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 소설 61

조정래 / ‘아리랑 3권’ 중에서

조정래 / ‘아리랑 3권’ 중에서 “아니, 지지리 가난한 조센징이 그런 호조건에도 말을 안 듣는단 말이오?" 하시모토의 눈째가 고약해졌다. “예 죽어도 딸을 첩으로 내놓지 않겠다고 에미가 고집을 부린답니다.”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요. 가난한 조선사람들은 딸을 부잣집에 첩으로 넘기는 건 예사로 하는 일 아니오. 그런데 쌀 50가마니 돈이 싫다니, 내가 일본사람이라 그러는 것 아니오?" ....... "나한테 한 가지 좋은 생각이 있긴 있소, 다른 게 아니고 마음에 있는 여자를 밤중에 몰래 자루에 넣어 업어오는 조선풍습이 있잖소. 그 방법을 쓰면 어떻겠소. 하룻밤 자버리면 꼼짝없이 내 여자가 되는 것이고, 돈이야 그 다음에 전하면 되잖소." "아이고, 그건 큰일납니다. 그 방법이야 과부한테 쓰..

조정래 소설 2021.04.28

번뇌의 불

번뇌의 불 “수절 중에 자식 없고 시부모 없는 수절이 질로 에롭고, 그 담이 자식은 있어도 시부모 없는 수절이고, 또 그 담이 자식 없이 시보모 뫼신 수절이고, 그 끝이 자식 키움서 시부모 뫼시는 수절이니라, 허나 당자가 당허는 맘고상이야 다 똑같다고 헌다. 열녀문 하나가 스자면 삼층장에 피묻은 솜이 가득 차야 헌다는 말이 안 있디냐. 그러자니 송곳으로 찔러댄 허벅지가 어찌 됐겄냐. 맘 강단지게 묵어라.” 남편의 사십구재를 지내고 나서 시어머니가 한 말이었다. 그때만 해도 그 말뜻을 잘 몰랐었다. 수절은 당연한 것이었고, 또 그렇게 어려울 것 같지도 않았었다. 그런데 1년상을 보내며 마음 허전함이 넓어져 갔고, 2년상을 지내며 외로움이 커져가는 것을 느꼈고, 3년상을 치르게 되면서 송곳이 왜 필요한지를 ..

조정래 소설 2021.04.23

조정래 / ‘아리랑 2권’ 중에서

조정래 / ‘아리랑 2권’ 중에서 그 사건의 전모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은 일본의 강압적인 고문정치에 따라 조선의 외교고문직을 차지하고 있던 스티븐스였고, 그를 쏘아죽인 사람은 조선인 청년 장인환이었다. 스티븐스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3월 20일에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과 회견을 했다. 그런데 그는 일본이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든 정당성을 역설하는 한편, 조선은 일본의 보호통치 아래서 나날이 경제발전을 이룩하고 있으며, 조선사람들은 많은 혜택을 받는 생활 속에서 일본의 통치를 환영하고 있다고 강조했던 것이다. 그 사실이 신문에 크게 보도되자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조선 사람들은 다같이 분노를 터뜨렸다. ‘내가 왜 스티븐스를 죽여야 했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스티븐스의..

조정래 소설 2021.04.23

조정래 / ‘아리랑 1권’ 중에서

조정래 / ‘아리랑 1권’ 중에서 20원에 생때같은 자식을 팔아먹은 것만 같고, 아들이 영영 돌아오지 못할 것만 같은 불길한 생각이 갈수록 가슴에 감겨들고 있었다. 그냥 20원이면 적지 않은 돈이었지만, 그 돈을 받고 바다 건너 수만 리 밖 미국인지 하와인지 하는 땅까지 아들을 보내기에는 너무 하찮은 돈이었다. 다달이 새끼를 치며 무섭게 불어나는 빚돈만 아니었더라면 아들을 그 어딘지도 모를 땅으로 절대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아덜얼 배 태와 보내고 빚얼 씻는지, 그것이 싫으면 딸얼 나한테 내놓든지, 좌우지간 양단간에 하나로 결정얼 내려, 나도 참는 것에 한도가 있제, 요번에넌 아조 뿌리럴 뽑고 말 참인게로" 빚쟁이 김가는 밤낮으로 찾아와 닦달을 해댔다. 그는 시퍼런 기세로 사람을 몰아대는 한..

조정래 소설 2021.04.18

차라리 죽자

차라리 죽자 해가 기우는가 싶으면 소슬바람이 일었다. 가을이 달음박질쳐오고 있었다. 감골댁은 지친 걸음으로 사립문을 들어섰다. 머릿수건이며 삼베 적삼에 먼지가 부옇게 앉아 있었다. 하루종일 품팔이 밭일을 한 흔적이었다. 집 안에는 아무 기척이 없었다. 스산한 바람결에 나뭇잎 몇 개가 토방 아래 구르고 있는 집 안은 썰렁하기만 했다. 좁장한 마루를 가운데 두고 방 둘에 부엌 하나가 딸린 그 흔한 초가삼간은 짙은 회색빛 지붕을 인 채 외롭게 가을추위를 타고 있었다. '대근아아-:" 감골택은 머릿수건을 벗으며 막내아들을 소리내어 불렀다. 네 아이들 중 그 누구도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감골댁은 집이 빈 것을 알면서도 막내아들을 불렀던 것이다. 오래된 습관이었다. 그런데 큰아들 영근이가 집을 떠난 다음부터는 그..

