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 소설

조정래 / 태백산맥7 중에서

송담(松潭) 2014. 12. 9. 13:28

  

조정래 / 태백산맥7 중에서

 

 

 

 그러니까 일본에서 들었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아, 거 뭐랬지? 무지하고, 더럽고, 게으르고, 그리고....

 거짓말 잘하고, 도둑질 잘하고, 그 담에가... 응 그렇지 무질서 하지.

 그래, 맞았어. 야만인의 조건을 골고루 다 갖춘 셈이지.

 

 그것은 일본놈들만 지껄여댄 소리가 아니라 황국신민. 내선일체를 선봉장으로 부르짖어댄 소설가 이광수라는 자가 뻔질나게 글로 써댄 내용들이었다. 민족계몽이라는 미명을 내걸고 이광수가 저지른 그런 작태는 악의적으로 민족비하의 조항들을 나열한 것이었고, 상대적으로 일본놈들은 우리와 정반대라고 칭송하는 것이었으며, 그리하여 일본놈들이 전보다 더 우월감과 자신감을 갖게 하는 전기를 마련했고, 일본놈들이 우리 민족을 더욱더 맘 놓고 멸시하고 짓밟을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 사실을 일본놈들이 폭력적 관권을 행사하면서 끝없이 되풀이함으로써 그렇지 않아도 기죽고 주눅 든 조선인들의 의식 속에 자학적 자기비하가 뿌리박히게 했다. 그것은 개인적 열등감과 자신감 상실을 조성했으며, 전체적으로는 민족적 패배감과 민족의식 분열을 초래했다. 더구나 친일분자들이 일본놈들과 똑같이 역시 조선놈들은 어쩔 수 없다니까하는 식의 말을 아무 거리낌 없이 해됨으로써 자기비하는 대중최면현상을 일으키며 사회적 고정관념이 되어갔다.

 

 이광수는 거기서 그친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젊은이가 일본놈의 호의로 가정교사가 되는 것으로 소설 줄거리를 의도적으로 꾸며놓고는 그 일본놈 집안을 그려나가는데, 일본인들은 가족끼리도 인격적 예절을 빈틈없이 갖추고, 서로가 큰 소리로 떠드는 일이 없어 언제나 정숙을 유지하며, 집 안이 항상 청결하고, 부모가 자식들을 나무랄 때도 욕을 하는 일이 없이 품격을 지키고, 온 식구들의 기상과 취침시간이 어김없이 잘 지켜지고, 음식을 위생적이고 영양가 있게 만들 뿐만 아니라, 어린아이들까지도 조선사람에게 예의 바른 친절을 잊지 않는다고 강조하고 있었다.

 

 이광수는 또, 일본여자에 대해서는 얼굴이라고 쓰고, 조선여자에 대해서는 낯바닥이라고 구분해서 쓸 정도로 열렬한 친일을 솔선수범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해방이 되고 사회적으로 친일파들을 처단해야 된다는 여론이 비등해지자 그는 아직 독립도 되기 전에 남의 군정하에서 어떻게 친일파를 숙청하느냐, 우리 정부가 선 후에 논의될 문제라고 반대하는 글을 썼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국회에서 정식으로 반민법제정이 논의되니까 해방이 된 지 4년이나 흘렀는데 이제 뒤늦게 무슨 놈의 친일파 숙청이냐는 글을 썼다.

 

 난 말야, 너희들이 우리 민족에 대해서 어떤 잘못된 선입관이나 편견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별로 신경 쓰진 않는다. 그러나 너희들이 일단 우리 땅에 온 이상 우리 민족에 대해 알려면 똑바로 제대로 알아야 된다는 말만은 꼭 해두고 싶다. 너희들이 일본에서 들은 것들은 다 일본놈들이 악의적으로 조작한 모략이라는 걸 알아야 해. 일본놈들이 지금 가장 증오하고 있는 게 누군지 아나? 바로 너희들이야. 또 그놈들이 가장 억울해하는 게 뭔지 아나? 한반도를 지배할 수 없게 된거야. 그놈들이 너희들한테 굽실거리고 꼼짝을 못하는 건 겉으로만 그러는 것뿐이지 속까지 그러는 게 아니라는 것쯤, 정보를 다루는 너희들은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나? 우리 민족이 절대로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건 일본놈들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어. 우리가 얼마나 끈질긴 정신력으로 저항했고, 얼마나 지속적 행동력으로 투쟁했는지 그놈들은 직접 경험했으니까. 그런데 왜 그놈들은 너희들한테 거짓말을 했을까? 그건 첫째, 너희들이 자기네를 대신해서 우릴 맘 놓고 짓밟아주길 바라는 거지. 그리고 둘째, 그 결과로 너희들이 이 땅에서 실패하기를 바라는 거야. 너희들이 일본놈들의 그런 교활한 이중책략을 간파하지 못하고 그놈들이 꾸며댄 거짓말을 그대로 믿고 행동한다면 손해는 결국 너희들한테 돌아간다는 걸 명심해야 돼.

 

 너희들이 우리와 다른 건, 너희들은 민족이 없고 우리는 민족이 있다는 점이다. 너희들은 여러 인종들이 모여들어 국가라는 조직을 만들었고, 우리들은 하나라는 민족의 토대 위에서 국가를 만들었지. 그 차이가 뭔가 하면, 너희들은 수평적 연결만 있지 수직적 유대가 없어. 그러나 우린 그 두 가지를 다 갖추고 있는 거야.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너희들은 국가조직이 깨어지면 산산이 흩어지게 돼 있어. 만약에 너희들이 식민지지배를 받게 되어 미국이란 나라가 해체되면, 미국은 다시는 생겨날 수가 없어. 왜냐면 너희들은 또다른 국가조직으로 재편성되어 살아가면 그만이니까. 그러나 우리는 달라, 국가라는 수평조직이 없어져도 민족이란 수직조직으로 한 덩어리를 이루며 절대로 흩어지지 않아. 그 좋은 예가 바로 일본 식민지 치하를 끈질기게 투쟁하며 견딘 거지. 일본이 100년이 아니라 200년을 지배했어도 그 결과는 마찬가지야. 왜냐하면 우린 단일민족으로 5천 년을 살아온 역사전통이 있기 때문이지.

 

(7362~366페이지 중에서)

 

 그는 돌덩이를 매단 것처럼 마음이 가라앉아 가는 것을 느꼈다. 전쟁터에서 죽어간 사람들보다도 세상이 달라질 것을 믿으며 앞에 나섰다가 이제 부역죄로 당하게 될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이 더 문제였다. 여순사건을 계기로 반공이 강화되었던 것처럼 이번 전쟁을 계기로 반공은 더욱더 강화될 것이 틀림없었다. 인공 3개월을 통해서 공산주의 의식은 급속하게 일반화되었던 것이다. 그 일소를 위해서도 부역자 처벌은 가차 없을 것이고, 반공의 강화는 필연적인 일이었다. 악순환이었다. 삶의 악순환이고 역사의 악순환이었다. 지긋지긋한 일제치하의 기억이 생생한 채로 다시 이념의 격랑에 정신없이 휘말리며 부서지고 깨지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민중들이었다.

 

(7238페이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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