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에 제2의 삶을 살 수 있다면
요즘에는 40~50대에 '제2의 인생'을 찾아 회사를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평균 수명 120세 시대라면 중간쯤 되는 부분에서 다른 일을 찾아볼 만도 할 것 같은데요. 만약 선생님께서 지금 50대라면 하고 싶은 일이 있으신지요.
서신혜(40대,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글쎄요, 50대에 새 인생을 시작할 일? 그다지 쉬운 일 같지는 않군요. 그때까지 경제력이 얼마나 확보되었느냐가 새로운 선택의 결정적 요건이 되지 않을까 싶군요. 그리고 그 다음 문제가, 새롭게 하고 싶은 일의 절실도가 일의 추진력을 결정하게 되겠지요.
저에게 50대 시작 시점이라면 「태백산맥」을 마치고 3년쯤 지났을 때입니다. 그때 제2의 인생을 새로 결정해야 했다면 저는 고향을 향해 서울을 떠났을 것 같습니다. 아무리 살아도 정 붙일 곳 없고, 살벌하고 분주하고 공해에 찌든 서울이 싫기 때문입니다. 밤하늘에 별이라곤 보이지 않고, 난개발로 대형 빌딩들만 치솟아 방향감각을 잃게 하는 서울이 지옥으로만 느껴질 뿐이었던 것입니다.
제가 태어난 곳은 순천이었지만, 저는 「태백산맥」의 주요 무대인 벌교를 훨씬 더 사랑하고 있습니다. 벌교는 아늑하고 아름다운 풍광으로, 전쟁의 트라우마를 앓고 있던 저를 포근하게 감싸 치유해 준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벌교를 제 ‘문학의 고향’이라고 생각해 오고 있습니다.
거기 벌교 그 옆 어느 야산 자락으로 찾아들어 자리잡고 싶습니다. 그리고 한 10만 평쯤 땅을 마련해 그 토양에 잘 맞는 나무를 기르는 일을 하면 어땠을까 생각합니다. 안식과 전원생활과 적당한 노동이 조화될 수 있는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야산 10만 평이라고 해도 그다지 큰 돈이 들지 않습니다. 인구의 도시 집중으로 이 땅의 시골들은 텅텅 비어가고 있기 때문에 농토도 아닌 야산은 깜짝 놀랄 만큼 그 값이 헐합니다. 그리고 나무 기르기는 계절 따라 하는 곡식이나 과일 농사와는 달리 자연의 힘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제가 할 일이 많이 줄어들 것입니다. 그리고 수익 수목들은 검소한 생활을 해나가는 데 모자람이 없도록 도움을 줄 것입니다.
저는 한 25년쯤 전에 아들에게 그런 제의를 했다가 가차없이 퇴짜를 맞은 적이 있습니다. 제가 「태백산맥」을 쓰고 나서 도저히 헤어날 수 없는 슬럼프에 빠져 더 글을 쓸 수 없게 되었다면 틀림없이 그 길로 제2의 인생길을 열었을 것입니다.
저는 꽃과 나무를 무척 사랑합니다. 그래서 인간 본위로 나무들을 무작정 전지해 대는 것을 끔찍이 싫어합니다. 그건 나무 학대와 고문을 넘어 나무 살해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나뭇가지를 마구잡이로 쳐내는 행위를 넘어 원줄기 절반을 싹뚝 잘라버리는 만행은 분명 나무를 죽이는 일입니다. 사람 한 명이나 나무 한 그루는 서로 다를 것 없는 동일한 생명체입니다.
(...생략...)
수십만 그루의 나무를 기르며 그 옆 텃밭에서 계절 따라 싱싱한 먹거리를 따내는 여생을 살고 있는 저를 상상하기만 해도 행복합니다. 아름다운 경치 속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며 자연과 더불어 사는 것, 그건 날마다 정신적 육체적 보약을 먹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저의 기본 정서는 도회지가 아니라 농촌입니다.
