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 소설 61

조정래 / ‘한강5’중에서

조정래 / ‘한강5’중에서 “예, 다름이 아니라 우리 평화시장에 있는 봉제공장들이 근로기준법을 위반하고 있는 사실들이 너무 많아 공원들의 실태조사 자료를 가지고 시정해 주십사 하고 찾아뵈었습니다." 전태일은 다시 고개를 숙여 보이며 봉투에서 서류를 꺼냈다. 그러나 근로감독관은 이야기를 들을 자세를 전혀 갖추지 않은 채 담배에 불을 붙여 연기를 훅 내뿜으며 책상 옆구리에 붙여둔 빈 의자가 있는데도 자리를 권하지 않았다. “저어, 저희들이 일하는 봉제공장들은 작업환경부터 사람으로서 견딜 수 없도록 형편없이 나쁩니다. 먼저, 천장 높이가 1.5미터밖에 안 되어 모두 허리를 구부리고 일을 해야 합니다. 원래는 3미터 높이였는데 사장들이 임대료를 줄이고 돈을 많이 벌려고 절반을 막아 2층으로 쓰기 때문..

조정래 소설 2021.08.07

조정래 / ‘한강4’중에서

조정래 / ‘한강4’중에서 아버지는 음식을 남겨 버리는 것을 돈을 헤프게 쓰는 것만큼 싫어했다. 돈은 쓸 때다가 꼭 맞춰 제대로 써야지 단 1원이라도 허튼 돈을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버지가 누누이 강조하는 지론이었다. 아버지의 혁대가 30년이 넘어 곧 끊어질 것처럼 닮아져 있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와이셔츠가 10년이 넘어 소매 끝에 보푸리기가 일고 있는 것을 알게 된 것도 회사에 들어온 다음이었다. “돈은 돈을 귀히 여기고 아낄 줄 모르는 인간들한테는 절대로 붙지 않는다. 사업은 무작정 돈을 벌어들이는 것이 아니다. 첫째로 돈을 귀하게 여기고 아낄 줄 아는 것이 완전히 몸에 배야만 실한 사업가가 될 수 있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보여준 것이 혁대고 와이셔츠 소매 끝이었다. 그러데 그건 바..

조정래 소설 2021.08.05

월남바람

월남바람 청계천 끝머리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무허가 집들의 모양새는 그대로 거지의 누더기였다. 흔히 무허가 판자촌이라고 하는데 이곳에서는 판자나마 네 벽에 제대로 둘러친 집을 찾기가 어려웠다. 기껏 판자라고 어느 한쪽 벽에 붙인 것도 시멘트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공사판의 쓰레기거나, 여기저기서 마구잡이로 주워다 모은 길이도 두께도 다른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런 판자도 붙이지 못한 데는 여러 군데를 땜질한 천막이 쳐져 있는가 하면, 다 낡은 미군용 우비가 벽을 대신하고 있기도 했다. 창문이라는 것도 손 닿는대로 주워다 단 것들이라 모양이며 크기가 제멋대로 각양각색이었다. 저런 데서 어떻게 사람이 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 누더기 집들은 찌든 가난으로 맥질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궁색한 동네에도 변해가는..

조정래 소설 2021.08.04

조정래 / ‘한강3’중에서

조정래 / ‘한강3’중에서 창경원의 긴 담길에는 플라타너스 큰 잎들이 무슨 슬픔처럼 뚝뚝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여러 가지 감도의 갈빛으로 물들어 있는 잎들마다 곱고 아름답기 그지없는 추상화들이 그려져 있었다. 낙엽들은 서로 닮았을 뿐 그 하나하나가 제각기 다른 형상과 채색의 그림을 담고 있었다. 플라타너스 큰 잎들이 낙엽 져 흩날리는 것은 최고 걸작의 추상화들이 무수하게 날아가고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옛 정취 그윽한 돌담길에 낙엽은 지고, 낙엽들이 흩날리는 속에 전차가 느릿한 여유로움으로 굴러가는 정경은 꽤나 낭만적이기도 했다. 그 창경원 돌담길이 서울에서 제일 아름다운 길로 꼽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 길에 버금가기로는 덕수궁 돌담길이 있었다. 덕수궁 돌담길 중에서도 대..

조정래 소설 2021.08.02

술 취해서.....

술 취해서..... "좋아, 홧김에 소 잡아먹는 거야." "그렇지, 홧김에 서방질도 하고." 그들은 다투듯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그들은 별말이 없었고, 빈 잔은 빨리 돌았다. 거의 쉴틈 없이 열 잔쯤 마시자 김선오는 가슴에서 소줏불이 타오르며 술기운이 머릿속을 휘도는 것을 느꼈다. "야아, 씨팔 말이야, 드립고 치사해서 살겠어 이거!" 누군가가 술기운을 토해냈다. "그래, 드럽고 치사하긴 한데, 그 꼴 더 안 당하려면 다들 붙고 보자구 이기면 충신이요 지면 역적이란 말은 역시 진리니까." "맞어. 승자의 웃음은 누구나 부러워하지만 패자의 눈물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아. 자아, 마시자, 내일을 위해!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김선오는 목이 타드는 심한 갈증으로 눈을 떴다. 머리가 어지러우..

