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숭아물
금님이와 금예는 봉숭아꽃을 따면서 연상 토닥거리고 있었다. 어스름이 내리고 있는 좁은 마당가에는 여름꽃들이 울긋불긋 화사하게 피어 있었다. 키 껑충한 접시꽃, 작은 장난감 나팔 같은 분꽃, 새초롬한 색시 같은 도라지꽃, 방싯거리는 것 같은 봉숭아꽃. 그러나 담을 타고 있는 나팔꽃과 땅에 다붙은 난쟁이 채송화는 잠꾸러기답게 해가 지면서 꽃들이 오므라들었다.
그런데 접시꽃도 분꽃도 도라지꽃도 한 가지 색만이 아니었다. 흰색과 분홍색, 노란색과 주황색, 보라색과 흰색 등으로 어우러져 있었다. 그중에서도 봉숭아꽃은 제일 다채로워 빨간색 흰색 노란색 분홍색을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꽃밭은 더욱 화사하고 풍성했다.
"안직 꽃이 덜 여물었는디 발써 물얼 딜일라고 그러냐 머시가 급허다고”
보름이는 가게 쪽에서 마루로 나오며 무심히 말했다.
보름이는 두 딸을 내려다보며 동생들과 함께 봉숭아물을 들이던 처녀시절을 생각하고 있었다. 봉숭아물을 들이는 것은 여름 한철에 느끼는 기쁨과 설렘이었고, 무더운 여름밤을 더운 줄 모르게 나는 흥겹고 재미있는 놀이었다. 생활이 아무리 가난하고 찌들어도 손가락마다 봉숭아물 들이는 것은 잊지 않았다. 형제들끼리 동무들끼리 아주까리 잎에 싼 꽃범벅을 서로의 손가락에 묶어주는 즐거움은 더할 수 없는 여름밤의 흥취였다.
‘안직 꽃이 덜 여물었는디.......’ 참 묘한 말이었다. 열매나 곡식이 여무는 것만 아니라 꽃도 여문다고 했다. 7월꽃은 햇빛을 덜 받았으니 햇빛 많이 받고 핀 8월꽃을 써야 물이 진하게 잘 든다는 뜻이었다. 그건 틀림없는 말이었다. 마음들이 바빠 7월꽃을 따서 물을 들이고는 그 색깔이 성에 차지 않아 8월까지 두 번, 세 번 물을 들이다보면 손톱에는 핏빛보다 더 붉은 흑적색 꽃들이 피어나는 것이었다. 너무 붉고 붉어 검은빛이 도는 그 손톱꽃들은 삼베에 무명옷만 걸쳐야 하는 가난한 처녀들에게 유일한 치장이고 멋부름이었다.
봉숭아꽃물의 아름다움이 절정을 이루는 것은 물을 들이고 나서 두어 달쯤 지나면서부터였다. 너무 짙어 검은빛이 돌도록 봉숭아물을 몇 번이고 들이면 그 물이 손톱가의 살에까지 배어들었다. 너무 짙은 흑적색은 맑은 기 없이 탁해 보이는 데다 살에 배어든 색깔은 살색과 섞여 누르붉게 칙칙해서 봉숭아물은 그때가 제일 보기 덜 좋았다.
그런데 설거지며 빨래 같은 물일을 보름쯤 하다 보면 살에 물들었던 색깔은 어느새 말끔히 날아가고 없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면서 손톱의 봉숭아물도 햇살과 물길에 시나브로 바래고 씻겨 검은빛이 탈색되면서 맑고 깊은 빨간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때쯤이면 하얀 반달이 손톱 끝살 속에서 솟고 있었다.
하얀 손톱과 맞물린 빨간 봉숭아물, 갓 솟아오른 하얀 반달로 봉숭아물은 더욱 빨갛게 돋아 보이고, 투명하게 짙은 빨간 봉숭아물로 손톱은 더욱 새하얗고, 그 아름다운 조화는 보석이 따로 없었다. 끝엣손가락 두 개에 하얀 반달을 물고 있는 빠알간 봉숭아물, 그 곱고 깔끔하고 귀한 아름다움은 그 어떤 꽃도 당할 수가 없었다.
조정래 / ‘아리랑 10권’ 중에서
* 위 글 제목 '봉숭아물'은 독자가 임의로 정하였음.
'조정래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정래 / ‘아리랑 11권’ 중에서 (0) | 2021.06.06 |
---|---|
조정래 / ‘아리랑 10권’ 중에서 (0) | 2021.06.02 |
조정래 / ‘아리랑 9권’ 중에서 (0) | 2021.05.28 |
조정래 / ‘아리랑 8권’ 중에서 (0) | 2021.05.22 |
그 깊은 한 (0) | 2021.05.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