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걷기

다시 부석사에서

송담(松潭) 2021. 12. 8. 06:17

다시 부석사에서

 

 

영주 부석사에 다녀왔다. 부석사는 소백산 기슭에 떠있듯 서있다. 나도 누구처럼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보고 싶었다. 그리고 고려 중기 때부터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무건물 무량수전, 그 앞에 고려 때부터 한결같이 펼쳐지고 있는 ‘산의 군무(群舞)’가 보고 싶었다. 도대체 어떤 모양이기에, 어떤 기개이기에 사람들이 그렇게 흠모하는가.

 

우선 평생을 박물관에서 한국미를 찾아내고 그 흥과 감동으로 일생을 살다 간 최순우의 현사를 들어보자.

 

무량수전, 안양문, 조사당, 응향각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이렇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람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무량수전 앞 안양문에 올라앉아 먼 산을 바라보면 산 뒤에 또 산, 그 뒤에 또 산마루, 눈길이 가는 데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능선들이 모두 이 무량수전을 향해 마련된 듯 싶어진다.

 

건축학자이며 비평가인 김봉렬은 더욱 구체적이다. 그는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일부일 뿐이며 전체를 보라고 한다.

 

돌아보는 눈앞에는 구름 아래로 첩첩한 산들이 부드러우면서도 힘찬 곡선들을 겹쳐가며 대자연의 교향곡을 연주하고 있다. 어쩌면 이처럼 장대하고 아름다운 장면을 대할 수 있을까? 이 거대한 자연의 풍경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처럼 수많은 석단을 쌓아가며 이 위치까지 올라오게 만든 것은 바로 이 대자연의 선물을 품에 안기 위함일까, 소백산의 수많은 산줄기와 능선들이 무량수전을 향해 경배하고 있는 것 같다.

 

은행나무의 안내를 받아 경내로 들어서고, 다시 가파른 돌계단을 오른다. 홀린 듯 오르다보면 마침내 환한 기운이 쏟아지는 곳에 이른다. 곧 무량수전 앞뜰이다. 홀연 나는 이렇게 떠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는다. 약간씩 갈라터진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의 거친 살갗이 오히려 정겹다. 정말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지나온 길을 더듬어본다. 길은 보이지 않고 먼 산들이 달려온다. 아, 이것이었구나. 산과 산이 힘을 합쳐 하늘을 떠받치고, 서로의 허리를 잡고 저희끼리 나뒹군다. 구름이 구름을 부르고 산이 산을 부른다.

 

푸름이 뭉개져 검푸르다. 땅과 하늘이 만나는 곳이 지평선이라면 산과 하늘이 만나는 저 곳은 무엇인가, 도솔봉, 극락봉 같은 산봉우리 이름이, 거기에 이름을 붙인 인간의 간절한 염원들이 부질없어 보인다.

 

저 먼 산까지 불러 모이도록 하는 부석사는 그래서 가장 큰 정원을 가진 사찰이다. 저 거대한 풍광을 이렇듯 간단히 뜨락에 가둔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인간은 자연 속으로 달려가고, 자연은 부석사로 달려와 경배하게 만드는 저 지혜와 힘은 누구의 것일까.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게 만들고, 자연을 경외하게 만들고, 우주의 신성을 느끼게 한 그들은 누구일까. 바로 이 땅에서 우리보다 먼저 사랑할 줄 알았고, 땅의 귀함을 알았고, 문리를 깨우쳤던 선인들이었다. 이름 없는 사람들이었다.

 

부석사를 예전에도 찾은 적이 있다. 그런데 내 기억 속에서 그것은 완전히 지워져 있었다. 그때는 부석사가 조연이었고 최고(最古) 목조건물이라는 무량수전만이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어떤 사물을 최고, 최다, 최장, 최신, 최초 등으로 계량화한다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그때 나는 부석사를 보지 못했다. 무량수전 앞뜰에서 산이 노래하는 걸 듣지 못했다. 선인들의 생각을 읽지 못했다.

 

지금 그대가 녹음이 뚝뚝 떨어지는 여름 한복판을 지나고 있다면, 아이들과 함께 떠나는 휴가라면, 없는 듯이 서있는 유적 앞에서 걸음을 멈춰 서 볼 일이다. 그리고 우리 것에 말을 붙여볼 일이다. 아이와 함께 가만가만...

 

부석사 경내에 들어서면

정말 떠있는 느낌을 받습니다.

허겁지겁 올라 온 길을 되돌아보면

길은 보이지 않고 산들만이 보입니다.

먼 듯 가까운 듯

높은 듯 낮은 듯

검은 듯 푸른 듯

서로를 껴안고 있습니다.

노래가 뭉쳐있는 것 같기도 하고

춤이 엉켜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저토록 장엄한 세계가 있는데,

산 아래 우리들은 어떠한지요.

실로 남루합니다.

지나온 삶을 자꾸 뒤적거리게 됩니다.

미움이나 원한 같은 것이

손에 잡히면 그게 또 그렇게 부끄럽지요.

 

김택근 / ‘뿔난 그리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