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걷기

오스트리아 빈

송담(松潭) 2022. 11. 9. 19:39

오스트리아 빈


오스트리아는 헝가리(동), 스위스(서), 이탈리아(남), 독일과 체코(북)에 둘러싸인 완벽한 내륙 국가다. 국토 면적은 8만4천㎢ 대한민국보다 조금 작지만 대부분 산악이고 경작지가 적어 인구가 9백만 명도 되지 않는다. 빈은 알프스 북쪽 비탈에 있으니 주변 지세가 험준할 거라 짐작했지만 슈테플 전망대에서 보니 그렇지 않았다. 도나우강을 낀 평지에 들어선 도시였다. 유럽은 중세 내내 봉건 영주와 왕들의 영토전쟁에 휩쓸렸고 몽골과 투르크를 비롯한 외부 침략에도 시달렸다. 평지의 도시에는 높고 튼튼한 성벽이 생존의 필요조건이었다.

오스트리아 국민은 대부분 독일어를 쓰고 가톨릭을 믿는다. 고대독일어에서 '동쪽 땅'을 의미했던 국명 외스터라이히(Österreich, 오스트리아는 이 단어의 라틴어 표기법에서 유래)는 이 지역이 옛날부터 독일어사용권의 동쪽 변방이었음을 시사한다. 켈트족, 라틴족, 슬라브족 등이 순차적으로 들어와 뒤섞였는데 9세기에 프랑크왕국의 단일 행정구역이 됨으로써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와는 다른 국가로 발전하게 되었다. 빈은 철기 시대 켈트족이 들어와 요새를 만들었을 때 '빈도보나(Vindobona)'라는 지명이 생겼고 B.C.1 세기 로마군이 점령하면서 역사 기록에 처음 등장했으며 로마군의 성채 일대가 최초의 도심이 되었다. 12세기 들어 상업이 발전하고 십자군의 집결지가 되면서 국제도시로 발돋움했고 합스부르크 가문이 터를 잡고 신성로마제국 황제직위를 차지한 16세기 이후 중요한 도시로 떠올랐다. 오스만제국 군대의 포위 공격을 두 번 물리친 이후 유럽 기독교인들은 빈을 이슬람의 서진을 막는 종교적 군사적 요충으로 받아들였다.

2021년 기준 1인당 국민소득 5만 달러를 넘은 오스트리아는 제약 · 엔진 · 석유화학을 비롯한 제조업이 GDP의 30%를 생산하는 '강소국'이며 금융 · 유통·의료·복지 등 서비스 산업 선진국이다. 게다가 산과 호수, 도시의 화려한 경관, 높은 수준의 음악과 예술로 세계인을 끌어들이는 관광 대국이다. 그렇지만 그런 사실만으로 베를린과 파리를 능가하는 빈의 화려함을 다 설명하기는 어렵다. 수백 년 동안 거대한 합스부르크제국의 수도였다는 사실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빈을 탐사하다 보면 저절로 합스부르크제국의 역사를 만나게 된다.

합스부르크제국은 독특한 국가였다. 처음에는 중세 귀족의 봉토에 불과했지만 긴 세월에 걸쳐 독특한 방법으로 다양한 종교와 역사와 언어와 문화를 가진 집단이 거주하는 광대한 지역을 하나의 국가질서 아래 통합했다. 그 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 해체되어 사라졌고, 독일어를 쓰는 사람들이 사는 지역만 남아 오스트리아공화국이 되었다. 정확하게 시대구분을 하려면 너무나 번거로우니 그 가문이 빈을 지배했던 5백여 년을 통틀어 '합스부르크제국'이라 하자.

11세기 스위스 북부 아르가우 지방의 어떤 귀족이 합스부르크(Habsburg)라는 성(城)을 지었다. 그때만 해도 그리 특별할 것 없는 시골 귀족이었을 뿐인데, 2백 년쯤 지났을 때 후손 한 사람이 독일 지역봉건영주들의 왕으로 뽑혔고 그 아들이 오스트리아 영지를 물려받았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주로 혼인을 통해 보헤미아 · 헝가리 스위스티롤 · 이탈리아 북부 지역을 손에 넣었고 15세기 중반부터 3백여 년 동안 신성로마제국 황제 직위를 대물림했다. 이탈리아 피렌체를 지배하면서 문화예술을 후원해 이름을 떨쳤던 메디치 가문조차 한낱 '시골 부자'로 보이게 할 정도로 영토가 넓고 돈이 많았는데도 정복전쟁을 벌이지 않았으니 교황과 이웃의 세속권력자들이 좋아할 만했다.

신성로마제국은 중세 봉건 귀족들의 느슨한 '정치적 동호회'였고 황제는 일종의 명예직에 지나지 않았다. '신성'할 것도 없었고 '로마'에 있지도 않았던 그 제국의 황제는 나폴레옹 군대가 유럽 대륙 전체를 장악했던 1806년 제국의 해체를 공식 선언했다. 그런데 그가 다스린 나라는 그때 처음으로 실체를 가진 제국이 되었다. 오늘날의 오스트리아와 독일 서남부 지역 · 체코·헝가리 · 리히텐슈타인 · 슬로베니아 · 벨기에·룩셈부르크·네덜란드·스위스 · 폴란드·프랑스 남부 · 이탈리아 북부 지역까지, 제국의 영토는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넓었다. 빈의 대성벽은 합스부르크제국의 심장을 보호하는 갑옷이었다. 정략결혼으로 영토를 획득했고 전쟁에는 지극히 무능했던 합스부르크 왕가는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 도시 전체를 둘러싼 대성벽을 축조하고 바깥에 외성벽을 한 겹 더 쌓았다.

