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태백산맥2’중에서
모든 인간은 역사의 중심에 있고자 한다. 그것은 곧 지배의 욕구다. 그러나 그 누구도 역사의 중심에 있을 수 없다. 역사가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역사의 생리는 수은주 이하의 냉철한 비판이기 때문이다. 역사선생의 말이었다.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무산자혁명, 그것이야말로 역사의 그늘이나 역사의 변두리로 내몰린 사람들을 역사의 중심에 서게 하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고자 함이 아닌가. 봉건주의의 지배층과 제국주의의 부유층을 몰아내고, 그래서 계급 없는 사회를 건설했는데도 역사는 중심에 서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인가. 수은주 이하의 냉철한 생리로 가진 역사의 정체는 무엇인가. 역사는 사회주의의 어떤 점을 비판하게 될 것이며, 사회주의자들은 어떤 잘못으로 비판을 받아 역사의 중심에서 밀려나게 될 것인가.
(2권 88페이지)
한반도의 해방군이 아니라 분명 점령군의 태도로 남쪽 땅을 장악한 미군은 군정을 실시하면서 치안유지를 한다는 구실 아래 일제치하의 경찰근무자나 그 앞잡이들을 중추로 해서 경찰조직을 재구성했던 것이다. 미군정의 이러한 처사는 미 제24군단장이며 주한미군사령관인 하지 중장이 1945년 9월 2일 삐라로 뿌린 첫 포고문에서 「.... 일본인 및 미 상륙군에 대한 반란행위는 용납하지 않겠다.」고 명백하게 밝힌 것과 맥이 통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포고문에는, 형식적이고 입바른 인사치례 잘하는 그들답지 않게 조선의 해방을 축하한다거나 조선인이 되찾은 자유를 경하한다는 상투적인 인사 한마디 없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경직된 경고만을 나열해 놓고 있었다. 어쨌거나 미군정의 은혜로운 조처에 의해서, 일제치하에서 저지른 죄상으로 마땅히 처단되거나 단죄를 받아야 될 고등계 형사나 순사, 순사보, 밀정 노릇을 했던 부류들이 다시 권력을 행사하게 된 것이다. 그것도 일제치하에서보다 한두 계급씩 더 승진된 상태로서 였다.
(2권 110페이지)
남북분단의 원인과 그 운명
2차대전 종전 무렵에 세계적 정치상황은 윌슨이 위장적이나마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했던 시대는 이미 아니었습니다. 그 시대의 주역이 식민주의의 대표적인 국가인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이었다면 2차 대전 종전 무렵에는 그 주역이 미국과 소련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식민지 국가들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항쟁을 계속해서 벌린데다, 독일의 침략을 받음으로써 식민주의 국가들은 협공을 당하는 이중적 상황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의 한편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킨 소련이 그 세력을 팽창시켜 나가고 있었고, 자본주의 국가 형성을 완성시킨 신생 미국은 그 힘이 갈수록 세계적으로 확대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미국은 2차 대전에 참전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궁지에 몰리고 지쳐 있었기 때문에 미국은 자연스럽게 연합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소련도 뒤늦게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하게 되었습니다. 서로 상반된 이념을 추구하면서도 그들이 동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독일과 일본의 위협으로부터 서로를 방어하고자 하는 공동목적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실리적인 결합이었고 일시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세계를 무대로 삼아 자신들의 이념을 확장시키려는 서로 다른 꿈을 속으로 감추고 있었습니다. 2차 대전 종전 전에 그들은 이미 그 준비를 했던 것이고, 종전과 동시에 그들은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그들의 이념 팽창주의가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이 바로 우리나라의 분할점령입니다. 우리나라의 분할점령은 독일의 분할점령과는 전혀 그 성격이나 의미가 다릅니다. 미국과 소련이 전범국인 독일을 분할점령한 것은 승전국으로서 전리품을 처리하는 당연한 권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그런 권한은 또 하나의 전범국인 일본에게 행사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그들은 우리나라를 분할점령하고 말았습니다. 미국의 팽창주의는 소련의 팽창주의가 일본까지 미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연합국의 헤게모니를 쥐고있던 미국은 특히 일본 문제에 있어서는 발언권이 절대적이었죠. 일본을 도맡다시피 해서 싸운 것이 바로 미국이니까요. 그래서 미국은 일본열도를 독일식으로 나눠먹지 않고 독식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건 태평양으로 뻗치는 소련의 힘을 견제하는 동시에 태평양 전체를 장악할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의 세력을 형성하는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그 계획에 따라 당연히 한반도 분할이 필요했고, 독일에서와는 달리 일본 쪽에 전적이 미미한 소련은 한반도의 반이나마 차지하는 것에 동의한 것입니다. 그들은 처음에 ‘일본 지상군의 항복을 받기 위해’ 한반도에 진주하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웠고, 뒤이어 ‘통치능력이 생길 동안 신탁통치’를 해주겠다는 일방적인 결정을 내렸습니다. 해방을 갈망해 왔고, 독립국가 건설을 열망하는 우리 민족의 뜻과는 정반대의 상황이 전개된 것입니다.
