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 / 태백산맥 중에서
심재모는 잠도 오지 않고, 그렇다고 혼자서 술을 더 마실 수도 없어서 전선의 하늘에 뜬 별들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이 남북을 다 합쳐 도대체 얼마나 될까. 저 별들만큼 많겠지. 휴전회담이 열리기 시작했는데, 이 상태에서 전쟁이 끝나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것뿐인데, 이 전쟁에서 이긴 것은 누구이고, 진 것은 누굴까? 원점으로 돌아와 끝나는 이 전쟁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리도 많이 죽어간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죽은 것인가? 속으로 시원한 대답을 얻을 수 없는 의문들이 잇따라 일어나고 있었다.
(9권 238페이지)
정치권력을 중심으로 해서 사회의 모든 분야들이 친일반민족세력에게 장악되면서 진보적 민족주의자들이나 양심적 사회개혁주의자들이 하나같이 반공논리에 몰려 무자비한 척결과 제거를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9권 289페이지)
지리산, 한량없이 크고 우람하고 골이 많은 산, 명산의 산신령들은 다 남자 형상인데 어찌 하필 지리산만 여자일까. 천왕봉 다음으로 높으면서 199리가 넘는 거리를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반야봉이 바로 그 여신령을 상징하고 있다. ‘반야’라는 말에는 불교적 의미 말고도 귀녀(鬼女)라는 뜻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반야봉은 흡사 여자의 봉긋하게 솟은 두 개의 젖무덤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그 전설대로 하자면 지리산은 여신령이 폭넓은 치마를 펼치고 있는 형상이 되었고, 그 수없이 많은 골짜기들은 그 치마의 주름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옛날부터 세상을 바로잡으려던 사람들은 형편이 여의치 못하면 그때마다 이 산으로 밀려들어 그 최후를 마쳤던 것인가. 남도땅에서는 제일 큰 산인 까닭이고, 더는 갈 때가 없는 마지막 산인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 지리산 골짜기들은 피신처였으며 도한 무덤이었다. 무덤의 둥근 모양은 자궁을 상징하는 것이고, 죽음은 태어났던 곳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의미라는데..... 지리산의 여신령은 자궁을 많이 지니고 의로운 사람들에게 죽음자리를 마련해 준 것인가.... 글쎄, 빨치산으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너무 추상적이고 비과학적인 생각이다. 어쨌든 지리산은 역사 위에서 투쟁하던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산이었고, 죽음을 맡긴 산이었다. 결국 지리산은 역사의 무덤이었다.
(10권 83페이지)
그런데 새해가 된 이틀째부터는 눈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남도지방에는 큰 눈이 그다지 많이 내리지 않고, 눈이 와도 오래 쌓여 있지 않고 쉽게 녹는다고 했다.
그건 들녘을 말하는 것이었다. 산에는 들녘보다 많은 눈이 내렸고 쌓인 눈은 잘 녹지 않았다.
눈이 퍼붓고 있었다. 바람도 불고 있었다. 눈발이 짙은데다가 바람까지 불어 산들은 눈보라에 휩싸이고 있었다. 바람을 타고 산에 내리는 눈발들은 들판에 내린 눈과는 사뭇 달랐다. 바람을 타고 들판에 내리는 눈발들은 바람이 불어가는 방향으로만 휘날리면서 바람의 세기만큼 차츰 옆으로 누었다. 그러나 바람을 타고 산에 내리는 눈발들은 휘돌아 솟고, 맴돌아 휘어지는 율동을 짓는가 하면 뒤엉켜 솟구치다가, 흩어져 미끄러져내리는 동작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었다.
눈을 퍼부어대는 구름이 낮게 끼어 산에는 낯어스름이 내려앉은데다가 눈발이 짙어 시야가 막혔고, 바람소리로 청각도 둔해졌다. 그런 속에서 울리는 총소리도 여느 때와는 분명 달랐다. 길게 끌리는 것도 같았고, 휘어져 늘어지는 것도 같으면서, 묘한 슬픔의 소리로 들리기도 했다.
(10권 114페이지)
백운산은 온통 눈으로 뒤덮여 백설산이 되어 있었다. 늘푸른 바늘잎의 나무들에는 소복소복하게 눈꽃들이 피어나 있었고, 잎 떨군 나뭇가지들에는 눈발이 휘몰아쳐온 쪽으로 눈옷을 입고 있었다. 살을 칼질해 대는 매서운 바람과 함께 눈은 날마다 내리고 있었다. 혹한 속에서 내리는 눈은 쌓이고 또 쌓였다. 그 눈 속에서 쫓기고 쫓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총소리들이 매운바람을 찢어대며 싸늘한 겹메아리를 일으키고, 하얀 눈 위에 뿌려지는 핏방울들은 처연하게 붉은 아픔이었다.
(10권 122페이지)
산자락 끝을 살짝 깔고 앉은 초가집들은 해거름의 적요 속에 서로를 벗하며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리고, 네댓 집의 처마 밑으로 푸르스름한 저녁연기가 퍼져흐르고 있었다. 고샅에는 아이들이 팔딱거리며 뛰어노는 콩알만 한 모습들과, 그런 아이 옆을 지나쳐가는 어른들의 모습도 보였다. 그 풍경 속에서는 아이들을 불러들이는 어느 아낙내의 긴 목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그지없이 아늑하고 그윽한 저녁풍경이었다. 조원제는 그 눈에 익은 정취에 곧 눈물이 날 것만 같은 심정이었다. 어디선가 자신을 부르는 어머니의 정겨운 목소리가 길게 들리고 있었다. 눈 아래 내려다보이는 작은 마을은 어머니의 품이었고, 두고 온 고향마을이었다.
