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 소설

조정래 / ‘아리랑 8권’ 중에서

송담(松潭) 2021. 5. 22. 05:07

조정래 / ‘아리랑 8권’ 중에서

 

< 1 >

 

 

그들은 나무숲을 배경으로 해서 사진 찍을 준비를 했다. 방대근과 윤주협 그리고 또 한 사람이 가운데 서고 다른 사람들이 양쪽 옆으로 섰다. 오늘의 주인공은 가운데 선 세 사람이었다.

 

사발이 위에 사진기를 받친 사진사가 검은 천을 둘러쓰고 사진기를 조절하는 동안 그들은 언제 떠들고 웃어댔나 싶게 심각해져 있었다. 아니, 그들의 얼굴은 모두 비장해져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사진은 단순히 훗날의 추억을 위해 찍는 것이 아니었다. 의열단원들은 동지들이 새 임무를 맡아 떠날 때마다 기념촬영을 했다. 그런데 그 기념촬영 거의가 영원한 이별이 되어왔던 것이다. 5년의 세월 동안 300여 명이 사진만 남겨놓고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니 떠나는 사람이나 보내는 사람이나 이번에 찍는 사진이 죽기 전에 마지막 찍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아, 찍습니다!"

 

의열단원들은 겉모습만 말쑥하고 멋지게 차린 것이 아니었다. 모두가 틀 잡힌 건장한 체구에 농담을 잘하면서도 예의가 발랐고, 톨스토이를 비롯한 문학이며 신사조 같은 것들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았다. 그리고 죽음을 늘 눈앞에 두고 사는 사람들답게 언행이 거침없고 화통했다. 그런 그들을 선망하고 동경하는 여자들이 있었다. 제각기 다 사연을 지니고 상해에 와 있는 조선처녀들치고 의열단원들을 연모하지 않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리고 특히 블라디보스토크 쪽에서 온 아가씨들은 의열단원들을 열정적으로 좋아했다. 러시아인과 조선인의 혼혈인 그 아가씨들은 서양적인 아름다움에다가 조선인의 아픈 사연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러시아인의 개방적인 열정도 품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 아가씨들은 의열단원들과 짧으면서도 뜨거운 사랑을 나누기로 소문나 있었다.

 

의열단원들은 자기들이 젊은 아가씨들에게 그렇듯 인기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아가씨가 있으면 열렬하게 사랑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건 죽음이 닥치기 전에 맘껏 젊음을 불태우며 짧은 인생을 즐기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생활이 방탕하게 흐를 수는 없었다. 연애는 얼마든지 자유였지만 빈틈없이 짜여진 나날의 조직생활이 방탕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들은 체력단련을 위해 매일같이 수영 정구 달리기 같은 운동을 했고, 투쟁활동을 위해 저격연습 폭파술 격투기 같은 훈련을 했다.

 

“제군들 하나하나가 전부 조선이다! 조국과 민족의 생존을 위한 투쟁에서 우리는 계속 승리만 할 수는 없다. 때로는 실패도 하고 패배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건 수치가 아니요 치욕도 아니다. 투쟁에 나서지 않고 투쟁을 기피하는 것, 그것이 가장 큰 비굴이고 치욕이다. 우리 조선인의 정의는 투쟁이고, 가장 큰 명예는 투쟁하다 죽는 것이다!"

 

신흥무관학교의 가르침이었다. 그 가르침을 따라 의열단에서만 죽어간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150명이 넘었다. 방대근은 그 가르침을 붙들고 새 기운을 차렸다. 자신에게 하달되는 임무는 주로 밀정 제거였다. 중국말을 하는 덕에 중국 내에서의 활동이 적합하다고 판단했는지도 몰랐다. 그동안 북경과 만주를 오가며 처치한 밀정이 여섯이었다. 그러면서도 어머니와 누나의 원수인 양치성이란 자는 없애지 못했다. 조직이 지목하지 않은 놈인 데다가, 개인행동을 하기에는 거리가 너무나 멀었다.