조정래 소설 2021.04.14

조정래 / ‘사람의 탈’ 중에서

조정래 / ‘사람의 탈’ 중에서 "알지야? 호랑이한테 열두 번 물려가도 정신만 채리면 살아난다는 말. 그려, 어디서든 정신 딱 채리고 관세음보살님만 염혀, 그러면 틀림없이 살아날 길이 열릴 것잉게. 꼭, 어쨌그나 꼭 살아와야 혀. 니는 이 집안 장자닝게, 장자!" 어머니가 손등이 으스러져라 쓰다듬고 또 쓰다듬으며 한 말이었고, "총알 피해 댕겨라." 아버지의 무뚝뚝한 한마디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머니 말보다는 아버지 말이 더 뚜렷하게 가슴에 새겨져 있었다. 투박한 것만큼 아버지의 말은 얼른 알아듣기가 쉽지 않았다. 총알을 피해 다니라니 그러나 사리에 맞지 않는 것 같은 그 말에는 얼마나 많은 말들이 담겨있는 것인가. 김경두는 아이가 둘이라고 했다. 열일곱에 장가를 들어 지금 스물한 살이니 ..

조정래 소설 2021.04.06

냉전시대가 끝난 한반도

냉전시대가 끝난 한반도 소련이 역사 속으로 사라져가면서 소련을 탄생시켰던 레닌의 동상들이 도처에서 땅바닥에 나뒹굴어지고 있었습니다. 달걀 하나 빵 한 쪽을 구하려고 꽁꽁 얼어붙은 동토를 수많은 군중들이 질정 없이 헤매는 혼란 속에서 새로 태어난 나라 이름이 '러시아'였습니다. '다시 러시아?' 갑작스러운 소련의 붕괴처럼 그 이름은 세상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혼란 속에서 대한민국은 기민하게 움직여 뜻밖의 성과를 이뤄냈습니다. 러시아와 수교하고 나섰고, 중국과도 수교한 것이 그것입니다. 그 돌발 사태야말로 냉전시대가 끝났음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증거였습니다. 그 사태에 소스라치게 놀란 것이 북한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러시아도 중국도 이제 적이 아니라 선린 이웃나라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조정래 소설 2021.04.01

50대에 제2의 삶을 살 수 있다면

50대에 제2의 삶을 살 수 있다면 요즘에는 40~50대에 '제2의 인생'을 찾아 회사를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평균 수명 120세 시대라면 중간쯤 되는 부분에서 다른 일을 찾아볼 만도 할 것 같은데요. 만약 선생님께서 지금 50대라면 하고 싶은 일이 있으신지요. 서신혜(40대,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글쎄요, 50대에 새 인생을 시작할 일? 그다지 쉬운 일 같지는 않군요. 그때까지 경제력이 얼마나 확보되었느냐가 새로운 선택의 결정적 요건이 되지 않을까 싶군요. 그리고 그 다음 문제가, 새롭게 하고 싶은 일의 절실도가 일의 추진력을 결정하게 되겠지요. 저에게 50대 시작 시점이라면 「태백산맥」을 마치고 3년쯤 지났을 때입니다. 그때 제2의 인생을 새로 결정해야 했다면 저는 고향을..

조정래 소설 2021.03.31

조정래 / ‘천년의 질문2’중에서

조정래 / ‘천년의 질문2’중에서 장우진은 망설임 없이 서점으로 달려갔다. 수십 가지 책이 떠올랐지만 우선 세 가지로 압축했다. 처음 골라 든 것이 피천득의 「인연」이었다. 두 번째가 법정의 「텅빈 충만」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가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었다. 그러나 법정 스님의 책은 아무리 찾고 또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스님 돌아가시면서 스님 책들은 다 절판됐잖아요. 스님께서 그리 유언하셔서." 점원 아가씨가 좀 서운하다는 듯 얼굴을 약간 찌푸리며 말했다. '아하, 그렇지 참. 왜 이리 깜빡깜빡하는 게 많냐. 나도 이제 늙어가는 거야?' 장우진은 피식 웃으며 돌아섰다. 장우진은 평소보다 좀 일찍 집에 들어가 「텅빈 충만」을 찾기 시작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방 양쪽 벽면을 채우고..

조정래 소설 2019.07.12

돼지를 모독하지 말라

돼지를 모독하지 말라 우리는 음식을 허겁지겁 많이 먹어 대는 사람들을 보고 흔히 “돼지처럼 먹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살찐 사람들을 보고 으레껏 “돼지새끼처럼 뚱뚱하다”고 해 버린다. 사람을 짐승 취급했으니 그건 분명 인격 모독이고 명예 훼손이다. 그러나 본인 듣게 하지 않았으니 죄가 성립되지 않고 표현의 자유에 속한다. 그렇게 모독적으로 짐승 취급을 당하는 것은 살찐 사람들이 일방적으로 겪는 억울함이요, 분함이요, 슬픔이요, 소외감이다. 그 풀 길 없는 외로운 감정은 우울증이 되고, 그 반감은 폭식을 불러 더 살이 찌게 만든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꼭 유념해야 할 것이 있다. 돼지가 정말 우리 생각처럼 그렇게 배가 터지도록 먹을까? 아니다. 그건 겉모습만 본 우리의 일방적 속단이다, 동물학자..

조정래 소설 2018.0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