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태백산맥3’중에서
이북을 소련군이, 이남을 미군이 점령하고 양쪽에 자기들 식의 정권을 세우려고 한 의도야 너무 자명한 것이니 더 말할 필요가 없겠네. 그런데 미소가 서로 자기네식 정권을 세우는데 있어서 차이점을 보였으니, 그게 중대한 문제네. 그 차이점이란 공산주의다. 자본주의다 하는 체제의 다른 점이 아니라 그 체제를 꾸미는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를 말하는 것이네. 이북은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을 완전하게 정치적 사회적으로 숙청을 단행해 버렸네. 그래서 50만이 넘는 친일반민족주의자들이 삼팔선을 넘어 이남으로 도망나왔다네. 그런데 이남에서는 이북과는 반대로 오히려 친일반민족주의자를 옹호하고 보호하며, 그들을 핵심세력으로 해서 정권을 세워나갔네. 그 차이란 뭔가?
한쪽은 절대다수의 민중들이 권력기반을 이룩했는데, 다른 한쪽은 극소수의 반민중들이 또다시 다수민중들을 노예화한 것이네. 다시 말해 그것은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 순리와, 그 물을 낮은 데서 높은 데로 거꾸로 흐르게 하려는 역리와의 차이다. 그 말이지. 그 차이에 따라 당연하게 나타난 현상이 이북의 전면적인 토지개혁 단행과 이남의 법조차 아직까지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처사 아니겠나?
군정이 그런 역리를 저지르면서 야기된 사회적인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자네가 알고자 하는 문제로 국한시켜 살펴보자면 1946년 10월부터 11월까지 두 달 동안 일어난 대대적인 민중봉기를 들어야겠지. 예 대구에서 일어난 10.1폭동을 말씀하시는 것 아니신가요. 맞네. 10.1폭동이라.....그래 자네가 군인이니까 그렇게 부르는 것을 이해해야겠지. 명칭에 대해선 내 이야기를 먼저 듣고 나서 생각해 보도록 하세. 농민들이 주축이 되고, 학생이나 선생들까지. 그러니까 민족적 양심과 사회적 정의를 가진 모든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일어난 그 사건은 미군정에 대한 전체적인 항거인 동시에 미군정 정책의 전면적인 실패를 입증한 것이었네. 친일반민족세력을 옹호하다 보니 그들의 반대에 부딪혀 토지개혁이거나 농지개혁은 실행할 수가 없지. 그러면서 미곡수집책을 강제로 단행해서 민중들의 생활은 도탄에 몰아넣지, 친일반민족세력의 횡포는 날로 심해져가지, 이런 군정에 대해 모든 민중들의 불신감은 깊어질 대로 깊어지고, 불만은 쌓일 대로 쌓여 터지고 만 것이 바로 그 사건이네.
그 사건이 일어나면서 외치는 구호들이 다양했는데 그것을 간추리면 세가지야. 첫째가 미곡수집을 없애고 토지개혁 단행하라는 생존권과 직결된 문제였고, 둘째는 조선은 미국의 식민지가 아니라는 민족의 자존심과 연결된 문제였고, 셋째가 경찰이나 포악한 지주들을 표적으로 삼는 친일반민족세력의 척결 문제였지. 그 세가지는 군정이 안고 있는 현실적인 정치문제였던 거야. 민중들은 무서운 기세로 일어났는데, 그 큰 규모로 보거나 그 치열하게 싸운 도로 보거나 그건 단순한 사건이 아니었어. 그것은 군정을 상대로 한 일종의 전쟁이었지. 나도 그 틈에 낀 한 사람으로서, 미군들이 행사한 폭력은 가관이었지. 완전히 적을 섬멸하는 식으로 탱크는 말할 것도 없고 비행기까지 하늘에 띄웠으니까. 미군이 점령군이고, 우리 땅을 식민지화하려는 의도를 숨김없이 증명했던 것이지.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죽은 사람들보다 몇 배가 부상을 당했고, 부상당한 사람보다 몇 배가 잡혀들어가 고문을 당했고, 그리고 수없이 감옥에 갇히게 되었네.
그 정황은 어느 모로 보나 내가 앞서 말했던 동학혁명의 재현이라고 해야 옳아. 그래서 내가 아까 10.1폭동이라 하지 않고 ‘민중봉기’라고 한 거네. 당시 신문들은 한둘을 빼놓고는 다 민중봉기라고 썼던 거지. 물론 경찰에서는 가담자들을 모두 좌익으로 몰아 상투적인 악의를 저질렀지. 그러나 좌익은 극소수였고, 거의가 순수한 민족애와 절박한 생존욕구를 가진 사람들이었지. 결국 그 봉기가 실패로 끝나자 미곡수집은 강행되었고, 경찰을 포함한 우익의 횡포는 앙갚음이라도 하듯이 날로 심해지면서 오늘에 이르렀네. 여기서 한가지 중요하게 지적할 대목이 있네. 그때 봉기가 궁지로 몰리면서 경찰에서는 젊은이들을 무작정 잡아들였는데, 그 위험을 피해 많은 젊은이들이 군대로 들어갔네. 그들의 상당수가 14연대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네.