(10권 218페이지)
진달래꽃이 지천으로 피어났다. 나뭇가지마다 새 움이 파릇파릇 돋아나고 있었다. 들녘이며 산들은 싱그러운 초록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햇발은 날로 두터워져갔다. 그 햇발 속에서 아지랑이의 아롱거리는 춤도 날마다 현란해지고 있었다. 아지랑이의 춤은 천지에 가득 차 숨이 막힐 지경이고, 무엇이든 아른아른 어지럽게 보이게 만들었다. 그런데 짙은 초록빛이 유난스러워 아지랑이의 아롱거림을 삭아내리게 하는 데가 있었다. 그건 보리밭들이었다. 보리는 이제 패고 있었다.
진달래꽃들은 산줄기를 타고 오르며 피어나고, 아지랑이는 신들린 혼춤인 양 어지러이 아롱거리고, 진초록 물감을 들어부은 듯한 보리밭들은 싱싱하게 넘실거리고, 보리밭에 깃을 친 종달새들은 아지랑이 아득한 창공으로 날아오르며 간드러지는 목청을 뽑아늘리고 있었다. 4월은 그렇게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4월은 그리도 시적 정서로 충만해 있었지만, 농촌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마저 끊일 것이 없어서 누르팅팅하게 부황이 들어가고 있었다.
아이들의 뼈마디 앙상한 삐쩍 마른 손에는 삐비가 한 웅큼씩 들려 있었고, 어쩌다 보이는 개들도 굶주릴 대로 굶주려 꼬리를 축 늘어뜨린 채 고샅을 비실비실 걸었다. 아직 양식으로 거둬들일 수 없는 보리를 바라 본 채 끼니를 끓일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 4월은 온갖 꽃들이 피어나고 온갖 새들이 우짖는 춘삼월 호시절이 아니라 배꼽이 등가죽에 달라붙는 굶어죽기 직전의 달이었다.
(10권 224페이지)
생각 똑바라지게 묵은 젊은 사람덜언 다 죽어뿔고 인자 나 같은 쭉짱이에, 지 욕심 채리는 것덜만 남었구만. 해방이 되고 이적지 8년 쌈에 죽기도 많이덜 죽었제. 쓸 만헌 사람덜 요리 한바탕씩 쓸어불고 나먼, 그만헌 사람덜이 새로 채와지자면 또 을매나 긴 세월이 흘러야 허는 겨? 인자부털 새로 낳는 자식덜이 장성해야 헌께 한시상이 흘러가는 세월이제. 그렇제, 갑오년 그 쌈에서 3.1만세까지가 시물다섯해고, 3.1만세에서 해방까지가 또 시물여섯해 아니라고. 인자부텀 또 그만한 세월이 흘르먼 워지 될랑고? 잉, 고런 심덜이 모타지겄제. 세월이란 것이 그냥 무심허덜 않는 법잉께. 나가 질게 살아옴서 보고 겪은 세월이 그랬어. 나도 참말로 징하게 오래넌 살았구만. 인자 나 같은 쭉쩡이부텀 얼얼렁 가야제. 그려야 새로 타고난 목심덜이 묵고 커날 것잉께. 복동이도, 동기도, 삼수도 없는 사랑방얼 혼자서 지키기도 인자 심파이는 일잉께. 살아올 기약이 없어진 사람덜잉께.
한 장수 노인은 눈물이 젖어드는 눈으로 길게 뻗어나간 방죽을 힘겨운 걸음으로 휘청휘청 걸어가고 있었다.
중도들판이 썰렁하게 비어버린 대신 포구에는 누렇게 변한 갈대밭이 풍성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 갈대밭은 찬 기운 서린 바람결이 스쳐갈 때마다 서로 몸들을 비벼대며 겨울숲이 우는 소리와 흡사한 소리를 포구의 물결 위로 실어보내고 있었다. 포구에 물이 실리고 있었다. 밀물 때는 물결이 커지고, 그 물결을 타고 작은 고기들이 몸을 실었다. 때맞추어 기러기때가 갈대숲 여기저기에서 날아올라 끼륵끼륵 소리하며 정연하게 날기 시작했다.
(10권 347페이지)
그는 가슴을 펴며 숨을 들이켰다. 그와 함께 밤하늘이 그의 시야를 채웠다. 그는 문득 숨을 멈추었다. 그는 눈앞이 환하게 열리는 것을 느꼈다. 그가 본 것은 넓게 펼쳐진 광대한 어둠이 아니었다. 그가 본 것은 어둠 속에서 수없이 빛나고 있는 별들이었다. 그는 멀고 깊은 어둠 저편에서 명멸하고 있는 무수하게 많은 별들을 우러러보았다. 가을별들이라서 그 초롱초롱함과 맑은 반짝거림이 유난스러웠다. 그 살아서 숨쉬고 있는 별들이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그 별들이 모두 대원들의 얼굴로 보였던 것이다. 먼저 떠나간 대원들은 죽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혁명의 별이 되어 어둠 속에서 저리도 또렷또렷한 모습으로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봉화가 타오르고, 함성이 울리고 있는 가슴에다 그 별들을 옮겨 심고 있었다,
끝 간 데 없이 펼쳐진 어둠 속에 적막은 깊고, 무수한 별들의 반짝거리는 소리인 듯 바람소리가 멀리 스쳐흐르고 있었다. 그림자들은 무덤가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광막한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10권 마지막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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