곡창지대를 뒤로 거느리듯 하고 있었던 것이다.
깃을 세우고 몰려드는 밀물이 남성이라면 잔잔하게 빠져나가는 썰물은 여성이었다. 바다의 힘은 금강을 100리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그래서 금강 하구 100리와 거기에 이어지고 있는 수많은 개울가에는 소금기를 먹고 사는 바다갈대가 무성하게 피어올랐다. 무성한 갈대숲 밑은 으레 뻘 밭이었고, 거기서는 바닷게며 바닷지렁|이 같은 것들이 곰살스럽게 살아가고 있었다. 가을이 되면 그 갈대숲은 푸른빛 엷게 감도는 하이얀 꽃들을 탐스럽게 피워내 꽃의 바다를 이루었고, 바람결 따라 물결지어 내는 그 하이얀 꽃바다는 일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없는 장관이었다. 그리고 겨울이 오면 갈대숲은 멀고 먼 길을 날아온 철새들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그린데 밀물을 따라 금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썰물을 타고 내려오는 배들이 개항과 함께 부쩍 늘어가고 있었다. 금강 양쪽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들을 상대로 장사를 벌이는 일본사람들의 배였다. (P.151~153)
< 5 >
그는 바다 쪽으로 눈길을 보냈다. 맞바라보이는 바다는 그다지 멀지 않았다. 모래밭 언덕이 강한 햇살을 되쏘며 눈부시게 흰빛으로 빛나고 있었고, 바닷물이 암벽에 부딪히며 하얀 물꽃을 쉴새없이 피워내고 있었다. 갈매기떼가 그 물꽃들을 따먹기라도 하려는 듯 아래로 쏟아져 내리다가는 슬쩍 비켜가며 다시 솟구쳐오를 때면 무수한 날개들이 은빛으로 반짝거렸다.
해변에 가까운 바다 색깔은 단조로운 푸른빛이 아니었다. 물 깊이에 따라 여러 종류의 푸른 빛깔 천을 펼쳐놓은 것처럼 층을 이루어나가고 있었다. 맑은 옥빛, 밝은 백옥빛, 진한 청옥빛, 좀 더 진한 초록빛,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남빛 그것은 마치 가지가지 푸른빛들로만 이루어진 현란한 무지개 같았다. 갈매기들이 낮게 낭 때면 그 색색의 바다 색깔이 배경이 되어 갈매기의 자태는 한층 또렷해지고는 했다. 외줄기 키 큰 야자수들은 그런 해변가에 외로운 듯 서서 먼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갈매기들은 암벽에는 더러 내려앉아도 야자수에는 한 마리도 내려앉지 않았다. 그래서 야자수들은 더 외로워 보이는지도 모를 일이었다.(P.189~190)
< 6 >
8월을 앞둔 들녘의 푸르름은 절정에 이르러 있었다. 색깔이 너무 질어 검은기마저 감도는 그 초록의 들판은 단순한 초록색이 아니었다. 살찐 벼들의 부피감으로 하여 보드랍고 폭신하고 두툼하고도 묵직한 질감의 초록색이었다. 거기에 햇빛까지 가미되어 초록색은 싱싱하고 풋풋하고 싱그러움이 생동하고 있었다. 어느 화가가 그런 생명감 넘치는 생동적이고 약동적인 색깔을 낼 수 있을까. 그건 인위적인 색깔이 아니라 자연의 색깔이었다. 그러한 색감에다가 그것이 모두 식량이라는 생각까지 곁들이게 되면 그 초록색 들판은 누구에게나 한없이 넉넉하고 푸짐하면서도 경건하고 겸손한 마음까지 품게 했다.
"좋소, 요시다, 당신은 조선토지가 일본토지에 비해 얼마나 헐값인지 잘 알고 있지요?"
“예, 대개 열 배 이상 쌉니다."
“아니오, 지역에 따라 서른 배까지 싸니까 평균을 내도 열다섯 배 이상 싼 거요. 황무지가 아니라 현재 알곡이 생산되고 있는 농지가 그렇다 그것이오. 세상에 이런 별천지가 어디에 또 있겠소. 논이란 논은 닥치는 대로 다 사들이시오. 무슨 회유책을 써도 좋으니까. 내가 이번에 섭외비용을 배로 늘리도록 하겠소.”
