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 / ‘아리랑 9권’ 중에서
< 1 >
목포 시가지와 수많은 섬들이 떠 있는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다도해, 이름 그대로 바다에는 섬들이 많고 많았다. 날씨가 맑은 데다 초겨울의 냉기까지 서려 바다색깔은 투명하게 푸르렀고, 수평선은 까마득하게 멀었다. 가지각색의 모양을 한 크고 작은 섬들도 그 윤곽을 선명하게 드러내며 바다를 신비스러운 아름다움으로 꾸미고 있었다.
가끔 볼 때마다 저절로 감탄이 터져나오곤 했던 그 바다에서 박동화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그 아름다운 풍광이 슬픔이 되고 있었다.
시위를 시작하기 전에 이것저것 많이 생각했었다. 그러나 결국 주동자의 일원이 되었다. 박동화는 평소에 듣고 또 들었던 땅 빼앗긴 이야기와 할아버지가 옥사한 이야기가 가슴에 만들어온 분노를 폭발시킬 때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목상 최고다!"
"목상 잘헌다!"
박동화는 이런 외침을 다시 듣고 있었다. 시위대가 길거리를 행진할 때 사람들이 박수와 함께 보내준 격려였다. '목상이란 목포상고를 줄인 이름이었다.
그날의 감격과 보람을 잊을 수가 없었다. 목이 쉬도록 맘껏 만세를 부르면서 독립이라는 것이 눈물나게 절실해지는 것을 처음 느꼈고, 수많은 사람들의 박수갈채와 격려를 받으면서 모두가 바라는 것이 어떤 일인지 깨달았던 것이다. 아버지가 왜 3·1운동 때 활동했던 이야기를 언제나 새로운 것처럼 되풀이했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바다가 석양햇살을 받아 붉어지고 있었다. 섬들 사이로 크고 작은 배들이 떠나가고 또 들어오고 있었다. 그건 거의가 일본배들이었다. 목화와 쌀을 실어가는 배들이었다.
"개잡녀러 새끼덜!"
박동화는 침을 내뱉으며 일어섰다. 어쨌거나 집에는 들어가야 했다.
박동화는 그나마 감옥살이 안 하게 된 것을 위안으로 삼기로 했다. 아니 자신의 위안이 아니라 어머니 아버지의 위안이었다. 경찰서에는 아직 일곱 명이 갇혀 있었다. 그들은 감옥살이를 하게 될 거라고 했다.
반월댁은 제발 퇴학만 당하지 않았기를 빌며 부엌으로 들어섰다. 만약 퇴학을 당한다면 그거야말로 십년공부 도로아미타불이었던 것이다. 큰아들 동화를 상급학교까지 보내느라고 남편과 자신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몰랐다. 그리고 동화 저도 신문배달을 하느라고 고생을 할 대로 다했던 것이다.
"퇴학처분당했구만요." 박동화의 말은 무뚝뚝했다.
"아이고메 어쩌끄나!" 반월댁은 울컥 울음을 터뜨리듯 하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박건식은 담배만 빨며 군은 듯 앉아 있었다.
"그간에 씨리고 애리게 디린 공이 공염불이 되야부렀구나. 다 된 잔치에 코 빠치드라고 졸업 1년 냉게놓고 요것이 무신 날베락이다냐. 그렇게 넘보담 앞장스지 말고 그냥 시늉만 힜어야제 어찌 그리 눈치코치 없이 일얼 철퍽 저질러분다냐 와."
반월댁은 눈물을 뚝뚝 떨구며 아들을 정면으로 타박하고 들었다.
"어허, 참말로 무식헌 소리 혼자 다 허고 앉었네, 동화 공부럴 왜 시킨지 알어? 요분 겉은 일이 옳고 그른지털 식별허라고 시킨 것이여. 넘보담 공부 많이 헌 대가리 써서 요분 일에 꼬랑댕이 뒤로 살살 뗐음사 고것이 어디 사람에 새끼여? 요분에 동화가 앞장슨 것언 아조 잘헌 일이여. 동화야, 할아부님이 옥중서 돌아가신 것에 비허먼 니 퇴학맞은 것언 암것도 아니다. 아무 걱정 말고 심내그라." 박건식이 어기차게 말했다.
