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 소설 62

성(性)에 대하여

성(性)에 대하여 송경희는 한사코 김범우와의 정사 기억만을 붙들려고 애썼다. 그 기억은 뜨거우면서도 시원하고, 황홀하면서도 명료해 걸음걸이를 한결 가볍고 수월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한 가지 난처한 점이 있었다. 얄궂게도 그 기억은 눈을 감고 서야만 환하게 재생되었고, 그 감각의 황홀함도 살아올랐다. 그 행위 자체가 눈을 감기게 하는 것이라서 그러는 것일까. 눈을 감고 걷노라면 그때의 안개밭 같기도 한 혼미함이, 꽃밭 같기도 한 현란함이, 별밭 같기도 한 찬란함이, 파도떼 같은 격렬함이, 여름 모래밭 같은 뜨거움이 남자의 숨결과 체취와 동작에 뒤섞여 휘돌고 맴돌고 소용돌이치는 것이었다. 누가 성을 추하다고 했는가. 누가 성을 죄악시 했는가. 성만큼 깨끗한 아름다움이 어디 있는가. 성만큼 순수한 작업이 어디..

조정래 소설 2014.12.09

조정래 / 태백산맥7 중에서

조정래 / 태백산맥7 중에서 그러니까 일본에서 들었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아, 거 뭐랬지? 무지하고, 더럽고, 게으르고, 그리고.... 거짓말 잘하고, 도둑질 잘하고, 그 담에가... 응 그렇지 무질서 하지. 그래, 맞았어. 야만인의 조건을 골고루 다 갖춘 셈이지. 그것은 일본놈들만 지껄여댄 소리가 아니라 황국신민. 내선일체를 선봉장으로 부르짖어댄 소설가 이광수라는 자가 뻔질나게 글로 써댄 내용들이었다. 민족계몽이라는 미명을 내걸고 이광수가 저지른 그런 작태는 악의적으로 민족비하의 조항들을 나열한 것이었고, 상대적으로 일본놈들은 우리와 정반대라고 칭송하는 것이었으며, 그리하여 일본놈들이 전보다 더 우월감과 자신감을 갖게 하는 전기를 마련했고, 일본놈들이 우리 민족을 더욱더 맘 놓고 멸시하고 짓밟을 수 ..

조정래 소설 2014.12.09

백범 김구의 한계

백범 김구의 한계 우리의 해방상황을 해방으로 보지 않고 새로운 식민지체제로 파악하고, 외세배격을 위한 제2의 독립투쟁 전개를 내세운 것은 백범다운 용기고, 그 누구도 흉내 못 낸 탁월함이었소. 이승만은 미국에 치우치고, 여운형과 박헌영은 소련에 치우쳐 그런 공적 태도를 취하는 것은 엄두도 못 냈으니 말이오. 그러한 선명성을 내세웠을 때 백범은 새로운 민족의 개념을 정립하고, 그것을 정치이데올로기로 실천할 수 있는 민중조직을 구성하고 확대해야 했던 거요. 다시 말해, 백범은 민족주의를 정치이념으로 부르짖었으되 민중을 동감으로 자각시키고, 그 자각으로 민족이 동질의 연대감을 갖게 하고, 그 연대감으로 자발적 실천력을 갖게 하는 민중조직으로서의 민족을 창출해 내지 못했단 말이오. 김 형, 함께 생각해 봅시다...

조정래 소설 2014.12.09

친일반역을 처단하지 못한 과오의 역사

친일반역을 처단하지 못한 과오의 역사 우리에겐 그 기회가 딱 한 번 있었네. 친일반역자들의 처단은 해방이 된 그날부터 민중들의 손에 의해서 감행됐어야 했던 거야. 그자들은 거의 몸을 숨겨 스스로의 죄를 입증했으니까 골라내고 말고 할 것도 없었지. 미군이 점령하기 전까지 우리 민중들에겐 20일이 넘는 절호의 시간이 주어져 있었지. 거기다가 건준이 신속하게 조직구성을 했지. 그런데 민중들도 그 아까운 시간을 허송했고, 건준도 전국 방방곡곡에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민중조직을 결속시켜 그 일을 단행하는데 소홀히 하고 말았어. 그나마 나라나 민족을 생각한다는 사람들이, 친일세력을 제거하지 못한 것이 미군의 비호 때문이라고 쉽게 말해 버리는데, 물론 미군이 우리 민족문제에 개입해 저지른 범죄야 엄연하고 용서할 수 없..

조정래 소설 2014.12.09

조정래 / 태백산맥 5권에서

조정래 / 태백산맥 5권에서 3월이 오는 봄이고, 5월이 가는 봄이라면, 4월은 머무는 봄이었다. 머무는 봄의 자태는 하늘과 땅 사이에 현란함과 황홀함과 혼미함으로 드리워져 있었다. 그건 아지랑이였다. 5월의 풋보리를 기다리는4월은 죽 한 끼를 제대로 넘길 수 없도록 춘궁이 극에 달한 시기였다. 모여앉은 아이들의 얼굴은 마를 대로 말라붙은 채 마른버짐이 피거나, 누르께하게 들뜨거나, 검게 타들고 있었다. 그 굶주린 얼굴들의 입 언저리에는 분가루를 바른 듯 노오란 솔꽃가루들이 묻어 있었다. 아이들은 무거운 몸을 부린 채 숨 막히도록 아롱거리는 그 어지러운 아지랑이춤을 초점 잡히지 않는 눈길로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아지랑이 속에서 짙푸른 보리밭도 아롱거리고, 자운영꽃 붉은 논도 아롱거리고, 검은 빛의 ..

