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 소설

백범 김구의 한계

송담(松潭) 2014. 12. 9. 07:09

 

 

 

           

백범 김구의 한계

 

 

 

 우리의 해방상황을 해방으로 보지 않고 새로운 식민지체제로 파악하고, 외세배격을 위한 제2의 독립투쟁 전개를 내세운 것은 백범다운 용기고, 그 누구도 흉내 못 낸 탁월함이었소. 이승만은 미국에 치우치고, 여운형과 박헌영은 소련에 치우쳐 그런 공적 태도를 취하는 것은 엄두도 못 냈으니 말이오. 그러한 선명성을 내세웠을 때 백범은 새로운 민족의 개념을 정립하고, 그것을 정치이데올로기로 실천할 수 있는 민중조직을 구성하고 확대해야 했던 거요. 다시 말해, 백범은 민족주의를 정치이념으로 부르짖었으되 민중을 동감으로 자각시키고, 그 자각으로 민족이 동질의 연대감을 갖게 하고, 그 연대감으로 자발적 실천력을 갖게 하는 민중조직으로서의 민족을 창출해 내지 못했단 말이오.

 

 김 형, 함께 생각해 봅시다. 백범의 민족주의가 민족이라는 추상명사가 갖는 막연함과 흐릿함과 구분되는 그 어떤 구체성이나 명확성이 있소? 좋은 에로 장례식날 그 많이 모인 사람들에게, 백범이 누구냐, 물었을 때 뭐라고 대답했을 것 같소? 하나같이 임시정부수석이라고 대답했을 거요. 그 다음에, 백범의 민족주의가 뭘 말하는 것이냐 물으면 다 눈만 껌벅거렸을 거요. 그런데 독같은 사람들에게 , 좌익은 자기네들 세상이 되면 뭘 한다더냐, 물으면 무슨 대답이 나올 것 같소? 최소한의 대답이, 누구나 공평하게 사는 세상을 만든다더라, 아니겠소? 아까 김 형이 말한 대로 백범의 건국강령이 토지개혁단행친일반역자 척결이었으니, 그 훌륭한 강령을 위로는 깃발로 세우고, 아래로는 민중을 상대로 조직적 선전을 펼쳐, 사람들의 입에서 좌익에 대한 최소한의 대답이 나오듯이 그렇게 만들어야 했다 그 말이오.

 

 그 민중조직을 이끄는 민족주의도 그냥 민족주의라고 할 것이 아니라, ‘민중민족주의라거나 혁신민족주의라고 하거나 하다못해 신민족주의라고 해서라도 그전의 혈연 일체감을 나타내는 비논리적이고 감상적인 민족주의와 확실하게 구분해야 했던 거요. 그렇게 됐더라면 장례식에 모인 사람들이 임시정부주석이라고 했겠소? 백범은 해방 아닌 해방의 상황 속에서 그 누구보다 분투했소. 그러나 그 분투가 상부에서만 맴돌았을 뿐 하부로부터 호응이 전혀 없었소. 민중이라는 존재와 그 힘을 근원적으로 인식하지 못한 게 백범의 한계였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소.

 

 한 가지 중대한 사실이 있소. 백범이 좌익만큼의 조직을 가지고 남북협상에 임했더라면 김일성에게 그런 식의 푸대접을 받지 않았을 거요. 겉으로 드러나는 형식적인 환영이 백번이면 무슨 소용이 있소. 김일성은 절차상 당연히 있어야할 연설도 시키지 않았고, 환영과는 반대로 대중들에게, 김구가 항복하려고 도장 가지고 왔다고 선전해 대지 않았소. 백범이 좌익이데올로기에 맞설 수 있는 의식으로 뭉쳐진 민중조직을 가지고 있었다면 감히 김일성이 그런 짓은 못했을 것이오. 김일성은 백범을 종이호랑이로 취급한 거요. 백범의 그 점은 아쉽고 안타까운 대목이오.

 

 

조정래 / 태백산맥 5(242~243페이지)에서

 

* 위글 제목 백범 김구의 한계는 독자가 임의로 정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