 

압록강 철교의 폭과 실패가 의열단투쟁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 그전에 벌써 밀양경찰서를 폭파하고,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터뜨린 기세 그대로 상해를 방문하는 일본군 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저격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음해인 1923년 1월에는 종로경찰서를 폭파했고, 3월에는 대량의 폭탄을 국내로 밀반입 시킨 사건이 일어났다. 그 일이 실패로 끝났으면서도 세상을 뒤흔들었던 것은 폭탄의 양이 엄청난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 사건의 주동자 중의 한 사람인 황옥이 현직 경부(警部)였던 것이다. 총독부 경찰관이 의열단 단원이었으니 세상이 요란하고 시끌시끌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의열단의 명성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기만 했다. 그리고 금년 1월에는 일본 동경의 이중교에 폭탄을 투척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악독하기로 소문 자자한 총독부 경무국장 마루야마는 특별담화문을 발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과거 조선에 관한 흉악한 음모로서 이미 폭로된 것은 모두 이들의 소위라 할 만큼 의열단은 광포한 암살단으로, 경남 밀양 출신의 김원봉이란 청년을 단장으로 하고 있다. 동 단체가 조직된 것은 대정 9년으로 그후 동인은 상해 북경 천진을 구치(驅馳)하면서 항상 음모를 기획하고 있어서 당국에서도 그를 체포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로 고심하고 있다.’

 

경무국장은 체면이 손상되는 것을 무릅써가며 체포하려고 '고심'하고 있다고 실토하고 있었다. 약산 김원봉에게 거액의 현상금이 붙은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었다. 그러나 약산이 프랑스 조계에서 명상하듯 묵묵히 지내는 한 아무리 많은 현상금도 다 부질없는 것이었다.

 

 

< 2 >

 

 

차옥녀는 달구지를 얻어타고 눈익은 남원길을 가면서 또 장엄하게 벋어나가고 있는 지리산 줄기를 우러르고 있었다. 드높게 솟아 우람한 자태로 수십 리를 뻗어나가고 있는 지리산 줄기는 언제 보아도 숙연하게 머리 숙이게 했다. 차옥녀는 그 거대함에 또 자신이 졸아드는 것을 느끼며 언젠가는 저 품으로 독공을 하러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남원 여자들이 인물이 곱고 특히나 눈이 맑고 총기가 서린 것은 지리산 정기를 타고나서 그런다고 했다. 지리산은 다른 명산들과는 달리 산신령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정기가 지리산 아래 명당인 남원고을의 여자들에게 타고내린다고 했다. 차옥녀는 그 지리산 정기를 받아 득음을 하고 싶었다.

 

차옥녀는 자정이 넘도록 지리산 쪽을 바라보고 앉아 마음을 가다듬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그냥 앉아 있는 것이었지만 속으로는 내일 부를 더늠을 소리하고 있었다. 내일 부를 것은 당연히 <춘향가>중에서 한 대목이었다. 그러나 한 대목만으로는 안 되었다. 1등을 하게 되면 재청에 삼청도 받아야 했다. 귀명창인 남원 청중들에게 1등으로 뽑히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지만, 재청에 삼청의 박수를 받는다는 것도 여간 힘겨운 일이 아니었다.

 

차옥녀는 숨을 깊이 들이켜며 이 도령과 춘향이를 생각하고 있었다. 눈앞에는 그네를 타는 춘향이의 아리따운 모습과, 그 모습에 홀린 이 도령의 모습이 삼삼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사또의 아들 이 도령과 기생의 딸 춘향이의 사랑 그 걸맞지 않은 신분만으로도 얼마나 가슴 설레는 사랑인가. 차옥녀는 자신도 그런 사랑을 해보고 싶은 충동을 또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사랑병에 사무쳐 있는 오빠였다. 오빠는 이 도령과는 정반대의 처지였다. 상놈으로 양반집 규수를 사랑한 것이었다. 그리고 끝내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여자는 딴 에게 시집을 가고 말았다.

 

오빠의 경우를 생각하자 이 도령과 춘향이의 사랑은 더욱 귀하고 신기할 뿐이었다. 지금 세상에도 양반과 상것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데 어찌 그 옛날에 그런 사랑이 맺어질 수 있는 것인지...... 그러나 그 희한한 사랑 이야기가 진짜가 아니라 누군가가 지어낸 이야기라는 것을 깨달으며 차옥녀는 그만 허탈해지고 말았다.

 

차옥녀는 오작교 쪽으로 친친히 돌아 광한루 아래 차일 친 곳으로 갔다. 그곳이 명창대회에 나온 소리꾼들을 접수하는 곳이었다.

