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 소설

조정래 / 태백산맥 5권에서

송담(松潭) 2014. 12. 8. 08:43

 

 

조정래 / 태백산맥 5권에서

 

 

 

 3월이 오는 봄이고, 5월이 가는 봄이라면, 4월은 머무는 봄이었다. 머무는 봄의 자태는 하늘과 땅 사이에 현란함과 황홀함과 혼미함으로 드리워져 있었다. 그건 아지랑이였다. 5월의 풋보리를 기다리는4월은 죽 한 끼를 제대로 넘길 수 없도록 춘궁이 극에 달한 시기였다.

 

 모여앉은 아이들의 얼굴은 마를 대로 말라붙은 채 마른버짐이 피거나, 누르께하게 들뜨거나, 검게 타들고 있었다. 그 굶주린 얼굴들의 입 언저리에는 분가루를 바른 듯 노오란 솔꽃가루들이 묻어 있었다. 아이들은 무거운 몸을 부린 채 숨 막히도록 아롱거리는 그 어지러운 아지랑이춤을 초점 잡히지 않는 눈길로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아지랑이 속에서 짙푸른 보리밭도 아롱거리고, 자운영꽃 붉은 논도 아롱거리고, 검은 빛의 먼 산도 아롱거림을 바라보며 아이들은 어서 5월이, 그리고 6월이 오기를 기다렸다. 5월이 오면 보리서리 밀서리가 시작되고, 6월이 오면 감자서리 꽃게잡이를 하게 되었다. 여름이 되어갈수록 배를 채울 것이 많아진다는 것을 아이들은 알고 있었다. 아이들은 삐삐나 솔순만 먹는 게 아니었다. 찔레순도 껍질 벗겨 먹었고, 뱀딸기도 따먹었고, 개더덕도 캐먹었다. 먹는 것인 줄 번연히 알면서도 그러나 아이들이 손대지 않는 것이 한 가지 있었다. 6월 들어 영글기 시작하는 목화다래였다. 보리서리 밀서리 같은 것도 어른이나 주인의 눈들을 피해 하는 것이었지만, 들키게 되더라도 어른들은 새 쫓듯이 먼발치에서 소리만 질렀는데, 다래를 따먹다가 들키면 어른들은 정말 화가 나서 머리통에 주먹질을 해대게 마련이었다. 주인이든 아니든 어른들이 그러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른들은 왜 그러는지를 아이들은 알앗다. 보리나 밀은 사람이 먹고 사는 음식이었고, 다래는 솜으로 두고두고 써야하는 물건이지 먹어 없애는 음식이 아니었다. 붉은 점이 돋아나기 전의 어린 다래는 달치근한 물기를 품고 있어 꽤나 먹을 만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인적이 전혀 없는 산밭을 지날 때도 초록빛 어린 다래에서 애써 눈길을 돌렸다. 모습이 보이지 않는 종달새는 아지랑이 가득한 하늘 그 어디에선가 맑은 소리를 굴리고, 허기진 아이들은 아지랑이에 취하기라도 한 듯 따스한 햇발 속에서 시름시름 잠에 빠져들어 갔다.

 

 여자들의 집안농사는 텃밭갈이로 끝나지 않았다. 헛간이나 뒤란의 구덩이에는 박씨를 넣었고, 담장가의 구덩이에는 호박씨를 넣었으며, 울타리를 따라서는 완두를 박았다. 그때부터 오줌 한 방울, 개숫물 한 방울도 함부로 버리지 말아야 했다. 잘 삭은 오줌은 채소에 더할 수 없이 좋은 비료였고, 아침저녁 골따라 부어주는 개숫물은 채소가 쑥쑥 자라게 하는 어디에도 없는 힘이었다. 텃밭과 담장을 새끼 돌보듯 정성을 들이면 반찬 걱정은 따로 할 것이 없었다. 식은 보리밥에 상추쌈 풋고추면 제격이었고, 아욱국에 상추 겉절이면 또 한 끼가 넘어갔고, 애호박을 썰어 넣어 된장찌개 끊이고 호박잎 밥에 쩌내면 저녁밥이 배불렀고, 생깻잎 양념장에 절이고 가지무침을 올린 다음 완두콩 한 줄을 넣어 지은 보리밥을 놓으면 그 밥상이야말로 푸짐한 여름밥상이었고, 거기다가 아이들이 물푸기를 해서 잡아온 붕어라도 있어 방앗잎 얹어 얼큰하게 찌개를 해놓으면 보리밥도 별미였다. 농가에서 아무도 돌보는 일 없이 계절 따라 자라났다가 계절 따라 꽃을 피우고 계절 따라 스러져가는 몇몇 꽃이 있었다. 장독대 뒤쪽에 선 키 큰 접시꽃, 장독대 앞에 줄 선 맨드라미, 봉숭아, 채송화가 그것이었다. 그 꽃들은 누구에게 후대를 받는 일이 없이, 그렇다고 박대를 받는 일도 없이 가난한 초가삼간이 대부분인 농가의 유일한 치장물로 꽃피움을 하고는 제 계절을 무심한 듯 살다가 갔다.