< 2 >
독거(獨居)
지금까지의 저를 만들어낸 것은 노력입니다. '노력은 성공의 어머니'라는 진부한 말은 역시 영원히 빛나는 금언입니다. 스스로 발견한 재능 다음에 하나 더 더해야 할 것이 바로 이 노력입니다. 재능 + 노력 + ( )가 남았습니다. 하나가 더 더해져야 완전한 문학인생이 됩니다.
문인들의 세계를 살펴보면 뜻밖에도 너무나 많은 문인들이 특별한 일 없이 끼리끼리 만나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는 회중(會衆)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그건 참으로 비생산적인 자학행위입니다. 여럿이 모여 앉아 술잔 기울여가며 문학하는 척하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글쓰기와는 멀어지는 것이고, 그것이 습관이 되어버리면 값싸게 마신 소주는 알코올 중독을 일으키며 몸을 파먹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허송세월하며 글다운 글도 못 쓰고, 건강은 건강대로 망쳐 인생을 허망하게 탕진해 버린 문인들이 꽤나 많습니다.
모든 예술 창작은 오로지 혼자 작업하는 것이고, 그 혼자 있음을 예술혼이 불붙어 오르는 절정의 시간으로 가꾸지 못하고 ‘외롭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예술가의 기본자격 미비자입니다. 그리고 그 '외로움'을 견딜 수 없어 사람들을 찾아 회중을 하려고 나선다면 그 사람은 아예 예술가일 수 없습니다. 정치가 수많은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사람농사라면, 예술은 먼 영혼끼리 교감하는 감동을 창조하는 영혼농사입니다.
혼자 있을수록 더 강력한 폭발력으로 발화하는 영감 속에서 뜨겁게 불붙어 오르는 예술혼으로 감동적인 작품을 창조해 내는 그 생활을 한 단어로 줄여 말하자면 독거(獨居)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독거를 즐기고, 그 독거 속에서 창작의 황홀경에 취할 수 있을 때 그 사람은 바로 참다운 예술가이고, 영원한 생명력을 지닌 예술품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결론에 도달해 있는 것 같습니다. 완전한 문학인생을 위하여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요건 중에 하나가 비어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 무엇을 채워야 하겠습니까?
'재능 +노력 + 독거'
< 3 >
순수문학과 참여 문학
참여문학? 그 반대 개념이 순수문학이라고 되어 있지요. 순수와 참여 문학 논쟁은 오랜 세월에 걸쳐 있습니다. 그 발상은 유럽인데 일본 식민지시대에 우리 땅에 이식되었고, 해방된 이후로도 그 오도된 소모적 입씨름은 특이한 한국적 상황 속에서 시대착오적 기현상을 일으키며 오래 기세를 떨쳐왔습니다.
특히 한국 땅에서 순수문학론이 기승을 부리게 된 것은 일제식민지시대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일본이 만주를 본격적으로 침략하기 시작한 1931년의 만주사변을 기점으로 우리 문인들은 급격하게 친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이 마침내 만주까지 차지해 버렸으니 이제 우리의 독립은 요원하게 되었다. 만주를 그리도 쉽게 차지한 것은 중국 대륙까지 장악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리되면 우리의 독립은 영영 가망이 없게 된다.’ 이것이 문인들과 지식인들의 상황 판단이었고, 그러니 일본 편을 드는 것이 현명한 처사다 하는 기회주의가 발동했던 것입니다.
친일의 물결이 문인들과 지식인 사회를 휩쓰는 가운데 공식적으로 친일의 깃발을 힘차게 들어올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1934년 1월 2일 자 <동아일보>에 시인이며 평론가인 박영희가 카프(KAPF, Korea Artista Proleta Federacio,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 탈퇴와 함께 전향을 선언한 것이었습니다.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이다.’ 긴 전향서의 핵심이었습니다. 이 선언을 신호로 친일 문인단체가 본격적으로 결성되었습니다. 춘원 이광수가 회장을 맡은 그 단체가 조선문인협회였습니다. 그리고 친일 문인들이 내세운 것이 ‘순수문학’이었습니다. 문학은 정치와 무관해야 하며, 순수한 아름다움의 예술을 창조해야한다. 이것이 예술지상주의를 내세운 순수문학론의 핵심입니다.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조선총독부가 식민지 지배를 하며 무력을 앞세워 자행하는 온갖 횡포, 탄압, 유린, 폭력, 착취, 갈등, 불행 같은 것들을 외면하고, 작품화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조선총독부가 가장 바라는 바인 것입니다.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이다.’