"성명 삼자럴 대시오."

"차옥비, 구슬 옥에 날 비구만요."

"차옥비라, 어느 권번이여?"

“ 기생이 아니구만요.”

"잉? 이름서넌 그런 냄새가 나는디? 되았소, 저짝으로 가서 기둘리소."

여자 출전자는 모두 아홉이었다. 수백 명을 헤아리는 청중들이 빽빽하게 자리잡고 앉아 있었다.

 

차옥녀는 세 번째로 나썼다.

 

사랑 사랑 내 사랑아, 어어화 둥둥 내 사랑이야......

 

<춘향가> 중에서 이몽룡이 춘향이와 첫날밤을 보내기 직전에 불렀던 <사랑가>의 첫 대목이었다.

 

"얼싸 조옹타!" "얼씨구나!" 첫대목에서 추임새들이 터져나왔다.

 

사랑 사랑 내 사랑아. 어어화 둥둥 내 사랑이로구나. 저리 가거라, 가는 태를 보자. 이만큼 오너라, 오는 태를 보자.

 

다시 추임새들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고 있었다. 차옥녀는 그 홍겨운 소리들에 안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호통치는 소리가 귀를 울렸다.

"추임새에 정신 폴먼 소리가 깨져!" 스승의 성난 얼굴도 떠올랐다. 차옥녀는 마음을 다잡았다. 청중들의 추임새에 신경쓰다 보면 북장단을 놓치게 되고, 북장단을 놓치면 소리가 흔들리고 깨지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추임새는 북장단에 묻어들게 해야 하고, 북장단에 묻어든 추임새는 너름새로 걸러내야 했다.

 

유유락일권렴간(悠悠落日捲簾看)의 꽃과 같이 고운 사랑, 동정추월(洞庭秋月)이 솟아날제 무산(巫山)같이 높은 사랑, 으스름 밤초생달이 방실방실 웃는 사랑, 남창북창 노적(露積)같이 다발다발 쌓인 사랑, 왼 바다를 두루 덮는 그물같이 맺힌 사랑, 구만리라 먼먼 하늘 휘휘 감고 남은 사랑, 세월아 봄철아, 가지를 말아라 화류맥상(花柳陌上)에 봄이 가면 우리 님 고운 얼굴 도화빛이 사라질라. 추월추풍에 서리 오면 호탕하신 도련님이 백수한(白首限)을 읊으실라, 달아 달아 밝은 달아, 네 아무리 바뿌어도 중천에 멈추어 있어 내일 날이 오지 말고 백 년여 일 이 밤같이 이 모양 이대로 비쳐다고, 사랑이로구나 내 사랑이야, 어화둥둥 내 사랑이야.

 

언제인지 모르게 짝 펼쳐들었던 부채를 맵시 있는 한 동작으로 착 접으며 차옥녀는 소리를 마감했다. 그리고 나부시 허리 굽혀 절을 했다.

"얼씨구나, 명창 났네에!"

"더 볼 것 없이 1등이여, 1등!"

"재청이여, 재청!"

"그려 그려, 1등 줘라. 춘향이 이 도령 환생이다아!"

청중들이 아낌없이 환호하고 외치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 3 >

 

 

송수익은 며칠이 지나 회의를 소집했다. 지삼출을 중심으로 예닐곱 사람이 둘러앉았다. 송수익은 무심한 듯 그들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나이는 속일 수 없어 그 얼굴마다 주름이 잡혀 있었다. 그 주름살마다 만주의 고단하고 험한 세월이 담겨 있었다. 농사를 지으며 싸워온 세월이었다. 물론 농사보다는 싸우는 것이 먼저였지만 부대를 위장하고 동포들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농사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나 논일을 하다 말고 밀정을 쫓아 수십 리를 헤처야 했고, 큰 작전이 벌어지면 며칠씩 집을 비우게 되었다. 그일 때면 농사 뒷감당은 으레껏 집안식구들이 해내야 했다. 여인네들은 상일꾼이었고, 사내아이들도 열 살이면 벌써 학교 다니는 틈틈이 지게질을 했다. 모두가 말 못할 고초를 이겨내며 살아온 세월이었다. 새삼스럽게 그런 회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송수익의 가슴은 축축히 젖고 있었다.