"하! 감사합니다. 상무님." (P.203,208)
< 7 >
겨울 들녘
들녘의 겨울이 깊을 대로 깊어져 있었다. 끝없이 펼쳐져 나가다가 하늘과 맞닿으며 아슴푸레하게 지평선을 이루어내고 있는 들판은 진한 회색빛이었다. 마치도 눈을 품은 겨울하늘이 그대로 내려앉은 듯한 넓고 넓은 회색빛 들판에는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적막만이 가득했다. 벼 그루터기만 남은 들녘에는 사람의 모습 하나 보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들녘은 더 쓸쓸하게 넓어 보였고 적막은 태고의 신비로움을 품고 사무치게 깊었다.
그 깊고 깊은 적막을 헤집으며 정연한 대오를 지은 기러기떼들이 바다 쪽의 하늘 가장자리를 가끔씩 날아가고는 했다. 기러기들은 그 유연한 날갯짓에 맞추어 맑으면서도 서러운 음조로 끼륵끼륵 울었다. 그러나 그 소리들은 그들의 날갯짓이 허공에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못하듯이 들녘이 품은 적막에 실금도 내지 못했다. 적막에 빨려들어 여음도 남기지 못하는 그 소리들은 적막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지를 어렴풋이 보여줄 뿐이었다.
들녘은 그 깊은 적막을 덮고 겨울잠을 자고 있었다. 그 모습이 진회색이라서 잠도 회색빛일 듯싶은 광막한 들녘에서 맘껏 호기를 부리는 것은 북쪽에서 불어닥치는 찬바람뿐이었다. 추위를 실어오는 찬바람은 허허로운 벌판에서 아무런 거칠 것이 없이 달음박질치고 휘돌고 맴돌았다. 그런데도 들녘은 그다지 황량하거나 살벌하지는 않았다.
드넓은 들녘에 드문드문 자리잡은 야산들은 소의 앉음새처럼 듬직했고, 그 야산들을 바람막이해서 모여앉은 집들이 오순도순했고, 그 집들은 아침저녁으로 파아란 연기를 피워올리고는 했던 것이다. 집집마다 파아란 연기들이 피어오르는 속에 개 짖는 소리가 멀리 울리고, 아이들 부르는 아낙네들의 정겨운 소리가 길게 여울져 퍼지는 때면 회색빛 들녘에는 생기가 돌고, 거침없이 활개치던 찬바람도 멈칫대는 것 같았다.
해거름이 되면서 한 집 두 집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며칠째 추웠던 뒤끝을 짓듯이 흐린 하늘에서는 희끗희끗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눈발이 날리는 속에 옹기종기 자리잡은 마을들과 저녁연기 피어오르는 정경은 화평스럽기 그지없었다.
"음마, 눈이 오네!"
마루로 나선 보름이는 문득 중얼거렸다. 흩날리는 눈발을 보자 순간적으로 마음이 반짝하는 반가움이 솟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내 마음은 시무룩하고 무거워져 버렸다. 보름이는 짚신에 발을 꿰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둠살이 느껴지는 하늘에서 눈송이들은 탐스럽게 내리고 있었다. 하얀 눈송이들을 바라보며 보름이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것이 다 쌀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 부질없는 생각에 더 마음 무겁고 서러워지며 보름이는 부엌 문지방을 넘어섰다. 쌀독이 비어버린 것처럼 부엌 안도 썰렁하기만 했다.
밥을 끓이지 못하면서도 끼니때에 맞춰 연기를 피우거나 설거지 소리를 내는 것은 그저 체면치레를 하자는 것만이 아니었다. 서로 마음을 불편하게 하거나 신경쓰지 않게 하려는 예절이었다. 밥 때에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며 이웃들은 서로 죽이나마 끓이는 것이겠거니 생각했고,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으면 그 집이 굶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게 되었다.