두 나라의 점령군을 맞으며 우리는 새로운 역사의 시련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첫째, 두 강대국이 내세운 명분을 무산시킬 수 있도록 일사분란한 민족적 단합을 보여야 했습니다. 둘째로, 그들의 정치적 도구가 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며 제2의 독립운동을 전개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첫째도 실패, 둘째도 실패함으로써 식민지 상황보다 나을 것 없는 분단국가를 만드는 데까지 오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오늘과 같은 정치, 사회적 혼란과 자체분열을 일으키는 민족적 희생이 야기되게 되었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이 남북협상을 떠나기 전 그 앞을 가로막는 군중들에게 ‘여러분, 나에게 마지막 독립운동을 허락해 주시오’ 한 말은 우리 민족의 행동방향을 단적으로 제시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 해방은 식민지시대의 종식이 아니라 새로운 식민지시대의 개막이었습니다. 전 시대에는 일본을 공동의 적으로 삼는 민족적 명제나 자존이 있었습니다만, 이제는 백인들이 만들어낸 이즘이라는 것에 체면이 걸리고 마취되어 우리끼리 적을 삼아 살육을 자행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해방 후부터 지금까지는 시작에 불과합니다.
이즘을 일단 정치도구화 한 이상 상호 양보는 있을 수 없습니다. 정치적 실현을 위한 상호 상승작용만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 정치생리이며 힘의 역학입니다. 벌써 서로를 괴뢰라고 공공연하게 욕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유치하고 졸렬하고 파렴치한 짓들입니까. 그러나 그 뻔뻔스러움과 무모함과 이율배반이 곧 우리의 정치현실입니다. 비판이나 선택이 용납되지 않는 획일적인 모순의 질서에 줄을 맞춰야 하는 것이 앞으로의 우리의 길입니다. 그 줄에서 이탈하는 자는 적이고, 적은 처단하는 논리만이 절대적일 뿐입니다. 이 현실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확실한 것은, 다만 시작이라는 것뿐입니다. 미소의 세력에 우리가 아무리 민족적으로 단결해서 대항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부류들이 서로 양쪽의 정치집단을 형성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 편가름은 앞으로도 무수한 인명의 희생을 요구할 것입니다.
(2권 302~304페이지)
* 위 글 제목 '남북분단의 원인과 그 운명'은 독자가 임의로 정하였음.
외서댁의 울음
「흐흐흐, 내 눈이 보배는 보배여 보기 존 떡이 묵기도 좋드라고 외서댁을 딱 보자말자 가심이 찌르르허드란 말이여. 고 생각이 영축웂이 들어맞어뿌렀는디, 쫄깃쫄깃한 것이 꼭 겨울꼬막맛이시」
맥 풀려 흐늘거리는 남자의 말이었다. 그 끈적거리는 것 같은 목소리가 몸을 친친 감아오는 것 같아 외서댁은 또 진저리를 쳤다.
「존 일 헌다고 인자 싸게 가씨요.」
외서댁의 목소리에는 울음이 섞여 있었다.
「찬물이나 한 그럭 떠오소」
남자의 태평스러운 목소리였다.
「워쪄실라고 이러요. 금메.」
외서댁은 애가 달아 남자 쪽으로 황급히 돌아앉았다. 그러나 그녀는 질겁을 하며 되돌아앉아야 했다. 남자는 그때까지 옷을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번듯이 누워 있었다.
「더 있으라고 붙들어도 가야 쓰겄음께 얼렁 찬물이나 떠오소.」
외서댁은 귀가 번쩍 뜨여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방문을 열고 쪽마루로 나서자 찬 새벽 기운이 섬뜩하게 몸을 감아왔다. 그것이 남편의 화가난 손길처럼 무섭게 느껴졌다. 그리고 어둠 여기저기에 남편의 눈길이 숨겨져 있는 것만 같았다.