조정래 소설 2014.12.08

조정래 / 태백산맥 4권에서

조정래 / 태백산맥 4권에서 이지숙은 중도들판을 바라보았다. 긴 방죽을 경계로 간척지는 질펀하게 펼쳐나가고 있었다. 바다를 막아 일군 농토...... 그녀의 가슴으로 알 수 없는 슬픔이 물결져왔다. 방죽을 막기 전에는 바닷물이 지금 자신이 서 있는 바로 발 아래로 뻗어가고 있는 신작로 가까이까지 들어왔다고 했다. 그러니 저 넓고 넓은 간척지는 그때 뻘밭일 뿐이었던 것이다. 그 뻘밭을 농토로 만들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은 의지를 모으고 노동을 바친 것이다. 그건 평지에서 돌담을 쌓거나 축대를 쌓는 일이 아니었다. 발이 푹푹 빠지는 빨밭을 가로질러가며 바닷물을 차단시킬 수 있도록 튼튼한 방죽을 쌓는 일이었다. ‘워따 말도 마씨요. 고것이 워디 사람이 할 일이었간디라. 죽지 못혀 사는 가난하고 가난헌..

조정래 소설 2014.12.08

단재 신채호와 우남 이승만

단재 신채호와 우남 이승만 참 유감스럽게도 대중들이 우남을 훌륭한 독립투사로만 알 뿐 그 비행은 거의 모르고 있다는 것이 문제일세 이제 조심스럽게 알려지고 잇는 사실이지만, 우남은 상해 임정의 수반이 될 때부터 말썽이 많지 않았나. 그가 수반이 되는 것을 적극으로 반대한 분이 단재 신채호 선생인데, 미국 정부에 한국의 위임통치를 청원한 매국노 이승만을 어찌 수반으로 앉힐 수 있느냐는 것이었지. 그러나 국제외교를 통한 독립획득이라는 외교론 족이 우세하여 이승만이 수반으로 결정되었네. 물론 미국의 국제적인 영향력을 감안한 조치였지. 이에 분개한 단재는 임정과 관계를 끊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등을 돌리고 말았지 않았나. 대통령에 취임하기 위해 미국에서 상해 임정으로 온 이승만은 얼마 머물지도 않고 다시 미국으..

조정래 소설 2014.12.08

‘태백산맥3’중에서

조정래/‘태백산맥3’중에서 이북을 소련군이, 이남을 미군이 점령하고 양쪽에 자기들 식의 정권을 세우려고 한 의도야 너무 자명한 것이니 더 말할 필요가 없겠네. 그런데 미소가 서로 자기네식 정권을 세우는데 있어서 차이점을 보였으니, 그게 중대한 문제네. 그 차이점이란 공산주의다. 자본주의다 하는 체제의 다른 점이 아니라 그 체제를 꾸미는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를 말하는 것이네. 이북은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을 완전하게 정치적 사회적으로 숙청을 단행해 버렸네. 그래서 50만이 넘는 친일반민족주의자들이 삼팔선을 넘어 이남으로 도망나왔다네. 그런데 이남에서는 이북과는 반대로 오히려 친일반민족주의자를 옹호하고 보호하며, 그들을 핵심세력으로 해서 정권을 세워나갔네. 그 차이란 뭔가? 한쪽은 절대다수의 민중들이 권력기반..

조정래 소설 2014.12.07

‘태백산맥2’중에서

조정래/‘태백산맥2’중에서 모든 인간은 역사의 중심에 있고자 한다. 그것은 곧 지배의 욕구다. 그러나 그 누구도 역사의 중심에 있을 수 없다. 역사가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역사의 생리는 수은주 이하의 냉철한 비판이기 때문이다. 역사선생의 말이었다.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무산자혁명, 그것이야말로 역사의 그늘이나 역사의 변두리로 내몰린 사람들을 역사의 중심에 서게 하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고자 함이 아닌가. 봉건주의의 지배층과 제국주의의 부유층을 몰아내고, 그래서 계급 없는 사회를 건설했는데도 역사는 중심에 서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인가. 수은주 이하의 냉철한 생리로 가진 역사의 정체는 무엇인가. 역사는 사회주의의 어떤 점을 비판하게 될 것이며, 사회주의자들은 어떤 잘못으로 비판을 받아 역사의..

조정래 소설 2014.12.07

'태백산맥1' 중에서

조정래 / '태백산맥1'중에서      다 똑같은 사람끼리 어찌 차등이 있어야 되겠느냐.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한 번 태어나고 한 번 죽듯이 이 세상 모든 사람은 다 똑같은 것이다. 양반이 따로 없고 상놈이 따로 없다. 그건 양반이란 것들이 저희들 좋게 지어낸 새빨간 거짓말이다.    마찬가지로 지주라는 것도 따로 없고 소작이란 것도 따로 없다. 지주라는 것들이 소작인은 대대로 소작인이 될 수밖에 없도록 소작법을 악질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지주는 영원히 지주로 떵떵거리고 소작인은 영원히 소작인으로 배를 곯게된다.    그 많은 소작인들이 비참한 생활을 면하고 모두 평등하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봐라. 양반이란 것들은 그 많은 백성들의 피를 빨며 배를 불리다가 나라를 빼앗겼고, 다시 일본놈들과 작..

조정래 소설 2014.1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