어느 집이나 땔감보다는 끼닛거리가 먼저 떨어지게 마련이었다.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게 되면 그 집은 벌써 사나흘은 굶었다는 표시이기도 했다. 그 소식은 곧 가까운 이웃들에게 돌았고, 죽이나마 끓이고 있는 사람들은 보릿가루든 밀기울이든 한 줌씩 추렴하는 마음을 모았다. 그런 이웃의 덕으로 연명을 해낸 사람은 그 고마움을 말로 표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바쁜 농사철에 일품으로 갚아나갔다.(P.350~353)
< 8 >
눈이 오는 밤에 참새몰이는 제격이었다. 기름 자르르 흐르는 참새구이를 소금에 꾹꾹 찍어 차가운 막걸리 한 사발씩 쭈욱쭉 비우는 시원함이란 겨울 사랑방의 더할 수 없는 맛이었다. 얼음 잡힌 생두부에 배추김치를 쭉쭉 찢어 걸친 안주도 어금니 사이사이에 신침 홀러내리게 하는 맛이었지만 그래도 참새구이에는 당할 바가 아니었다. 참새몰이는 단순히 술타령을 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먼저 농사에 해만 끼치는 얄미운 것들을 없앤다는 뜻이 작용하고 있었다. 제비가 오는 것을 반기고 귀찮다는 생각 추호도 없이 해마다 제비집 밑에 똥받침대를 해주는 것과는 정반대였다. 그 일거양득인 참새몰이는 농부들이 겨울을 나면서 즐겁게 하는 일이었다.(P.357)
< 9 >
관은 그대로 서양사람들 관을 쓰기로 했다. 조선식으로 짜보았자 나무에 칠을 해서 말릴 여유도 없고, 솜씨까지 서툴러 관이 빨리 썩고 쉽게 내려앉을 염려가 있었던 것이다.
삐쩍 마른 시체가 관으로 옮겨지자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가 눈시울을 적셨다. 반쯤 벌어진 시신의 입에 쌀알이 가득 찼고 그 가운데 동전 하나가 꽂혀 있었다. 그리고 가슴팍 옷깃에는 10달러짜리 종이돈 석 장이 반쯤 보이게 끼워져 있었다. 30달러 10센트. 그건 주만상의 유품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가 그동안에 모은 돈 전부였다. 고향에 가져가려고 모은 그 돈을 그는 이제 자승노자로 쓰고 있었다. 입에 가득 찬 쌀알들은 검게 탄 얼굴 가운데서 무슨 보석인 것처럼 새하얗게 돋아 보이고 있었다.
날이 새고 하와이의 해가 이글이글 돋아올랐다. 사람들은 다같이 새옷을 갈아입었다. 상여는 10시에 저승걸음을 시작했다.
어으허으 어어허야 어얼럴러 어으히야
가네가네 나는 가네
육십이라 한평생을
반도 못 채우고 나는 가네
어으허으 어어허야 어얼릴러 어으히야
엄니엄니 우리엄니
불효자식 용서하소
미국땅 하와이가 이내 원수요
어으허으 어어허야 어얼럴러 어으히야
저승길이 멀고 험해
고향서도 어둔 발길
타국땅 수만 리서 어찌 갈거나
상여는 앞으로 두어 걸음, 뒤로 한 걸음, 물결 굽이치듯 대밭 출렁이듯 느리게 흔들리고 묵직하게 움직이며 서러운 하소연인 듯 사무치는 흐느낌인 듯 퍼지고 있는 길닦음소리에 부축받고 있었다. 그 소리는 회한에 찬 사람들의 저 깊은 속에서 솟아올라 터지는 것처럼 길게 늘어지면서 탄식이 되고 감기면서 원한이 되고 다시 풀리면서 한숨이 되었다가 휘감겨 돌며 원성이 되어 저승길로 가는 넋을 통곡하고 있었다.
제자리걸음을 하듯 하는 상여의 느린 행보는 걷보리죽만 먹고 살아도 이승이 낫다는 말처럼 선뜻 저승길 나서기를 저어하는 망자의 마음을 나타냄이었고, 이제는 그 어디인지 모를 저승길의 길 동무가 되어줄 도리가 없어 죽은 자를 홀로 떠나보내야 하는 산자들의 애닯고 죄스러운 마음의 표현이었다. 그런 까닭을 알리 없는 루나들은 상여행렬을 뒤따르며 연상 투덜대고 있었다.
눈이 시도록 밝고 바늘끝처럼 따가운 햇살 속에 개간된 땅은 핏빛으로 붉은 속살을 벌겋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 땅을 일구면서 그 처연한 색깔만큼 진한 피땀을 쏟아낸 사람들이 마음 합쳐 부르는 길닦음소리가 그 땅 켜켜이 스며들고 있었다.
길닦음소리가 끝나면서 상여가 조금 빨리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런데 누군가가 노래를 시작했다.
아아리라앙 아아리라앙 아아라아리요오
아아리라앙 고오개애로 너머어가안다아
노래는 이내 합창으로 어우러졌다.
구성지고 눈물겹고 서럽고 사무치고 한스러운 가락을 이끌며 상여는 붉은 벌판끝으로 느리게 사라져가고 있었다.
(P.744~479)
조정래 / ‘아리랑 제1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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