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 소설

성(性)에 대하여

송담(松潭) 2014. 12. 9. 17:10

 

()에 대하여

 

 

 

 송경희는 한사코 김범우와의 정사 기억만을 붙들려고 애썼다. 그 기억은 뜨거우면서도 시원하고, 황홀하면서도 명료해 걸음걸이를 한결 가볍고 수월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한 가지 난처한 점이 있었다. 얄궂게도 그 기억은 눈을 감고 서야만 환하게 재생되었고, 그 감각의 황홀함도 살아올랐다. 그 행위 자체가 눈을 감기게 하는 것이라서 그러는 것일까. 눈을 감고 걷노라면 그때의 안개밭 같기도 한 혼미함이, 꽃밭 같기도 한 현란함이, 별밭 같기도 한 찬란함이, 파도떼 같은 격렬함이, 여름 모래밭 같은 뜨거움이 남자의 숨결과 체취와 동작에 뒤섞여 휘돌고 맴돌고 소용돌이치는 것이었다.

 

 누가 성을 추하다고 했는가. 누가 성을 죄악시 했는가. 성만큼 깨끗한 아름다움이 어디 있는가. 성만큼 순수한 작업이 어디 있는가. 성만큼 진지한 몰두가 어디 있는가. 증류수가 제아무리 깨끗하다고 한들 성에 몰입되었을 때의 영혼을 당할 수가 있을까. 성에 몰입되었을 때는 육체만 있지 영혼은 없다고? 바보천치 같은 소리 집어치워라. 육체가 일으키는 그 온갖 미묘하고 야릇한 감각의 맛을 느끼고 식별하는 것이 영혼이 아니고 무엇이냐. 인간을 놓고 정신과 육체를 따로따로 떼서 말하려 하고, 특히 사랑을 말하면서 정신과 육체를 구분하는 것은 얼마나 억지고 아둔인가.

 

 정신과 육체는 공존하면서 서로 자극해서 사랑을 키우는 비료 역할을 하는 것이다. 애초에 플라토닉 러브라는 말을 만들어낸 자가 그것이 좋다고 떠들거나 깨끗한 척하는 것들은 모두가 성불구자 아니면 위선자들이다. 사랑한다는 것과 결혼이라는 것과는 마땅히 구분해야 하지만 사랑에서 정신과 육체를 구분하는 것처럼 멍청한 짓은 없다. 그 현명하고 똑똑한 서양 사람들이 어찌 그런 실수를 저질렀는지 모를 일이었다.

 

 사랑을 느끼는 남자와의 성행위, 그것처럼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진실이 이 세상에 또 있을 수 있을까. 사랑을 느끼는 남자의 성기가 나로하여금 발기하는 그 경이롭고 신비로운 수수께끼, 그리고 발기한 성기의 그 당당하고 굳센 모습 앞에서 허물어지고 주눅드는 마음, 마침내 그 모습만큼이나 거침없이 속살을 파고들 때 주저 없이 백기를 들어올리게되는 통쾌하고도 행복한 항복, 굴욕이나 모멸이 아닌 항복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신의존재. 그러나 신은 야속하다. 그 아름다운 성의 희열을 임신과 출산으로 갚게 하다니.

 

조정래/ 태백산맥(6331페이지)중에서

 

 * 위글 제목 ()에 대하여는 독자가 임의로 정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