남자는 물 한 사발을 단숨에 들이켜고는 담배를 빼물었다.
「한숨 늘어지게 자야 헐 것인디, 외서댁이 그리 애타해싼께 담배나 한대 꼬실리고 떠야 쓰겄구마.」
남자는 담배연기를 푸우 내뿜으며, 고개를 숙이고 옆으로 돌아앉아있는 여자를 아슬한 눈길로 건너다보고 있었다. 저것이 얼굴만 이쁜 것이 아니라 몸도 오목조목허니 이쁘고, 니노지는 쫄깃쫄깃한 것이 더 이쁘단 말여, 저것 조갑지가 그 말로만 듣던 그것이 아닐랑가 몰라? 다방 화자년 것이나 남원장 경월이년 것허고는 댈 것도 아닌디.
「자아, 자네 소원대로 이만 가야 쓰겄네. 또 보세.」
남자는 담배를 입에 문 채 방문을 열었다. 외서댁은 바삐 뒤따라나가 선반에 올려놓았던 남자의 구두를 내렸다.
「어허 참, 구두에 서리 앉을까 무서 선반에 올려뒀드랑가. 외서댁은 맘씨할라 이쁘시웨」
외서댁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아 겁먹은 눈길로 사방을 빠르게 살폈다. 새벽의 정적 속에 남자의 거리낌 없는 목소리는 너무나 크게 울렸던 것이다.
「시상에, 누가 듣겄소.」
외서댁은 주먹으로 허공을 치며 안타깝게 말했다. 요런 문딩이 겉은 인종아, 니눔이 머가 이뻐서 구두럴 선반에 올렸을끄나. 니눔 구두에 서리가 앉으면 워쳤고, 똥이 묻으면 워쳤냐. 넘 눈에 들킬까 무서 선반에 올렸제 니눔 위해서 한 일인지 아냐. 구렝이보담도 징허고 징헌 눔아.
「또 보세.」
남자는 이 말을 남겨놓고 주의하는 기색이라고는 전혀 없이 저벅저벅 구둣발소리를 내며 사립을 나섰고, 고샅길을 걸어가는 소리가 한참이나 들렸다. 저벅거리는 구둣발소리가 울릴 때마다 외서댁의 가슴은 한치, 한치 졸아들고 있었다. 가다가 뒤져뿌러라. 가다가 허방 디뎌 다리몽뎅이 뿐질러져 뒤지든지, 천벌 받아 급살얼 맞어 뒤지든지, 팍 뒤져뿌러라. 신령님, 도와주십소사. 저놈이 또 보자고 헌 것 본께 또 올 모양인디, 워째야 쓸께라. 신령님, 저눔헌테 벌얼 내려주십소사. 저 인종이 더는 못 오게 벌얼 내려주십소사. 외서댁은 어느덧 가슴 앞에 두 손을 모으고 서 있었다.
방으로 들어온 외서댁은 어린것을 품고 엎드렸다. 그제야 눈물이 쏟아졌다. 남편에 대한 죄스러움과 원망이 함께 어우러지며 솟구치는 눈물이었다. 애아부지, 워디서 멀 하고 있간디 나가 요런 꼴을 당하게 맹그요. 머 헐라고 공산당은 혔습디여. 이리 몸 더럽혀뿌렀는디 당신이 원허는 시상 오면 무신 소양이 있겠소. 나는 인자 워째야 쓸께라. 죽어야 헐지 살아야 헐지 대답 잠 해봇씨요. 외서댁은 머리가 아프도록 울었다.
(2권 39~40p.)
* 위 글 제목 '외서댁의 울음'은 독자가 임의로 정하였음.
