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걷기

유시민 / ‘유럽도시기행1’중에서

송담(松潭) 2022. 10. 17. 21:28

 

 

노트르담 대성당

 

 

시테섬에 있는 파리 대주교좌 성당의 이름 노트르담(NotreDame)'은 이탈리아 성당들이 너나없이 이름 첫머리에 붙이고 있는'산타마리아'와 비슷한 뜻이다. 파리 주교와 로마 교황청이 12세기 중반부터 200여 년 동안 건물과 첨탑을 올리고 파이프오르간과 성가대석을 포함한 내부 시설을 지었다. 48미터, 길이 130미터, 천장 높이 35미터인 이 고딕양식 성당의 건축학적 특징은 따로 말하지 않겠다. 아야소피아나 베드로 대성당과 비교하면 노트르담은 평범하고소박하다.

 

노트르담은 종교시설인 동시에 정치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종교적 갈등이나 정치적 격변이 일어날 때마다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16세기 중반 위그노전쟁 때는 개신교도들이 우상숭배의 상징으로 지목해 파괴했다. 루이 15세가 개축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대혁명 때 또 부서졌다. 나폴레옹이 황제 대관식을 하면서 조금 손을 보았지만 그 효과는 오래가지 않았다. 폐허를 방불케 하는 흉물로 퇴락해 19세기 초에는 철거 여부를 둘러싼 사회적 논쟁마저 벌어졌다.

 

작가 빅토르 위고가 존폐의 기로에 선 노트르담을 구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노틀담의 꼽추'라는 제목으로 알려졌던 소설 파리의 노트르담(Notre-Dame de Paris)(1831) 이 대중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시민들은 노트르담 복원 기금 조성 캠페인을 벌여 성당을 완전하게 복원했다. 연합군이 나치 독일의 군대를 물리친 1944년에 파리 시민들은 여기서 해방 축하 미사를 열었다. 드골 대통령과 미테랑 대통령의 장례 미사도 노트르담에서 치렀다.

 

 

20194, 노트르담의 첨탑과 지붕이 불에 타 무너졌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파리 시민들, 장미의 창을 비롯한 노트르담의 귀중품을 구해내려고 분투하는 소방관과 시민들의 몸부림이 화염이 첨탑을 집어삼키는 장면보다 더 강한 여운을 남겼다. 불과 며칠 만에 우리나라 돈으로 1조 원이 넘는 복구 성금이 모였다는 뉴스는 이런 의문을 일으켰다. '노트르담이 도대체 뭐기에?'

 

프랑스 국민과 파리 시민에게 노트르담은 집단적 정체성을 집약한 '문화 아이콘'이다. 노트르담이라는 아이콘을 클릭하면 그들의 세계관과 생활양식, 그들의 의식과 감정 아래 깔려 있는 역사, 종교, 정치, 문화 콘텐츠가 한꺼번에 떠오른다. 조계사, 경복궁, 남대문, 독립문, 명동 성당이 한날한시에 불타 무너졌다고 상상해 보면 파리 시민들의 긴장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노트르담이 이런 참사를 처음 겪운 것은 아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불타고 깨어진 그 아이콘을 완미하게 복구할 것이며, 노르르님은 또 하나 장대한 '부활의 서사'를 얻게 될 것이다.

 

 

엘리제 궁전

 

 

튈르리 정원이 끝나는 지점에 콩코르드 광장이 펼쳐졌다. 대혁명이 터진 후 이 광장에는 루이 15세의 기마상이 철거되고 단두대가 들어왔고,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 단두대에 열 달 간격으로 목이 잘렸다. 그런 광장의 이름을 콩코르드(Concorde, 화합 또는 일치)라고 지었으니 대단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토론과 타협으로 내전을 막은 사실을 근거로 삼아 이름을 지은 아테네의 오모니아광장과 달리 콩코르드 광장에서는 그렇게 이름을 지은 1830년 이후에도 혁명과 반혁명이 일어날 때마다 무력 충돌과 학살 행위가 벌어지곤 했다. 그러니 콩코르드라는 이름은 사회적 평화와 정치적 화합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담은 것으로 해석하면 될 듯하다.

