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분단과 좌우대립
2차 대전 종전 무렵의 세계적 정치상황은 윌슨이 위장적이나마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했던 시대는 이미 아니었습니다. 그 시대의 주역이 식민주의의 대표적 국가인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이었다면 2차 대전 종전 무렵에는 그 주역이 미국과 소련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식민지 국가들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항쟁을 계속해서 벌인데다, 독일의 침략을 받음으로서 식민주의 국가들은 협공을 당하는 이중적 상황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의 한편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킨 소련이 그 세력을 팽창시켜 나가고 있었고, 자본주의 국가의 형성을 완성시킨 신생 미국은 그 힘이 갈수록 세계적으로 확대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미국은 2차 대전에 참전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궁지에 몰리고 지쳐 있었기 때문에 미국은 자연스럽게 연합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소련도 뒤늦게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하게 되었습니다. 서로 상반된 이념을 추구하면서도 그들이 동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독일과 일본의 위협으로부터 서로를 방어하고자 하는 공동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실리적인 결합이었고 일시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세계를 무대 삼아 자신들의 이념을 확장시키려는 서로 다른 꿈을 속으로 감추고 있었습니다. 2차 대전 종전 전에 그들은 이미 그 준비를 했던 것이고, 종전과 동시에 그들은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그들의 이념 팽창주의가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이 바로 우리나라의 분할 점령입니다.
우리나라의 분할점령은 독일의 분할 점령과는 전혀 그 성격이나 의미가 다릅니다. 미국과 소련이 전범국인 독일을 분할점령한 것은 승전국으로서 전리품을 처리하는 당연한 권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그런 권한은 또 하나의 전범국인 일본에게 행사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그들은 우리나라를 분할점령하고 말았습니다. 미국의 팽창주의는 소련의 팽창주의가 일본에까지 미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연합국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던 미국은 특히 일본 문제에 있어서는 발언권이 절대적이었지요. 일본을 도맡다시피 해서 싸운 것이 바로 미국이니까요. 그래서 미국은 일본 열도를 독일식으로 나눠먹지 않고 독식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건 태평양으로 뻗치는 소련의 힘을 견제하는 동시에 태평양 전체를 장악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의 세력권을 행사하는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그 계획에 따라 당연히 한반도의 분할이 필요했고, 독일에서와는 달리 일본쪽에 전적이 미미한 소련은 한반도의 반이나마 차지하는데 동의한 것입니다.
그들은 처음에 ‘일본 지상군의 항복을 받기 위해’ 한반도에 진주하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웠고, 뒤이어 ‘통치능력이 생길 동안 신탁통치’를 해주겠다는 일방적인 결정을 내렸습니다. 해방을 갈망해 왔고, 독립국가 건설을 열망하는 우리 민족의 뜻과는 정반대의 상황이 전개된 것입니다. 두 나라의 점령군을 맞으며 우리는 새로운 역사의 시련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첫째, 두 강대국이 내세운 명분을 무산시킬 수 있도록 일사분란한 민족적 단합을 보여야 했습니다. 둘째로, 그들의 정치적 도구가 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며 제 2의 독립운동을 전개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첫째도 실패, 둘째도 실패함으로써 식민지 상황보다 나을 것 없는 분단국가를 만드는 데까지 오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오늘과 같은 정치, 사회적 혼란과 자체분열을 일으키는 민족적 희생이 야기되게 되었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이 남북협상을 떠나기 전 그의 앞을 가로막는 군중들에게 ‘여러분, 나에게 마지막 독립운동을 허락해 주시오’ 한 말은 우리 민족의 행동방향을 단적으로 제시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 해방은 식민시대의 종식이 아니라 새로운 식민시대의 개막이었습니다. 전 시대에는 일본을 공동의 적으로 삼는 민족적 명제나 자존이 있었습니다만, 이제는 백인들이 만들어낸 이즘이라는 것에 체면이 걸리고 마취되어 우리끼리 적을 삼아 살육을 자행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해방 후부터 지금까지는 시작에 불과합니다. 이즘을 일단 정치도구화한 이상 상호 양보는 있을 수 없습니다. 정치적 실현을 위한 상호 상승작용만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 정치 생리이며 힘의 역학입니다. 벌써 서로를 괴뢰라고 공공연하게 욕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유치하고 졸렬하고 파렴치한 짓들입니까. 그러나 그 뻔뻔스러움과 무모함과 이율배반이 곧 우리의 정치현실입니다. 비판이나 선택이 용납되지 않는 획일적 모순의 질서에 줄을 맞춰야 하는 것이 앞으로의 우리의 길입니다. 그 줄에서 이탈하는 자는 적이고, 적은 처단하는 논리만이 절대적일 뿐입니다. 이 현실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확실한 것은, 다만 시작이라는 것뿐입니다. 미소의 세력에 우리가 아무리 민족적으로 단결해서 대항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부류들이 서로 양쪽의 정치집단을 형성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 편가름은 앞으로도 무수한 인명의 희생을 요구할 것입니다.
조정래/ ‘태백산맥2’에서
위 글 제목 ‘남북분단과 좌우대립’은 독자가 임의로 정하였음.
'조정래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단재 신채호와 우남 이승만 (0) | 2014.12.08 |
---|---|
‘태백산맥3’중에서 (0) | 2014.12.07 |
‘태백산맥2’중에서 (0) | 2014.12.07 |
'태백산맥1' 중에서 (0) | 2014.12.07 |
인간의 탐욕과 자만 (0) | 2014.09.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