"아이고, 애비가 저러니 자석이 멀 뽄보겄소. 공부가 도로아미타불 되야부렀시니 인자 중도 속도 아닌디 심언 무신 놈에 심얼 내라." 반월댁은 울음을 터뜨렸다.
"1년 남은 것이야 벨 것이 아니고 지금꺼정 배울 것언 거지반 다 배웠응게 넘 주는 것이 아니여, 주판 잘 튕기겼다, 장부 잘 꾸미것다. 은행 수산조합 아니라도 이 목포바닥에 취직자리야 얼매든지 있어. 왜놈덜이 어찌서 백여시맨치 목포다 여수다 허는 항구에넌 상업핵교럴 짓고, 광주다 전주다 허는 땅 넓은 디넌 농업핵교럴 진지 알어? 항구로 우리 물자 빼가고 즈그놈덜 물자 실어옴스로 계산 볼 일이 태산 같은게 그런 것이여, 글고 땅 넓은 디넌 농새 잘 짓게 혀서 더 많이 뺏어갈라고 농업핵교 세운 것이고. 여그 목포바닥에 느느니 회사고 도매상덜 아니여? 거그서 주판 잘 놓고 장부 잘 꾸미는 젊은 사람덜 찾니라고 눈이 시뻘거니 퇴깽이 눈덜되야 있는 것 몰르제? 아무 걱정헐 것이 없는 일이다 그것이여. 졸업장 없는 것이 쬐깨 서운허기넌 혀도 만세 불른 것으로 볼충이 되았응게 하나또 서운해헐 것도 없는 일이란 말이시. 나가 곧 존 자리 구해낼 것잉게 당신언 맘푹 놓고 있어." 박건식은 아내에게 자신 있는 눈길을 보내고는, "동화야, 니도 아무 걱정 말고 남치기 1년 공부럴 독학으로 다 띠서 엄니 씨린 가심얼 풀어줘야 쓰겄는디, 니 그리혈 수 있겼냐. 없겠냐?" 그는 아들을 응시했다.
"야아, 꼭 그리허겠구만요." 박동화는 마음이 시원하게 풀리는 것을 느끼며 힘있게 대답했다. 오늘 따라 아버지가 더 크고 높게 보였다.
"아이고 문딩이......." 반월댁의 목소리에는 밝은 기색이 내비쳤다.
학생들의 시위는 저 위쪽 함경북도에서도 일어나면서 1930년 3월까지 계속되었다. 5개월에 걸친 학생운동에 참가한 학교들은 전국적으로 194개교였고, 시위를 벌인 학생들은 5만 4천여 명이었으며, 투옥된 학생들이 580여 명에, 퇴학과 무기정학을 당한 학생들이 2.330여 명에 이르렀다.
< 2 >
만주의 조선공산주의자 각 단체들은 중국공산당 휘하에 속한다! 그건 중국공산당의 횡포나 월권이 아니었다. 국제공산당의 1국1당주의 원칙에 따른 것이었다. 한 나라에 하나의 당, 이 원칙에 의하면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조선공산당이 해체당한 뒤에 각 분파별로 만주에 총국을 세우고 있었던 것은 엄연히 잘못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동안 묵인되었던 것은 중국공산당에서 만주지역의 당조직을 완료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그러나 반일폭동을 조직적으로 일으킬만큼 당조직을 완료하자 중국공산당에서는 1국1당 원칙을 적용한 것이었다. 그 조처는 곧 조선공산주의자 단체들의 해체명령인 동시에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중국공산당 가입 명령이었다. 그것을 거부하려면 중국땅을 떠나야 했다.