 

(592~95페이지)

 

 

 어쨌거나 내가 백범을 믿고, 그분의 노선을 지지했던 것은, 그분이 내세운 세 가지 실천목표가 장구한 민족의 삶을 위해 옳고 포괄적이기 때문이고, 그 실천을 위해서는 그 어떤 이데올로기에도 편중되지 않고, 민족 우선 아래 모든 이데올로기를 포용할 수 있는 폭과 능력을 신뢰했기 때문이었다. 그분이 정말 임정을 등에 업은 권위주의자였다면 일흔넷의 나이로 서른 다섯 살에 불과한 김일성을 과연 만나러 갈 수 있었을 것인가. 그분은 권위주의자도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고집불통도 아니었다. 민족을 위한 대의의 길을 찾기 위해서는 객관적 지위도 개의하지 않았고, 개인적 기분도 일소한 것이 아닌가. 두 강대국의 점령과 함께 두 이데올로기가 대립하는 상황에서 누가 가장 바람직한 지도자였을까. 사회주의 혁명을 앞세운 극좌의 박헌영이었는가. 권력 장악만을 앞세운 극우의 이승만이었는가. 좌우합작을 앞세운 중도적 여운형이었는가. 민족자주를 앞세운 포용적 김구였는가. 두 강대국이 양보없는 대립을 하는 한 극좌나 극우의 노선은 필연적으로 민족분열을 초래하게 되어 있었다. 이데올로기에 의한 민족분열, 그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어리석음이고 비극 아닌가. 그럼 여운형과 김구가 남는다. 그 두 사람이 한때 뜻을 같이하려고 접근했던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민족의 분열부터 막아 외세에 대처하고, 그 다음 단계로 사회혁명을 시도하여 민족정권을 세우려 했던 그들의 구상은 진정 바람직한 것이었다. 그러나, 몽양이 먼저 총을 맞고 떠나갔고, 이제 백범마저 총을 맞고 떠나가게 되었다. 두 민족주의자는 차례로 제거되고 극우와 극좌만 남겨진 것이다. 미국이 주도하는 제국주의의 패권주의와 소련이 주도하는 공산주의의 팽창주의가 대결하는 틈바구니에서 두 민족주의자가 그렇게 죽어가야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고, 피할 수 없는 운명인지도 모른다.

(5220페이지)

 

 그늘이라고는 없는 논밭에 쏟아져내리는 7월의 햇살은 말 그대로 불볕이었다. 그 바늘끝 같은 햇볕을 쬐고 마시며 온갖 곡식들은 실하게 커가는 것이지만 그 속에서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은 피만큼 진한 팥죽땀들을 흘리며 허덕거려야 했다.

 

강동식의 아내 외서댁과 강동기의 아내 남양댁은 목화밭의 김을 매고 있었다. 머릿수건을 평소보다 깊게 눌러써 얼굴을 가린 그녀들은 서로 다른 골을 따라 호미를 손 빠르게 놀려대고, 왼손이 잡풀들을 잡아뜯고 있었는데 그 동작은 마치 기계가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빠르고 정확했다. 그런데 호미질을 하고 풀이 뽑힐 때마다 땡볕으로 익은 땅이 내뿜는 후끈거리는 열기와 함께 흙먼지가 푸석푸석 일어났다. 그 흙먼지는 땀이 줄줄이 흐르고 있는 손이나 팔에 계속 엉겨붙어 떡덩어리가 되는 것은 물론이었고 땅이 내뿜는 열기에 섞여 숨쉬기를 거북하게 만들었다. 위에서는 불볕이 쏟아져내리고, 아래서는 흙먼지 섞인 훈김이 후끈후끈 솟아오르고, 쪼그려앉은 자세로 앉은걸음을 치며 일손을 계속 놀려야 하고, 한증막이 따로 없었다. 그래서, 목화밭 풀매기 한나절에 속곳 밑 파고드는 훈김으로 새댁 거기 다 익어버린다는 말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농사일 중에서도 목화밭 김매기는 그만큼 고역스러워 논매기보다 더 어렵게 쳤다. 논매기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나마 물일이어서 땅이 내뿜는 훈김이 밭보다는 덜한데다가 흙먼지기 피어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논매기도, 볏잎은 눈을 찌르지, 거머리는 달라붙지, 허리는 부러지지, 다리는 부어오르지, 결코 수월한 일이 아니었다.