 

광장 양편에서 괜찮게 생긴 분수가 물을 내뿜었고 한가운데에는 꼭대기에 금박을 한 23 미터짜리 오벨리스크가 서 있었다. 3200년 된 이 오벨리스크는 1829년 오스만제국의 이집트 총독 무함마드 알리가 프랑스 정부에 선물한 것이다. 운송하는 데 무려 4년이 걸렸고 훼손되어 없어진 꼭대기의 금박은 프랑스 정부가 복원했다. 오벨리스크 아래서 강 건너를 보니 고대 그리스 건축양식을 본뜬 부르봉궁전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웠고, 에펠탑은 허리까지 안개에 잠겨 있었다.

 

콩코르드 광장에서 에투알 개선문이 있는 드골 광장까지 2킬로미터 정도 곧게 뻗은 샹젤리제 거리를 걸었다. 광장에서 600미터 떨어진 로터리까지 오른편에 펼쳐지는 샹젤리제 정원은 엘리제 궁전의 정원이었다.

 

엘리제 궁전은 대통령의 관저여서 멀리서만 보고 지나쳤다. 이 궁전은 1722년 완공했는데, 그때 루이 15세가 열두 살이었으니 그가 결정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나중에 그는 '공식 정부(情婦)' 마담 퐁파두르에게 파리의 최고 품격 건물로 평가받던 엘리제 궁전을 선물로 주었다. 분개한 시민들이 '매춘부의 집'이라고 쓴 팻말을 들고 ‘1인 시위'를 벌였다는 그 궁전을 대통령 관저로 쓰고 있다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프랑스 사람들, 대단하군!'

 

정부(情婦)'아내 있는 남자가 몰래 정을 통하는 여자이니 '공식'이라는 말을 붙이는 게 논리적으로는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부르봉가의 왕들은 다들 '공식 정부'를 두었다. 그리고 '공식 정부'라는 말은 '비공식 애인'도 있었음을 시사한다. 하긴, 누군가 왕의 '공식 정부'가 되려면 먼저 '비공식 애인'이 되어야 하니, 없으려야 없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앙리 4세 이전의 왕들이 그렇지 않았던 건 결코 아니지만, 창시자인 앙리 4세부터 루이 15까지 부르봉가의 왕들은 특히 심했다. 유일한 예외가 루이 16세였는데, 왕비만 바라본다고 해서 오히려 왕답지 않다는 비아냥을 들었다. 프랑스 국민들이 총리나 대통령의 사생활에 너그러운 태도를 보이는 것은 이런 '역사적 전통'과 관련이 있는지도 모른다.

 

마담 퐁파두르의 원래 이름은 잔-앙투아네트 푸아송이었다. 평민이지만 재산이 많은 금융업자의 딸로 태어나 귀족 교육을 받고 자란 이 여인은 독서를 즐겼고 예술적 재능이 있었으며 다른 무엇보다, 예뻤다. 악기 연주, 그림, 보석 디자인 등 여러 분야에 솜씨를 발휘했고, 식물학을 공부한 조경 전문가이기도 했다. -앙투아네트는 딸이있는 유부녀였지만 왕의 여자가 된다는 점괘를 믿었다. 말을 타고 왕의 사냥터 근처를 오가는 등의 집요한 노력 끝에 마침내 왕의 애인이되었을 때 잔-앙투아네트는 스물세 살이고 왕은 서른네 살이었다.

 

루이 15세는 1년 정도 지나 잔-앙투아네트에게 퐁파두르 후작이라는 새 이름과 작위를 주고 베르사유 궁전에 데뷔시켰다. 몰락한 폴란드 왕가의 공주였던 레슈친스카 왕비는 퐁파두르를 왕의 '공식 정부'로 선선히 인정했다. 루이 15세보다 일곱 살 많았던 왕비는 13년동안 쌍둥이를 포함해 11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또 아이가 생길까 두려워 남편이 침실에 오는 것을 마다하던 터였다.

 

마담 퐁파두르는 엘리제 궁전에 살면서 왕비 이상의 역할을 했다. 볼테르와 몽테스키외 같은 계몽주의 철학자들을 살롱에 초대했고 여러 유능한 남자들을 각료로 추천했으며 정부의 외교정책을 좌우하는 한편 예술가를 후원하고, 극장을 짓고, 도자기와 그림을 수집했다. 퐁파두르는 서른 살이 넘은 뒤로는 왕의 침실에 가지 않았지만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에 젊고 예쁜 여인들을 데려가 왕의 신임을 받았고 마흔세 살에 폐결핵으로 죽을 때까지 권력을 놓지 않았다.