(3권 178~180페이지)
이 나라는 지금 가장 중대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덮어놓고 있네. 식민지시대 지주들과 결탁해서 권력을 잡은 정부이기 때문이야. 지주치고 친일파고 민족반역자 아닌 자는 1퍼센트도 안 될걸세. 그들은 일제치하에서 누린 부귀와 지은 죄로 해방과 동시에 마땅히 모든 기득권을 박탈당해야 했고, 민족 앞에 사죄했어야 했네. 그리고 모든 소작인들은 일제치하에서 겪은 굶주림과 당한 고통을 대가로 마땅히 지주들의 소유를 분배받았어야 하네. 그런데 미국의 세력이 작용하고, 이승만은 집권야욕으로 민족을 배반하고, 지주계급들은 자기 방어를 위해 뭉쳐지고, 서로를 위해 상호작용을 일으켜 오늘에 이르렀네. 내가 크게 우려하는 바는 지주계급들로 이루어진 현 정권이 농민이나 반대세력권을 일본놈들 식으로 무작정 공산주의로 몰아가는 것이야. 그 방법은 모든 계층, 모든 분야의 친일파나 민족반역자들한테까지 퍼져나가 공산주의를 자기네들의 방어를 위한 적극적인 공격무기로 사용하고 있는 실정아닌가. 이거야말로 어불성설이고 주객전도야. 참으로 큰일 날 일이지. 일본놈들한테 배워도 못된 것만 배웠지. 일본놈들은 하나님 믿는 나 같은 사람도 공산주의자로 몰아댄 형편이었으니까. 농민운동에 가담한 농민들의 경우에는 더 말할 것이 없겠지.
물론 농민단체 중에는 공산세력이 이끌었던 게 있었어. 그러나 거기에 연관된 농민 전부를 공산주의자로 모는 건 위험천만한 경솔이고 악의야. 설령 그들이 공산주의적 구호를 외쳤다고 하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생존권을 보호하기 위한 소작쟁의의 수단일 뿐이었어. 그들이 마르크스 철학에 대한 신조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공산주의 사상으로 무장된 것도 아니야. 다만 감상적적이거나 소영웅적인 지식인이나 지하 공산조직이 그들을 이용했을 뿐이야. 지금도 형편은 마찬가지지. 당장 농지개혁을 단행해 논밭을 무상으로 분배해봐. 벌교지역을 예를 들더라도, 이번에 입산한 농민들의 90퍼센트는 아마 하산하게 될거야. 자기네들의 절대목적이 성취되엇는데 공산주의를 추종할 이유가 없지 않는가 말야.
현 정부는 그 간단명료한 원인해결은 하려하지 않고 공산주의만 척결하고 있어. 말이 해방일 뿐이지 정치하는 방식이나, 지주들이 그대로 군림하고 있는 것이나, 변하지 않는 소작조건이나, 그대로 일정시대의 연장인 게야. 그러니 소작쟁의가 계속될 수밖에. 친일파 지주계급들, 참 짐승만도 못한 족속들이야. 일제 때의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군정과 야합해서 더 부자가 되지 않았는가 말이야. 적산을 차지한 게 다 그들 아닌가. 그 부귀영화를 지키기 위해서 앞으로도 반대세력은 계속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이겠지. 이미 정치적으로 국토와 민족이 분단됐는데, 그것도 모자라 반쪽에서지만 민족분열까지 조장하고 있는 거야. 이런 식으로 나가다간 점점 더 문젯거리가 생길 거야. 이 나라 장래가 큰 걱정이네. 책 냄새 그득한 방에는 침묵이 한 겹씩 내려앉고 있었다.
(3권 181~182페이지)
백범이 좀더 나라의 장래를 길게 내다보고 지난 선거에 참여해 국회를 장악한 다음 이승만의 독주를 견제했어야 한다는 비판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그래, 백범이 우남보다 정치역량이 한 수 낮다. 백범은 우남에 비해 국제정치 기류의 파악능력이 모자란다. 백범은 혁명자일 분이고 정치가는 역시 우남이다. 별의별 말이 많지. 허나, 그런 대조 비교는 양지 쪽만 찾아 혈안이 된 현실주의자들의 얄팍한 입놀림에 지나지 않는 것이네. 백범과 우남은 민족관이나 국가관이나 정치관이 당초부터 판이한 극과 극이었으니 대조하고 비교하는 것부터가 어불성설일세. 두 사람의 차이는 신탁통치 반대서부터 확연하게 드러났네. 백범의 반탁은 또다른 형태의 식민지 상황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고 우남의 반탁은 자신의 집권욕구를 하루라도 빨리 앞당기려 함이 아니었나. 여기서부터 백범은 대의명분의 길을 택했고, 우남은 반역사적 소아이익의 길을 택했네.
(3권 245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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