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반역을 처단하지 못한 과오의 역사
우리에겐 그 기회가 딱 한 번 있었네. 친일반역자들의 처단은 해방이 된 그날부터 민중들의 손에 의해서 감행됐어야 했던 거야. 그자들은 거의 몸을 숨겨 스스로의 죄를 입증했으니까 골라내고 말고 할 것도 없었지. 미군이 점령하기 전까지 우리 민중들에겐 20일이 넘는 절호의 시간이 주어져 있었지. 거기다가 건준이 신속하게 조직구성을 했지. 그런데 민중들도 그 아까운 시간을 허송했고, 건준도 전국 방방곡곡에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민중조직을 결속시켜 그 일을 단행하는데 소홀히 하고 말았어. 그나마 나라나 민족을 생각한다는 사람들이, 친일세력을 제거하지 못한 것이 미군의 비호 때문이라고 쉽게 말해 버리는데, 물론 미군이 우리 민족문제에 개입해 저지른 범죄야 엄연하고 용서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에 앞서 우리들 스스로는 그 기막힌 20일 동안을 뭘 했느냐고 냉정하게 우리 스스로를 비판해야 한다 이거네. 난 그때를 계기로 우리 민족이나 민중들의 의식과 역량을 새삼스럽게 회의하게 되었고 여운형을 기본적으로 불신하게 됐지. 만약 불란서 국민들이 우리 같은 상황이었으면 그 20일을 우리처럼 허송했을 것인가를 생각하며, 과연 우리 민족에게 혁명을 수행할 능력이 있는가를 회의하지 않을 수가 없었네.
물론, 예기치 못했던 해방이 너무 갑자기 와 민중들은 얼떨떨한 상태에서 우왕좌왕하며, 그 중요한 시간을 놓쳐버렸고, 일본 경찰은 계속 무장상태에 있었으며, 건준에서는 미군점령에 대비한 국가기구를 만드느라고 그 문제를 처리할 시간이 없었다고 할 수 있겠지. 또 어떤 창백한 인도주의자는 법적 처벌기준도 없이 그 짧은 기간에 어떻게 그런 엄청난 일을 하라는 거냐고 공박할 수 있겠지. 그럼, 일본놈들이 우리 민족을 살해하고 착취할 때 어떤 법적 기준을 가지고 했던가. 제멋대로 아니었는가 말야. 그런 일본놈들에게 붙어서 그놈들과 똑같은 만행을 자행한 민족반역자들을 처단하는데 무슨 법이 필요했단 말인가. 우리에게 해방의 의미는 외적으로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이었고, 내적으로 민족혁명의 시작이었던 것이네. 민족혁명이란, 민족반역자를 남김없이 처단하는 인간혁명과 사회제도 전반을 뒤엎어 새로 창출하는 정치혁명, 그 두 가지가 평행적으로 완성되는 걸 말하는 것이지. 혁명은 개조도, 개선도, 변모도, 변화도 아니야. 완전한 새로움의 탄생이야. 그러므로 혁명은 혁명 그 자체가 법이야. 그러나, 민족반역자들을 극형처단해야 하는 근거가 꼭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댈 수 있지. 일본놈들이 36년에 걸쳐 직접 살해한 우리 동포의 수가 얼마며, 착취를 해서 굶어죽게 한 간접살해는 또 얼마인가를 따져보세. 수백만 명 아닌가. 민족반역자들을 대략 150만으로 추산하고 있는데, 일제치하에서 죽어간 동포의 수를 300만으로 줄여 잡더라도 그놈들은 하나 앞에 두 사람씩을 죽인 게 아닌가 말야. 그런 살인자들을 어찌 그냥 살려둘 수가 있겠나. 그런데 우리는 그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렸고, 미군에게 점령당했고, 오늘날과 같은 엉망진창인 꼴이 되고 말았지. 그리고 ‘혁명’이라는 말만 써도 좌익으로 몰아붙이는 우습지도 않은 상황이 되지 않았나. 더구나 특위까지 저리 되고 말았으니 이제 끝장난 나라 아닌가.
분단도 강대국의 책임이다 하고 앉았는데 다 넋 나간 작자들이야. 미국놈들이나 소련놈들이나 다 우리 땅 집어삼키려고 들어온 도둑놈들인데 도둑놈들이 무슨 책임을 지느냐 그말이야. 책임이야 주인한테 있는거지. 아까 말한 대로 우리가 해방되자마자 친일반역자들을 모조리 말살했어 봐, 미국이고 소련이고 자기네들 뜻대로 못했어. 민족이 이미 한덩어리가 된데다가, 속으로 붙어먹고 싶은 자들이라도 잘못 붙어먹었다간 친일반역세력들처럼 또 죽어가야 한다는 걸 아는데 누가 감히 붙어먹겠나 말야. 추종세력이 없는데 그놈들이라고 도리가 없는 일 아닌가. 목적을 포기하고 물러가야 하고, 우린 떳떳한 자주 독립국가를 세우는 거지.
불란서 국민들이 우리 같은 상황이라면 보나마나 가차없이 비질을 해버렸겠지. 2차 대전이 끝나고 그들도 우리와 비슷한 상황 아니었나. 나치스 협조자, 레지스탕스 밀고자부터 처단하지 않았나. 그들은 우리와 달라. 인종이 우월하다는 게 아니라 역사가 달라, 그들은 인간의 삶이 바로 역사고, 역사는 인간의 힘으로 뒤바뀌고 창조된다는 것을 알고 믿어. 그런 체험을 했으니까. 혁명을 일으키고 성공시켰거든. 우린 그런 역사 경험이 없어. 그러니 역사에 대한 존엄도, 신뢰도, 책임도, 냉엄도, 두려움도 아무것도 없어.
조정래 / 태백산맥 5권에서(190~195페이지)
* 위 글 제목 ‘친일반역을 처단하지 못한 과오의 역사’는 독자가 임의로 정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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