 

퐁파두르가 죽자 왕실은 엘리제 궁전을 금융업자 니콜라 보종에게 매각했는데, 프랑스의 최고 갑부였던 새 주인은 정원을 더 화려하게 바꾸고 최고 수준의 예술품으로 실내를 장식해 살다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궁전을 루이 16세에게 바쳤다. 대혁명 이후 잠깐 인쇄공장으로 쓰였던 엘리제 궁전을 나폴레옹은 무도회장으로 재활용했으며 나폴레옹 3세는 밀회 장소로 이용했다.

 

1870년 나폴레옹 3세의 제정이 무너지고 '3공화국'이 들어선 후 엘리제 궁전은 공식 대통령 관저가 되었다. 이것을 거주 공간과 집무실이 제대로 갖추어진 관저로 만든 사람은 1959년에 출범한 제5공화국의 드골 대통령이었다. 미테랑 대통령은 사회주의자답게 궁전을 싫어해서 사택에 살며 출퇴근했다. 반면 우파 시라크 대통령은 1995년부터 두 차례 임기 12년 내내 이곳에 살면서 관저 예산을 크게 늘렸다. 사르코지 대통령은 부인과 이혼한 탓에 아파트에 머물렀고, 2017년 마흔 살에 대통령이 된 에마뉘엘 마크롱과 연상의 부인은 관저에 들어갔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은 모순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았다. 대혁명의 전사로서 왕당파의 반란을 진압했고 자유의 깃발을 높이 흔들며 주변 군주국의 동맹을 깨뜨리고 유럽을 평정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얻은 인기를 이용해 황제가 됨으로써 대혁명의 정신을 배반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해군이 영국의 넬슨 제독 함대에 궤멸당한 탓에 이집트에 고립되자 몰래 파리로 돌아와 179911월 이른바 '브뤼데르 쿠데타'를 일으켰다. 폭력으로 정부를 해산한 다음 국민투표를 시행해 새 헌법을 제정하고 10년 임기의 제1통령이 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겨우 서른이었다. 연합국이 강화 제안을 거절하자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북부로 진격해 오스트리아를 격파하고 라인강 일대와 북이탈리아를 보호령으로 만들었을 때는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나폴레옹은 여러 면에서 고대 로마의 카이사르와 비슷한 인생을 살았다. 제위에 올랐다는 점은 달랐지만, 그도 카이사르처럼 민중의 열망과 시대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조세제도와 행정조직을 정비했고 제조업과 금융업을 진흥했으며, 공공교육법을 제정하고 법 앞에서의 평등과 경제활동의 자유를 기본정신으로 하는 민법 체계를 세웠다.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으며 파벌을 가리지 않고 능력을 중심으로 인재를 중용하는 인사제도를 확립했다.

 

카이사르는 황제가 되기 전에 암살당했지만 나폴레옹은 황제가 됨으로써 과거의 자신을 죽였다. 그는 18028월 아부꾼들의 부추김을 받고 국민투표를 시행해 만장일치에 육박하는 찬성표를 받아 황제가 되었다. 나폴레옹이 부르봉 왕가의 예배당이었던 생드니 성당을 내치고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즉위식을 열었을 때, 왕의 목을 잘랐던 대혁명의 기반은 땅에 떨어졌다. 왕정을 폐지한 혁명이 겨우 10년 만에 제정으로 귀결되었으니, 역설도 이런 역설이 없었다.

 

나폴레옹 황제는 파리를 제국의 수도답게 만들고 싶었다. 묘지를 정리하고 도심 곳곳에 분수를 만들었으며 광장과 공연장, 시장, 제방, 교량 등 공공시설을 만들었다. 그러나 영국과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의 군주국들이 또다시 동맹을 체결해 프랑스를 공격하는 상황이라 사업을 제대로 추진하지는 못했다.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빈을 점령했지만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영국군에게 대패했다. 게다가 처음에는 해방군이라며 반겼던 유럽의 민중이 시간이 지나면서 나폴레옹의 자의적인 통치와 점령군처럼 행동한 프랑스 군인들의 횡포에 반발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한때는 독일과 폴란드에 이어 스페인까지 점령했지만 기세를 오래 유지할 수 없었다.