 

(5227페이지)

 

 

 이학송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10.1폭동에 동원된 인원이 100만 명이 넘었고, 사망자가 1천여 명인데, 이 어림잡은 통게에서도 완전히 제외된 수가 도 1천여 명은 될 거고 거기다 경찰 사망자가 이삼백 명 합해야 겠군. 그담에 큰 사건이 제주도 4.3사건인데, 살상당한 수가 85천여 명, 그 담이 여순반란사건인데, 그게 그러니까 9천에서 1만 명이지. 그리고 작다고 할 수 없는 사건들이 끊임없이 일어나며 죽어간 사람들 수도 합해놓으면 굉장할 거네.

그러니가 4년 동안에 남쪽에서만 죽어간 사람이 10만 명을 헤아린다는 게산이군요. 그런 셈이지. ! 한 읍을 2만 명으로 잡으면, 다섯 개의 읍민들이 깡그리 죽어 없어지고, 다섯 개의 읍이 사라져버린 셈이군요. 손승호가 기막혀했다. 그게 군정 3년이 세운 업적이고, 그 시체들 위에 이승만 정권은 세워진 것 아닌가

(5316페이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간 것도 문제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살아남아 있는사람들의 앞으로의 문제일 거요. 정치만을 반민족세력이 장악한 게 아니라 경제까지 반민족세력이 장악하고 말았기 때문이오. 군정은 정치와 경제 양면 모두를 반민족세력에게 떠넘겨줌으로써 이 땅의 남쪽을 명실공히 속국화시켜 버린 것이오. 미곡수집정책으로 쌀값을 500배까지 올려 인플레와 함께 잉여농산물을 풀어놓지 않았소? 점령지를 자기네 경제에 예속시킴과 동시에 자기네 시장으로 확보한 것이오. 그리고, 그들은 그 많은 귀속재산을 완전히 장악한 다음 기업이윤을 빼먹을 만큼 빼먹고 나서 그것을 또 반민족세력들한테 넘겨주고 말았소. 군정은 정치도 경제도 다 자기네들 뜻대로 재편성하고 조직했소. 그러니 앞으로 대중생활이 어떤 꼴이 되겠소. 해방은 되나마나고, 사회모순은 새롭게 야기되고, 그 결과로 민족모순은 더욱 심각해질 것이오. 그게 다 군정 3년이 남긴 것들이오. 미군은 철수했지만 군정은 끝난 것이 아니라 형태를 달리해서 계속되도록 되어 잇는 게 우리의 실정이오.

(5318페이지)

 

 

 10월로 접어드는 가을은 들녘에서 농익어가고 있었다. 검푸른 초록빛으로 출렁이던 들녘은 어느덧 황금빛으로 변해 묵직한 흔들림을 보이고 있었다. 바람은 같은 바람이 불어가도 그 바람을 맞는 여름의 들판과 가을의 들판 모양은 완연히 달랐다. 여름들판이 잔잔하게 물결 이는 초록의 바다라면 가을들판은 묵직하게 흔들리는 황금의 도가니였고, 여름들판이 처녀의 몸짓이라면 가을들판은 임산부의 몸놀림이었고, 여름들판이 까르르 웃는 아이들의 웃음이라면 가을들판은 허허허 웃는 어른들의 웃음이었다. 포구의 갈숲도, 산의 나무들도 아직 싱싱하게 푸르렀으므로 들녘의 황금빛은 유별나게도 두드러져 보였다. 벼만 익어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기름기 돌고 살 오르는 계절이었다. 뱀도 개구리도 메뚜기도 미꾸라지도 가을볕 속에서 살쪄가고 있었다. 새보기가 고비를 넘기게 되자 아이들은 메뚜기잡이와 미꾸라지잡이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메뚜기는 저희들을 위한 요기였고, 미꾸라지는 어른들을 위한 수고였다. 물론 좀피가루 냄새 상큼하고 진한 국물맛 고소한 추어탕을 아이들도 한 그릇씩 안 먹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추어탕은 어른들이 유독 좋아해서, 미꾸라지를 잡아가면 어머니가 반색을 하며 좋아할 뿐만 아니라 오랜만에 아버지의 웃는 얼굴도 보고, 칭찬도 듣게 되었다.

(5336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