독립투쟁자가 공산주의자로
조선인민공화국 선포에 따라 건준지부는 인민위원회로 바뀌면서 새 나라 세우기는 거침없이 이루어져갔다. 일체의 친일반민족세력이 제거된 상태에서 민중들은 인민위원회에 적극적으로 호응했고, 인민위원회를 맡은 책임자들은 민중들을 위해 헌신했다. 지주나 유지가 인민위원회에 개입한 경우는 김사용 같은 양심적이고 신망 있는 사람에 한했다. 읍이나 면단위에서 그들의 죄상 유무를 가려내는 데는 새로운 심사나 기준이 하등 필요하지 않았다. 읍민이나 면민들이 먼저 다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거침없고 막힘 없던 새 나라 세우기는 미군의 점령과 함께 실시된 군정의 조선인민공화국 부인으로부터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군정의 인공 부인은 혁명적 인민의 나라를 파괴하는 1단계 공작이었다. 그리고 미군정은 연속적으로 파괴공작을 펴나갔다. 각 지역으로
군정중대를 파견한 것이 2단계 공작이었고, 그 조직을 이용해 반민족세력인 경찰과 관리를 재등장시킨 것이 3단계 공작이었다. 그리고 경찰을 무장시킨 다음 모든 지역에서 인민위원회를 강압적으로 해체시켜 나간 것이 4단계 공작이었다. 따라서 인민위원회 해체를 가속화시키기 위해 공산당 활동 불법화와 동시에 체포를 감행하기 시작한 것이 5단계 공작이었다.
공산당의 합법활동은 지하활동으로 전환될 수밖에 없었고, 인민위원회 조직이 다 깨어진 상태에서 대부분의 간부들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자신도 예외일 수 없었고, 감옥에 가서 보니 해방이 되고 풀려난 독립투쟁자 3분의 2가 다시 잡혀들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정하에서 경찰질을 해먹었던 자들의 손에 다시 잡혀들어온 그들의 죄목은,일본이 미국으로 바뀌었을 뿐인 것처럼 ‘독립투쟁자’에서 ‘공산주의자’로 비귀었을 뿐이었다.
(2권 P.95~96)
* 위 글 제목 ‘독립투쟁자가 공산주의자로’는 독자가 임의로 정하였음.
「염병, 우리 시상이 오긴 와야 헐 것인디.」
하대치는 꽁초를 논바닥으로 튕기며 중얼거렸다. 논바닥에는 낫질을 당한 벼 그루터기만 남아 말라가고 있었다. 산간지대의 논이라 한 뙈기마다 층을 이루고 있었고, 논두렁이라는 것이 발 한 짝 제대로 놓을 수 없이 폭이 좁은데다가 구불구불 뱀 형상을 하고 있었다. 저런 논에서 쌀이 나면 얼마나 날 것인가 싶어 한심스러웠고, 그런데도 시끌시끌한 시국과는 상관없이 이미 추수를 끝냈음이 더욱 한심스러워 하대치의 가슴에는 찬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찬바람 속에 자신의 몰골이 불현듯 드러났다. 자신은 저런 한심스런 땅뙈기나마 한 뼘 가진 것이 없다는 자각이었다.
땅, 땅, 그것은 무엇인가. 그건 먹고 사는 근본이었다. 농사꾼에게 그것은 분명 명줄이었다. 그런데 이 세상의 농토라는 농토는 모두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임자가 결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소작인이 될 수밖에 없었고 소작인으로 제아무리 피땀을 흘려도 평생 소작인 신세를 면할 수가 없었다. 지주들이 제멋대로 만들어놓은 법이라는 것이 그렇게 돼먹어 있었다. 사람이 한평생을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실낱 같은 것일망정 희망이라는 것이 있어야 고생도 참고 고통도 견디는 것이다. 그런데 소작인으로 한평생을 산다는 것은 캄캄절벽이었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아버지의 신세가 바로 자신의 신세였던 것이다.
그렇게는 살고 싶지가 않았다. 도저히 그렇게는 살 수가 없었다. 짐승이 아니고 사람인 바에야 그렇게 평생을 살 수는 없었다. 그렇게는 살고 싶지가 않았다. 그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고 말리라는 결심으로 염상진을 따라 소작쟁의에 가담했던 것이다. 염상진을 뒤따르는 세월 동안 얻은 것은 감옥살이의 고초와 쫓기는 고생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이 결코 고통스럽거나 후회스럽지가 않았다. 그 치 떨리는 소작제를 깨부수고 새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만한 고생쯤 오히려 새로운 힘을 돋게 하는 자극이었다. 자신은 대장 염상진이 시시때때로 입에 올리는 공산주의에 대한 유식한 말을 빠뜨리지 않고 듣기는 했지만 다 머리에 담기지는 않았다. 마르크스가 어쩌고 무산자 인민대중이 어쩌고 하는 장광설을 한마디로 뭉뚱그리면 '지주계급 쳐 없애고 소작인 세상 만들자'가 아니냐고 나름대로 정리하고 있었다. 염상진에 대한 존경과 신뢰도, 그가 바로 그런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기 때문이었다.