 

송수익은 길림 쪽으로 길을 잡으며 마음이 홀가분하면서도 뿌듯했다. 땅을 소작료가 아닌 저렴한 사용료를 내면서 장기간 빌리게 된 것은 두 가지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게 된 것이었다. 나이든 대원들의 안정된 삶의 터전을 마련하는 것이었고, 경제적으로나 위치로나 안전한 운동기지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길림 근방은 만주의 중앙이면서 조선국경으로부터 후방이었다. 투쟁의 일선에서 물러 난 대원들을 중심으로 독립마을을 건설하고 그곳을 새로운 투쟁사업의 거점으로 삼을 작정이었다. 그 땅을 좋은 조건으로 빌리는데 전적인 도움을 준 사람은 대종교의 한법린이었다. 그는 중국인 율사(변호사)까지 내세워 일을 완벽하게 처리해 주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런 넓은 땅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길림 쪽의 광활한 벌판에 비해 아직 사람들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중국사람들은 만주의 행정 중심지인 봉천 근방에 밀집해 있었고, 조선사람들은 한사코 국경이 가까운 지역에 발을 붙이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중국인 지주들도 지역에 따라 태도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길림 쪽 지주의 경우 못쓰는 땅으로 버려둔 넓은 습지를 논으로 바꾸는 데 개간비를 들이기는커녕 세까지 받게 되었으니 만족스러워 한 것이었다.

 

 

삼부회의란 만주의 동포사회를 지역적으로 3등분해서 자치정부를 형성하고 있는 정의부·참의부·신민부의 통합을 위한 회의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들 삼부는 1924년과 1925년 사이에 세워진 것이었다. 정의부는 남만주의 통화를 중심으로 길림 일대까지 장악하고 있었고, 참의부는 남만주의 집안현을 거점으로 압록강변 일대의 현들을 포괄하고 있었으며, 신민부는 일본세력 아래 장악된 용정이나 국자가 일대를 피해 북만주에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 삼부는 지역이 서로 다르면서도 부(府)라는 명칭을 단 것이 공통점이었다. 그건 어떻게 보면 상해임시정부를 부인하는 것이기도 했다. 3·1운동을 계기로 만주에서는 수많은 독립운동 단체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때 부라는 명칭을 가진 단체도 있었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 발족된 한성과 연해주의 임시정부가 상해임시정부로 그 명칭과 기능을 통합하게 되자 만주의 단체도 부라는 명칭을 취소했던 것이다. 그로써 상해임시정부는 '대한임시정부'라는 유일성의 법통을 확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상해임정은 기호파와 관서파의 내분으로 정부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게 되어 그 수습을 위해 국민대표회를 연 것이 1923년 1월 3일이었다. 그 회의에서는 임정의 조직을 개편 보완하자는 개조파와 임정을 완전히 새롭게 탄생시키자는 창조파의 팽팽한 대립으로 회의는 결국 결렬되고 말았다. 그 회의의 결과 상해임정은 그전의 문제점들을 그대로 안은 채 더 침체의 국면으로 빼져들었고, 만주에서는 삼부가 생겨나게 되었다. 국민대표회에 만주지역의 단체대표나 독립군대표들이 단연 많이 참석했고, 그들이 창조파였음은 더 말할 것이 없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적과 멀리 떨어져서 내분이나 일삼고 있는 임정과 그 간부들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 삼부는 모두 공화주의적 정부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우선 모든 임원들을 동포들의 의사로 선출했고, 행정부· 입법부·사법부를 독립적으로 구성해서 운영했다. 그리고 그 기구들은 동포들이 내는 세금으로 운영되었고, 또 자치대며 경호대 같은 독립군도 양성했다. 그러니까 상해의 임시정부가 어떤 의미에서 국민과 영토가 없는 정부라고 한다면 정의부·참의부·신민부는 국민과 영토와 주권 그리고 군사력까지 갖춘 실제적인 자치정부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삼부가 좀 더 효과적인 독립투쟁을 하기 위해 통합을 꾀하는 비밀회의를 열고 있었다. 그런 움직임이 일게 된 것은 국내에서 발족된 신간회의 영향이었다.

 

조정래 / ‘아리랑 8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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