이 구호는 1980년대까지 순수문학을 옹호하는 모든 평론가들이 40여 년 동안 금과옥조로 여기며 평론마다 내걸어 사회의식과 역사의식이 강한 소위 참여문학을 공박하는 효과 좋은 무기로 써먹었습니다.
군부독재는 강화되고, 그에 따라 분단은 고착되고, 그런 상황 속에서 야기되는 현실의 모순과 시대적 갈등을 형상화하고자 하는 작가들이 많아지면서 작품 활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상황 변화에 대해 순수문학 쪽에서 ‘참여문학’이라고 이름 붙이고, 그 고발문학은 문학성이 빈약하고 예술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공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이른바 수십 년에 걸친 '순수· 참여 논쟁'입니다.
순수와 참여라는 이분법은 시대착오적인 유치함입니다. 이제 그런 소모적인 논쟁 아닌 논쟁은 폐기되어야 합니다. 오직 ‘좋은소설, 감동적인 작품’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계속 그 이분법을 내세워 글을 쓰는 평론가가 있다면 그런 사람은 마음놓고 무시해도 좋습니다.
< 4 >
성공한 인생이란 무엇인가
선생님 소설들을 읽어보면 선생님께서는 이 세상사고 있생사를 다 통달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쭙습니다. 성공한 삶(인생)이란 어떤 것인가요?
정대호(30대, 인천광역시 중구)
성공! 그 말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스트레스 주고, 괴롭히고, 상처 주고, 절망케한 말도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성공은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고, 삶의 목표이고, 노동의 동력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성공은 희망과 함께 모든 사람들의 삶을 추동시키는 근원적 힘입니다.
그러나 그건 바라는 만큼 이루어지기가 어렵습니다. 첫째 욕심껏 목표를 너무 크게 잡기 때문이고, 둘째 사회적 여건들이 갑작스럽게 장애물로 앞을 가로막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공은 두 가지로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객관적으로 평가받아야 하는 삶.
둘께, 주관적으로 스스로 평가하는 삶.
객관적 평가란 곧 사회적 평가를 말하는 것으로,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은 전체 인구 중에 아주 소수에 불과합니다. 정치계, 법조계, 경제계, 언론계, 학계, 예술계, 체육계, 연예계 등으로, 그 모든 분야를 망라해도 거기에 종사하여 인정받는 사람들은 전체 사회 성원의 몇 퍼센트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내리는 사람들은 1차로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 2차는 사회성원 전체가 됩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 전부가 스스로가 평가하는 주관적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주관적 삶을 '시민적 삶' 또는 '서민적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시민적 삶에는 사회적 명예가 없습니다. 그 대신 객관적 삶을 사는 사람들을 맘놓고 바라보는(또는 구경하는) 무한한 자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맘껏 평가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행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평가받아야 하는 삶'보다 ‘평가받지 않아도 되는 삶’은 얼마나 편하고 자유롭습니까. 그러나 모든 삶은 그 나름으로 다 고달프고, 외롭고, 힘겨운 것이기도 합니다. 그게 우리네 인생살이지요.
그럼 '스스로 평가하는 삶'의 성공 여부에 대하여 결론을 내릴 단계에 와 있습니다.
‘자기가 꼭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하고, 그 일을 혼신을 다해 해나가고, 그러면서 나날이 재미있고 즐거우며, 세월이 흘러갈수록 사는 의미와 보람을 느끼면서 행복이 커져가면 그 인생은 틀림없이 성공한 인생입니다.’
조정래 / ‘홀로 쓰고, 함께 살다’ (해냄 출판)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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