「새끼덜 델고 고상이 많을 것인디 쪼매만 기둘리소. 우리도 요러타께 살 시상 맹글어놓고 말 것잉께. 나도 지끔 호강하고 사는 것이 아닝께.」
하대치는 마누라를 면전에 대하고 있는 것처럼 또렷하게 말했다. 그리고 양쪽 콧구멍을 번갈아 막아가며 코를 풀었다. 마누라와 새끼들 모습이 눈앞에 밟히며 콧등이 찡해졌던 것이다.
(2권 P.137~138)
「도대체 이념이 인간의 뭘 해결한다는 거야.」
자신의 부르짖음에 대답이라도 하듯 들려온 목소리였다. 그건 손승호의 말이었다. 한때 누구 못지않게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되었던 손승호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그렇게 외쳤다. 그건 분명 외침이었다. 손승호는 낮은 목소리로 냉정하게 말했지만 그건 분명 외침이었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자기의 생각하는 바를 굽히지 않은 그 말이 바로 외침이 아니고 무엇일 것인가. 염상진이 그의 이마에 권총을 겨누고서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은 까닭도 그 외침의 무게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는 이념이라는 것이 정치지향적 인간들이 만들어낸 허상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소. 변증법도, 유물론도, 봉건주의도, 공산주의도, 민주주의도, 모두 정치지향적인 인간들이 만들어낸 이기적인 지배도구일 뿐이오. 봉건왕조를 타도하고 세운 공산주의나 민주주의 사회가 도대체 절대다수 인간의 삶을 위해 한 것이 뭐가 있소. 그것들은 새로운 구속일 뿐이고 인간의 본질적 문제는 하나도 해결한 것이 없소. 공산주의나 민주주의는 20세기의 인간들이, 지배본능이 강한 인간들이 윤색해 낸 정치연극의 각본일 뿐이오. 그것들은 절대적일 수가 없소. 왜냐하면 모순투성이고 부정확한 존재들인 인간들이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오. 그것들은 인간이 갖고 있는 만큼의 모순과 부정확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해야 하오. 그러므로 그것들은 절대적일 수가 없고, 신봉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오. 그런데 그것들을 절대적 존재로 신봉하게 되면 그만큼 인간들을 불행하게 만들 것이오. 인간은 인간이 만든 기계가 아니오. 인간이 인간을 장담하는 것처럼 어리석음을 범하는 일은 없소. 나는 다만 인간이고 싶을 뿐이오.」
손승호는 완전무결하게 사회주의를 버린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상진은 손승호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하며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그가 사회주의를 버린 대신 자본주의를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정말 그가 다시 사회주의로 전향할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의 논리의 타당성을 인정했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옛정을 생각했기 때문일까.
안창민은 손승호의 생각을 이해해 주고 싶었다. 그의 말대로 인간은 인간이 만든 기계가 아니었고, 그가 파악하고자 하는 인간에 대한 인식 또한 하나의 가치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손승호에게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역사현실을 외면하고 있었고, 인간의 본질적 문제가 삶 자체라는 인식을 결여하고 있었다. 그런 추상적 관념에 지배되고 있는 손승호가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 땅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었다. 무인도에서 혼자 살기를 선택하지 않는 한. 그러나 그 생각을 염상진에게는 내색하지 않았다.
(2권 P.180~181)
신작로까지 넘쳐오른 안개를 밟으며 외서댁은 걷기에만 열중했다. 신작로에 박힌 돌에나 길가의 마른 풀잎에는 서릿발이 하얗게 돋아 있었다. 겨울이 닥쳐오고 있었다. 안개는 신작로와 방죽에 갇힌 듯이 중도들판에 가득 차 있었다. 아슴하게 넓은 안개밭 속에서 금을 그어놓은 듯 철로가 드러나 보였다. 하루에 두 차례씩 바닷물을 실었다가 부리곤 하는 포구를 끼고 있어서인지 중도들판의 늦가을 안개는 유난히 짙은 젖빛이었다. 포구에 끼는 안개는 햇솜발처럼 뭉클거리며 풀풀 날리는 기분인데, 들판에 끼는 안개는 떡고물처럼 바실거리면서도 겹겹이 쌓이는 묵직한 기분이었다.
(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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