 

영국을 겨냥한 대륙봉쇄령이 유럽 대륙에도 심각한 경제 위기를 몰고 온 것도 나폴레옹의 몰락을 부추겼다. 참다못한 러시아가 대륙봉쇄령을 위반하자 나폴레옹은 181260만 대군을 일으켜 러시아를 침공했다. 러시아군이 도시와 들판에 불을 지르고 후퇴한 탓에 프랑스군은 손쉽게 모스크바를 점령했지만 식량 부족과 혹독한 추위를 디지 못하고 철수하다가 추격해 온 러시아군에 전멸당했다.

 

고전을 거듭하던 프랑스는 1814 년에 파리를 빼앗겼고,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중부 서쪽 앞바다의 엘바섬으로 쫓겨났다. 유럽 전역에 왕정복고의 반동이 밀어닥쳤다. 그런데 루이 16세의 동생인 루이테가 왕이 되어 형 못지않게 어리석고 무능한 짓을 계속하자 나폴레옹은 엘바섬을 탈출해 파리로 돌아와 황제 자리를 되찾았다. 하지만 그의 치세는 '백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과 프로이센 연합군에 완패한 나폴레옹은 남대서양의 영국령 세인트헬레나섬에 갇혀 체스와 영어 공부로 소일하면서 자신의 인생과 세계관을 구술한 회고록을 남기고 182155일에 사망했다. 유해는1840년 프랑스 정부가 영국 정부의 협조를 받아 앵발리드 성당에 안치했다.

 

 

베르사유 궁전과 루이 왕들

 

 

 

앙리 4세가 문을 연 부르봉 왕가의 권력 중심지는 루브르 궁전이었는데, 루이 14세가 1682년 베르사유 궁전으로 이사를 했다. 파리를 버린 게 아니라 베르사유 궁전을 파리의 정치적 공간으로 포섭한 것이다. 루이 14세가 혼자 힘으로 궁전을 지은 것은 아니다. 안정된 중앙집권 국가를 만들고 왕권을 크게 강화했던 할아버지 앙리 4세와 아버지 루이 13세가 아니었다면 그토록 크고 값비싼 궁전은 지을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베르사유 궁전이 보여주는 유한계급의 문화양식은 루이 14세 개인이 아니라 부르봉 왕가 전체가 창조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까지 통치했던 앙리 4세는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했다. 그는 성격이 밝고 매사에 긍정적이었으며 군주로서 유능했다. 종교의 자유를 폭넓게 인정함으로써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위그노의 내전을 종식하고 국민을 통합했다. 농민의 세금을 줄이고 귀족의 세금을 늘려 국가 재정을 확충했으며 도로와 운하를 건설하고 상공업을 진흥했다. 백성들이 일요일에 닭고기를 먹을 수 있게 하겠노라 공언했고, 그 약속을 지키려고 진지하게 노력했다.

 

그렇지만 앙리 4세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바람둥이 왕'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러한 부르봉가의 가풍'에 대해서는 앙리 4세의 경우만 구체적으로 말하고 나머지는 생략한다.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루이 0세의 여자들'을 검색해보기 바란다.

 

앙리 4세는 왕비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을 핑계로 삼아 다른 여자들을 가까이했다. 왕의 혼외 자녀를 셋이나 낳고 또 아이를 낳다가 죽은 여인을 포함해 평생 수십 명의 여인과 어울렸다. 그런 와중에 재혼한 왕비 마리가 왕세자를 낳았다. 그 아이가 아홉 살이 되었을 때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 데 앙심을 품은 가톨릭 광신자가 앙리 4세를 칼로 찔러 죽였다.

 

마리 왕비는 어린 왕 루이 13세를 섭정하면서 정치를 잘못해 민중의 지지를 잃었다. 그러자 앙리 4세 때 특권을 빼앗겼던 지방 귀족이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열여섯 살에 어머니의 섭정을 거부하고 친정을 시작한 루이 13세는 추기경 리슐리외를 총리로 기용해 귀족계급의 반발을 잠재웠다. 개신교를 억압해 종교 갈등을 재발하게 만든 것을 빼면 선왕의 정책을 대부분 충실히 계승했으며 상업과 해운업을 장려하고 해외 식민지를 획득하는 데 열성을 보였다.

 

그렇지만 열심히 일하는 왕은 아니었다. 정치보다 음악을 더 좋아했고 사냥을 즐겼다. 열다섯 살에 두 살 어린 합스부르크 가문의 스페인 공주 안 도트리슈와 혼인했는데, 왕비보다는 왕비의 시녀들을 더 챙겼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왕비가 혼인 22년 만에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이 다섯 살이었던 1643, 마흔두 살이었던 루이 13세가 심장마비로 죽었다.