그 조처는 조선공산주의자들에게 충격이고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북경에 이동해 있던 의열단원들도 그 문제를 놓고 난상토론을 벌이게 되었다. 왜냐하면 의열단은 1928년 10월 창단 9주년을 기점으로 하여 사회주의 수용을 공식화했고, 다음해 12월에는 북경에서 제3차 조선공산당의 핵심세력이었던 ML파와 조선공산당재건 동맹을 조직했던 것이다.
"1국1당 원칙을 조선공산주의자들에게 적용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1국1당 원칙이란 한 나라에 두 개의 당이 세워져 서로 다투고 싸우는 것을 막기 위해서 만들어진 원칙이지 우리처럼 별개의 나라가 피치 못해서 망명을 와 있는 것인데 그 원칙을 적용한다는 건 억집니다."
"아, 그 말 맞습니다. 그건 바로 장개석의 국민당에서 상해임정을 해산하고 국민당에 입당하라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아 예, 그 말 듣고 보니 그렇군요. 그 점을 명백히 지적해서 중국공산당에 그 조처의 취소를 요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게 무슨 말입니까? 중국공산당원이 되면 꼼짝없이 중국공산당의 지시에 따라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중국혁명투쟁에 골빠지게 동원되고 우리의 독립투쟁은 못하게 된다 그겁니다."
"맞습니다. 그렇게 될 염려가 있습니다."
"아니, 그건 심각한 문제로군요. 우리가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여기 왔지 중국혁명을 위해서 온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되면 주객전도 아닙니까."
"현데, 그걸 꼭 그렇게 협소하게만 생각하지 말고 좀더 대국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도 있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도 다 아시는 일입니다만, 벌써 사오 년 전에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게 이상해서 한 사람한테 그 이유를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은 조선독립을 위해서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노라고 당당하게 대답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먼저 중국혁명을 도와주고 그 다음에 중국의 도움을 받아 조선독립을 이룩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싸워봤지만 우리 단독의 힘으로는 어려우니까 공산주의 국제연대에 입각해서 중국공산당을 동지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그 말이 전혀 허황되게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이번 기회에 수많은 조선사람들이 중국공산당에 입당해서 중국혁명을 도와주면 중국공산당도 우리의 독립을 도와줄 것은 그만큼 확실해진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야 중국혁명이 꼭 이루어져야만 가능한 일인데, 만약 중국혁명이 성공하지 못한다면 우리만 헛고생하고 허송세월하는 것 아닙니까?”
< 3 >
허탁은 곧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송가원은 아무것도 보이는 것 없는 짙은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다.
늘 넉넉하고 느긋하며 어떤 충격이나 힘에도 꺾이거나 부러지지 않고 휘어지거나 구부러지는 유연성과 여유로 끈질기게 버티어 나아가는 사람, 외유내강의 표본 같은 허탁의 모습이 어둠 속에 뚜렷이 떠올라 있었다. 또 얼마나 많은 허탁이 이 어두운 밤에 쫓기고 있을 것인가 나라를 찾으려는 저 외로운 발길...... 없어진 나라는 밤에 저리도 맥박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송가원의 뇌리에는 불현듯 아버지가 떠올랐다. 아버지도 이 밤에 만주벌판 그 어디에서 쫓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송가원은 또 눈을 꼭 감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모습은 여전히 흐리기만 했다.
삼각산 줄기 그 어디선가 소쩍새가 밤 깊은 줄 모르고 구슬프게 울고 있었다. 망국의 한을 서러워하는 것처럼.
< 4 >
손을 든 아이들의 암기가 다 끝나자 나머지 아이들은 교탁에서부터 출석번호대로 줄을 섰다. 그리고 여선생 앞에 두 손바닥을 나란히 폈다. 얼굴에 살얼음이 낀 여선생은 아이들의 손바닥을 석 대씩 내리쳤다. 손바닥을 맞은 아이들은 두 손을 허공에 마구 털어대기도 했고, 입에 대고 불기도 했고, 맞비비며 뺑뺑이를 돌기도 했고 사타구니 사이에 넣고 깡충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눈물이 맺히면서도 아프다고 소리치는 아이들은 하나도 없었다. 소리를 냈다가는 더 맞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딸랑딸랑 종이 울리고 시간이 끝났다. 여선생이 나가고 조금 있다가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아이고메, 인자 살았다!"
