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시대가 끝난 한반도
소련이 역사 속으로 사라져가면서 소련을 탄생시켰던 레닌의 동상들이 도처에서 땅바닥에 나뒹굴어지고 있었습니다. 달걀 하나 빵 한 쪽을 구하려고 꽁꽁 얼어붙은 동토를 수많은 군중들이 질정 없이 헤매는 혼란 속에서 새로 태어난 나라 이름이 '러시아'였습니다. '다시 러시아?' 갑작스러운 소련의 붕괴처럼 그 이름은 세상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혼란 속에서 대한민국은 기민하게 움직여 뜻밖의 성과를 이뤄냈습니다. 러시아와 수교하고 나섰고, 중국과도 수교한 것이 그것입니다. 그 돌발 사태야말로 냉전시대가 끝났음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증거였습니다. 그 사태에 소스라치게 놀란 것이 북한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러시아도 중국도 이제 적이 아니라 선린 이웃나라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한 것이 1991년인데 북한은 미국과 수교하지 않았습니다. 북한 핵 문제로 두 나라의 갈등은 날로 심화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놀랄 만한 상황 변화가 일어났다고 해서 우리 한반도에 영속적인 안정과 평화가 왔을까요? 결코 아닙니다.
자아, 우리 함께 세계지도를 펼쳐봅시다. 우리 한반도가 어디에 위치해 있습니까. 서북쪽으로 중국이, 북쪽으로 러시아가 위치해 있습니다. 그들이 한반도를 향해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대륙세력입니다. 그리고 동남쪽으로는 일본이, 남쪽으로 미국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들도 우리 땅을 향해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는 ‘해양세력’입니다. 저 오랜 옛날부터 그들은 그래 왔고, 조선이 급속도로 몰락해 가던 고종 때 그 네 나라가 우리 땅을 놓고 치열하고 노골적인 각축전을 벌였던 것은 역사가 잘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그 네 나라의 그러한 야욕은 냉전시대의 종식과 상관없이 앞으로도 끝없이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똑독히 기억하며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사실을 잊는 순간 우리는 또 식민지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의 지정학적 운명입니다. 그래서 저는 얼띤 유학파 지식인들에게 ‘시대착오적 작가’, '세계화에 역행하는 작가’, ‘소아병적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작가’라는 유식하고 거창한 욕을 먹어가면서도 강대국의 민족주의와는 반대되는 약소국의 '방어적 민족주의‘, ’공생적 민족주의’, '개방적 민족주의', '건설적 민족주의'를 기회 있을 때마다 줄기차게 강조하고 역설해 왔습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계속할 것입니다. 강대국들의 횡포 앞에서 약소국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민족적 단결과 저항' 말고 무슨 무기가 있겠습니까.
우리 이 기회에 똑똑히 기억합시다. 인류의 역사가 지속되는 한 다음 세 가지는 절대로 없어지지 않습니다. 민족주의, 국가주의, 인종주의! 그 사실을 부인하려고 하거나 희석시키려고 하는 자들은 지적 사이비이거나 지적 사기꾼들입니다.
자 그럼 냉전시대가 끝난 시점에서 우리를 에워싼 네 강대국의 실체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네 나라 중에서 우리가 가장 믿는 나라가 어느 나라입니까? 유치원생도 다 아는 그걸 왜 묻느냐고요? 그 정답은 미국이지요. 우리는 그 미국과의 관계를 ‘우방’으로 시작해 '동맹'으로 바꾸었고, 세월 따라 ‘맹방’으로 강화했고, 그것도 모자라 ‘혈맹’이라고 힘을 주었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미국과의 관계를 강화시켜 나간 것처럼 미국도 그랬을까요? 그랬으면 참 좋았겠는데, 미국은 전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 뚜렷한 증거가 여기 있습니다.
1962년 케네디 대통령은 백악관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미국 작가들을 초청해 축하의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은 「대지」의 작가 펄 벅 여사에게 요즘 어떻게 지내시냐고 인사를 했습니다. 펄 벅 여사는 한국이 무대인 소설을 쓰고 있다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케네디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습니다. "한국은 영 골치 아픈 나라인데, 내 생각에는 미군을 한국에서 철수시켜야 할 것 같습니다.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가고 있으니까요. 그냥 옛날처럼 일본이 한국을 통제하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펄벅 여사는 충격으로 말을 잠시 잊었다가 이내 정색을 하고 공박했습니다. "대통령이란 자리에 있으면서 한국 사람들이 일본을 얼마나 싫어하는지도 모르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건 마치 미국이 영국의 지배를 받던 그때로 돌아가라는 것과 같은 소리입니다."
여러분 기분이 어떠십니까. "아니, 케네디가 그래?" “그 사람 괜찮은 줄 알았더니 영 형편없네!" "뭐라고? 우리를 또 일본 놈들한테 넘겨?" 이렇듯 실망하고 홍분하시겠습니까?
이것은 케네디의 실수도, 실언도 아닙니다. 한국과 일본에 대한 미국 대통령의 이런 인식은 분명한 역사성을 가지고 있는 전통적 기본 사고입니다. 다음이 그 명백한 근거입니다.
1905년 일본과 미국 사이에는 가쓰라-태프트 협약(밀약)이 체결되었습니다. 가쓰라 타로 일본 수상과 미국 육군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가,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통치상의 안전을 보장해 주고, 미국은 일본의 한국에 대한 보호권 확립을 인정한다’는 협약을 체결한 것입니다. 이 보고를 받은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귀하의 가쓰라와의 회담은 모든 점에서 전적으로 옳다. 나는 그대가 한 모든 말을 확인했다는 것을 가쓰라에게 전해주기 바란다'고 화답했습니다.
케네디는 선배 대통령 루스벨트가 한 그대로 전통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케네디가 대한민국을 다시 일본의 식민지로 넘겨주겠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돈' 때문입니다. 케네디의 그 돈타령을 그대로 다시 이어받고 있는 것이 누굽니까? 58년이 지나 트럼프가 '주한 미군을 철수시킬 수 있다'는 냄새를 풀풀 풍겨가며 치사하고 야비하게도 돈타령을 계속 해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을 대하는 미국의 이런 태도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제 우리는 전후의 거지 나라가 아닙니다. 수출을 미국과 일본 시장에 절대 의존하고 있었던 1960~1970년대의 경제도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1인당 국민소득 3만 2천 불을 돌파한 세계 10대 경제대국을 건설했습니다. 수출시장은 미국이 13퍼센트, 일본이 5퍼센트, 중국이 24퍼센트로 미국과 일본을 합쳐도 그 바중은 20퍼센트가 못 됩니다. 그리고 중남미로, 동남아로, 중동으로, 중앙아시아로, 아프리카로 수출시장을 계속 다변화시켜 나가면 그 변화는 더욱 커지고, 우리 경제의 자율성과 건강성은 한층 강화될 것입니다.
우리 조국 대한민국은 이제 허약한 나라가 아닙니다. 열등감을 버리고 독립국가의 자존심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냉전이 끝난 시대에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당당하게 가야 합니다.
그 길이 바로 ‘등거리 외교’의 길입니다. 그 어느 나라에도 치우치지 않고, 모든 나라와 균등하게 관계를 맺으며, 평화롭게 함께 발전해 나아가는 등거리 외교의 길을 가야 합니다. 우리는 빨리 등거리 외교술을 연구하고 습득해야 합니다. 그 길만이 튼튼한 조국을 후대에게 넘겨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조정래 / ‘홀로 쓰고, 함께 살다(해냄 출판)’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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