조정래 소설 2021.07.31

조정래 / ‘한강2’중에서

조정래 / ‘한강2’중에서 선태는 여동생 명숙이의 일로 하루 종일 공부가 되지 않고 우울했다. 그건 어쩌면 자신이 겪고 있는 갈등과도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자신은 어찌할 수 없어 농고로 전학을 하긴 했지만 마음의 절반은 인문학교에 걸쳐진 채 우울하고 괴로웠다. 법관이 되려고 했던 꿈을 포기해야 하는 패배감이나 좌절감도 컸고, 평생 농사를 짓고 살아야 한다는 데도 자신감이 서지 않았다. 평생고생만 한 아버지의 삶을 되풀이해야 한다는 것에 두려움이 앞섰고, 농고의 분위기도 그 두려움에 부채질을 할 뿐이었다. 대부분의 농고생들이 인문학교 학생들에게 열등감을 갖듯 자신들이 농부가 된다는 것을 암담해하거나 풀죽어 있었고, 선생들도 그저 교과서에 있는 것을 가르칠 뿐 장래에 대한 그 어떤 ..

조정래 소설 2021.07.30

배고프다는 것의 의미

배고프다는 것의 의미 "물건은 물건대로 안 나가고, 수금은 수금대로 안 되고, 이거 사람 미치고 환장할 일이야. 뭐 하나 돼먹는 게 있어야 말이지. 이놈이고 저놈이고 데모하는 놈들은 다 미친놈들이야. 세상 뒤엎으면 금방 살판날 줄 알았겠지만 이 꼴이 뭐야, 이게. 이놈에 불경기가 6.25 때 뺨치는 판이니 장면인지 짜장면인지 그건 도대체 될 하고 있는 물건이야, 그래도 역시 이승만 대통령 때가 좋았어. 나 요새 쥐약 먹고 죽기 일보 직전이니까 다들 며칠만 더 기다려." 사장은 얼굴을 잔뜩 구겨가며 이렇게 말을 쏟아내고는 돌아서 버렸다. "공장장님, 어떻게 좀 해보세요. 다 안 되면 반이라도 줘야지 이러다가 우리 굶어죽어요. 지난번에도 며칠만이라고 하더니 보름을 넘겼고, 이제 와서 또 며칠이라고 하는 게 ..

조정래 소설 2021.07.29

조정래 / ‘한강1’중에서

조정래 / ‘한강1’중에서 기차는 요란한 진동음을 내며 우람한 철근 아치가 연결된 철교 위를 달리고 있었고, 어둠기가 다 걷힌 양쪽 창밖으로는 폭넓은 강줄기가 펼쳐지고 있었다. 강가를 따라 얼음이 잡혀 있는 한강의 물은 묵직한 무게감을 지니고 푸르렀다. 깊고 큰 강일수록 그 흐름이 표나지 않는다고 했듯이 한강은 흐름을 느낄 수 없도록 잔잔하고 고요했다. 어디서 흘러와 어디로 흘러가는지 선뜻 방향을 잡기 어려운 한강은 그 유장한 흐름의 양쪽 꼬리를 아득하게 멀고 먼 곳으로 아련히 감추고 있었다. (P.16) “생각해 보면 51년 김홍일 장군 예편 때부터 우리 광복군이나 독립군 출신들의 앞날은 결정났던 거야. 도대체 김홍일 장군이 어떤 분인가. 김구 선생을 도와 이봉창, 윤봉길 의사가 ..

조정래 소설 2021.07.28

조정래 / ‘아리랑 12권’ 중에서

인간사냥 "우리가 수행하는 임무는 황공하옵게도 천황폐하의 칙령을 받들고, 대일본제국 육군성의 명령에 따른 것임을 명심하라! 성전을 수행하고 있는 육군성은 징용자들을 화급히 필요로 하고 있다. 지금부터 남자는 눈에 띄는 대로 사냥하라. 제군들 임의대로 선별하지 말고 무조건 사냥해서 차에 태워라. 선별은 차후에 내가 한다. 지금부터 1개조씩 각 마을로 분산하여 사냥을 개시한다. 지금 시각 오전 11시, 오후 5시 정각에 이 지점에 재집결한다. 이상!" 절도 있게 지시를 마친 이시바시는 칼을 막대기에 꽂았다. 차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겠군. 이놈들을 빨리 차에 실어." 이시바시는 칼을 꽂으며 명령했다. "이놈덜아, 안 돼야, 안 돼야!" "이 베락 맞어 뒤질 놈덜아!" "요런 개만도 못..

조정래 소설 2021.06.11

당신은 아는가

당신은 아는가 양쪽에서 산줄기를 자르고 그 부분을 평지로 만드는 힘겨운 일을 해낸 것은 바로 조선노무자 1천여 명이었다. 그들은 흙을 파내고, 바위를 깨내고, 그것을 밀차나 등짐으로 죽도록 운반하면서 땀을 흘린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바위에 깔려 죽고, 흙더미에 파묻혀 죽고, 도망가다 잡혀와 맞아 죽고, 과로로 병들어 죽고 해서 그 수가 60명을 넘었다. 그들은 총을 든 군인들의 감시 아래 조별로 시멘트를 져나르고, 모래를 져나르고, 자갈을 져나드고, 물을 져나르고, 시멘트와 모래·자갈을 버무리고, 모두가 숨돌릴 겨를 없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이새끼야, 빨리빨리 해!" "야 이새끼야, 잡담 마라!" 징용을 끌려올 때 18원에서 20원의 임금이면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라고 다들 생각했었다. 그러나 ..

조정래 소설 2021.06.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