"아이고 징헌 눔에 수신시간."
"나넌 피가 다 보타부렀다."
"나넌 붕알이 뽀짝 쫄아부렀다. 히히….
아이들은 비로소 조선말을 하며 키들거리는 여유를 찾았다.
박용화는 속이 쓰리도록 배고픔을 느끼며 멀리 떠 있는 삼학도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삼학도를 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 섬과 부두 사이에 떠 있는 일본기선들을 보고 있었다.
일본은 기선이 저리도 많은데 왜 우리는 하나도 없을까. 일본은 기선이 많은 것처럼 힘이 세다. 우리는 돛단배뿐이라서 힘이 약하다. 기선 한 척하고 돛단배 100척하고 싸워도 기선이 이긴다고 했다. 쇠로 된 기선한테 나무로 된 돛단배가 지는 것은 너무 당연했다. 왜 우리는 그 꼴이 되었을까. 게을러서 가난하다는데 그것도 게올러서 그런 게 아닐까?
박용화는 무겁게 몸을 일으키며 또 그 생각을 했다. 어서어서 어른이 되고 싶었다. 어른만 되면 얼마든지 돈 벌 자신이 있었다. 지금도 산수 숙제를 해주고 돈을 벌고 고구마나 떡도 얻어먹었다. 돈을 많이 벌어서 쌀밥에 고깃국을 배가 터지도록 먹고 돈을 마음껏 써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형도 미련하기로 치자면 아버지보다 더했다. 형은 주판 잘 놓고 암산 잘하기로 소문나 있었다. 은행에 있는 행원들도 형을 못 당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형은 은행에 비하면 움막이나 다름없는 좁은 사무실에 박혀 있었다. 사무실 크기만이 아니라 월급도 서너 배는 차이가 난다고 했다. 형은 근사하게 양복을 입은 은행원이 될 수 있었는데도 아버지와 똑같이 시위 주동자가 되어 퇴학을 당하고 그리 볼품없이 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 대목에서 영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시위는 형이 먼저 주동한 것인데 아버지가 그걸 보고 배운 것인지, 아니면 아버지가 그런 생각을 품고 있으면서 형에게 가르친 것인지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걸 아버지나 형한테는 물을 수가 없고, 어머니나 누나한테 물어보았자 알 것 같지가 않았다. 어머니는 일본글은 커년 한글도 알지를 못했고, 누나들은 자신이 구구법을 가르쳐주는 처지였던 것이다. 어쨌거나 아버지나 형은 똑똑한 것 같으면서도 미련했다. 손해만 보면서 시위를 주동하고 나서는 것은 기선하고 돛단배가 싸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른들이 왜 그 쉬운 이치를 모르는지 알 수가 없었다.
< 5 >
“총알 하나하나는 모두 동포들의 피요 살이다. 한 번의 연습이 총알 하나를 아끼고, 열 번의 연습이 왜놈들 심장을 꿰뚫게 된다. 다들 이를 악물어라"
가혹하리만큼 엄한 훈련조교들이 하는 말이었다.
김건오는 그 말에 정신을 가다듬고는 했다. 총알 하나하나는 모두 동포들의 피요 살이다. 그 말은 과장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였던 것이다. 거의 모든 동포들이 중국인의 소작인으로 얼마나 고달프고 배주리고 살면서 독립자금을 만들어내고 있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들어온 것이 학전(學田), 군전(軍田), 생전(生田)이라는 말이었다. 농사지어 자식을 가르치는 땅이 학전이었고, 군자금을 내는 땅이 군전이었고, 식구들이 먹고사는 땅이 생전이었다. 동포들은 소작농사를 짓는 궁한 속에서도 그렇게 농토를 3동분해서 군자금을 꼭꼭 냈던 것이다.
조정래 / ‘아리랑 9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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