 

루이 14세는 다섯 살에 왕이 되어 72년 넘게 재위함으로써 유럽군주제 역사의 최장 재위 기록을 세웠다. 이탈리아에서 온 추기경의 섭정을 받다가 성년이 되면서 친정을 펼쳤던 그는 불타는 야망을 품고 있으면서도 두려움에 떠는 모순적 성격의 소유자였다. 밖에서는 큰 전쟁을 세 번이나 벌여 영토와 식민지를 확장하면서, 안에서는 예술가를 후원하고 문화 발전을 북돋웠다. 왕권을 신에게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이 국가 그 자체인 양 절대 권력을 휘둘러 프랑스의 봉건제를 사실상 해체했지만, 귀족들이 반역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죽을 때까지 벗어던지지 못했다. 그가 20년 동안 지었지만 아직 미완공 상태였던 베르사유 궁전으로 서둘러 이사하면서 파리와 지방의 귀족들을 모두 그곳으로 불러 모은 것도 바로 그 두려움 때문이었다.

 

베르사유 궁전 안내서는 건축 과정의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궁전과 정원을 만든 과정과 방법을 알면 그곳에서 미학적 쾌감을 느끼는 것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리라. 베르사유 궁전은 모든 면에서 전제군주제의 폭력적 본성을 증언한다. 루이 14세는 개신교 신자들에 대한 차별을 없앤 앙리 4세의 칙령을 폐지했다. 그러자 부당한 차별에 대한 분노와 두려움 때문에 개신교도 수십만 명이 종교적 관용이 있는 주변 국가로 떠나버렸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상공업에 종사하던 이가 많아서 프랑스의 산업은 큰 타격을 받았다. 파리를 비롯한 도시의 거리에는 굶어 죽거나 전염병에 걸려 죽은 시신이 즐비했지만, 잦은 전쟁 때문에 국가의 재정이 바닥을 보인 탓에 정부는 적극적인 빈민 구제 사업을 할 수 없었다.

 

루이 14세는 이런 상황에서 백성을 강제 동원해 공사를 벌였다. 사고가 나서 사람이 죽으면 아무 보상도 하지 않고 묻어버리게 했다. 그렇게 해서 지은 호화 궁전에 귀족들을 불러 모아 사냥과 승마, 당구와 춤을 즐겼다.

 

'태양왕'이라는 별명은 어릴 때부터 발레를 했던 그가 태양신 아폴로 역으로 공연에 출연한 일과 관련이 있다. 그는 1715년 세상을 떠나기 직전 어린 증손자에게 후회가 담긴 유언을 남겼다. “전쟁을 피하고 국민의 고통을 덜어주는 정치를 해라.” 루이 14세의 자녀와 손자들이 대부분 천연두와 홍역을 비롯한 전염병으로 일찍 죽었기 때문에 왕위가 증손자에게 바로 내려간 것이다. 프랑스 국민들은 70년 넘게 재위했던 왕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다.

 

베르사유 궁전에서 태어난 루이 15세는 열네 살에 친정을 시작했는데, 성격은 증조부와 반대였고 능력은 그만 못했다. 영토 확장 야심은 크지 않았지만 세차례 왕위계승 전쟁에 휘말려 국가 재정을 파탄 내고 많은 해외 영토를 잃었다. 하지만 독일 접경 로렌 지역을 병합하고 이탈리아 중부 앞바다 코르시카를 사들여 영토를 조금 넓히기도 했다. 소심하고 인정이 많은 편이었으며, 화려한 의전보다는 개인적인 즐거움을 누리는 데 몰두했기 때문에 '친애왕'이라는 별명이 생겼고 인기도 있었다.

 

하지만 두드러진 정치적 무능과 선왕들을 능가한 엽색행각으로 결국은 민심을 잃고 말았다. 대혁명으로 목이 잘린 왕은 루이 16세였지만, 부르봉 왕가의 파멸을 초래한 원인 제공자는 루이 15세였다고 해야 공정한 평가가 될 것이다.

 

루이 15세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1774년 천연두에 걸려 사망했다. 아들이 먼저 같은 병으로 죽었기 때문에 열여섯 살 먹은 손자가 왕위를 이어받아 루이 16세가 되었다.

 

* 위 글 소제목(노트르담, 엘리제 궁전, 나폴레옹, 베르사유 궁전과 루이 왕들)은 독자가 임의로 정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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