링은 워낙 넓은 길이라 슈테플 전망대에서 보아야 그 모양과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링을 따라 가상의 성벽을 세우고 바깥쪽의 건물들을 지우자 중세 도시 빈이 보였다. 그 큰 제국의 수도가 그토록 작았다니 믿기지 않았다. 서울 남산 전망대에서 본 한양도성이 떠올랐다. 숭례문-서대문-인왕산-북악산을 돌아 낙산-동대문을 거쳐 남산으로 다시 이어지는 한양도성의 길이는 18.6 킬로미터다. 그것이 조선의 수도 한양의 크기였다. 링은 북쪽 도나우 운하 구간까지 다 합쳐도 5.4킬로미터에 지나지 않는다. 정복전쟁으로 영토를 넓힌 제국의 수도라면 그렇게 작을 수 없었을 것이다. 높고 두꺼웠던 빈의 대성벽은 합스부르크의 권력자들을 지배했던 두려움을 드러낸 건축물이었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그런 감정을 이겨냈기에 그 성벽을 길로 바꾸는 결단을 할 수 있었다.

대성벽이 없었다면 빈은 일찍이 이슬람 세계에 편입되었을지 모른다. 1453년 비잔틴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오스만제국 군대는 여세를 몰아 헝가리와 체코 일대를 장악한 다음 1529년 빈을 포위했다. 빈 다음 차례는 독일과 프랑스였다. 유럽 기독교 세계는 공포의 도가니에 빠졌다. 그러나 빈은 오스만제국 군대의 포위 공격을 견뎌냈다. 성벽을 더 튼튼하게 쌓아 1683 년 오스만제국의 두 번째 포위 공격도 물리쳤다. 알프스의 겨울 추위를 견디지 못해 철수한 적군의 요새에서 청동 대포를 3백 개 넘게 노획한 빈 사람들은 그것을 녹여 18톤짜리 종을 만들었다. 그게 빈의 대표 볼거리 가운데 하나인 품메린(Pummerin)이다. 슈테플 하단에 매달아 두었던 품메린이 제2차세계대전 막바지 러시아군의 폭격에 맞아 크게 부서지자 오스트리아정부는 전쟁이 끝난 후 무게가 4톤이나 늘어난 두 번째 품메린을 만들어 슈테판 성당의 북탑인 '독수리탑'에 걸었다.

그들은 간절한 소망을 담아 품메린을 제작했다. 침략자의 대포를 녹여 만든 종을 울리면서 도시의 안전과 평화를 빌었다. 슈테플에 첫번째 품메린을 걸 때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였던 장면은 그림으로, 두번째 품메린을 독수리탑에 올리던 광경은 사진으로 남아 있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오스트리아공화국이 영세중립국을 선포하고 국제사회의 승인을 받음으로써 빈 시민들은 그 오래된 평화의 소망을이루었다. 품메린은 쇳덩어리가 아니라 소망의 덩어리였다. 전쟁·파괴· 학살이 없는 세상을 갈구하는 소망의 덩어리.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큰 종인 슈테판성당의 품메린.
무게 20톤. 유럽에서는 세번째로 크다. 1711년 제작
사진출처 : 정준극 블로그



빈에서는 원하는 원치 않는 프란츠 요제프(Franz Joseph, 1830-1916)황제를 만나게 된다. 대성벽을 철거한 그는 빈의 '넘버3 셀럽'이다. 왕궁· 박물관·미술관. 카페 • 기념품점 등 어디나 초상화와 사진이 걸려 있다. 벌어진 머리에 허연 카이저 콧수염을 달고 훈장이 주렁주령 붙은 제복을 입은 남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 요제프 황제는 열여덟 살이었던 1848년 유럽 전역을 휩쓴 혁명과 사회적 혼돈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큰아버지 페르디난트 1세한테 왕위를 넘겨받았다. 규칙적으로 생활하고 열심히 일하면서 68년이나 재위했던 그는 만만치 않은 정치적 수완을 과시했다. 처음에는 시민의 자유를 폭넓게 보장하는 헌법을 제정해 민심을 수습했지만 혁명의 폭풍우가 잦아들자 그 헌법을 파기하고 전제군주제로 복귀했다. 독일 남부와 오스트리아·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등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던 황제는 1914년 사라예보에서 벌어진 황태자 부부 암살사건의 책임을 물어 세르비아를 침공함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의 방아쇠를 당겼다. 유럽이 전쟁의 화염에 불타고 있었던 1916년 세상을 떠났으니 합스부르크제국의 사실상 마지막 황제였다고 할 수 있다.

예술사 박물관의 프란츠 요세프 황제 흉상


1918년 겨울에 일어난 자유주의혁명으로 합스부르크제국은 영원히 사라졌다. 독일어를 쓰는 주민이 다수인 지역에는 오스트리아 공화국이 들어섰고 제국의 나머지 영토에는 여러 국민국가가 생겨났다. 혁명의 진원지는 19세기 후반 생긴 빈 외곽의 노동자 밀집 구역이었다. 1920년대 이후에는 시정부가 주택난을 해결하려고 조성한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정치적 변화의 중심으로 등장했다. 그 지역은 노동자의 권리와 시민의 자유, 복지 확대를 주도한 사회민주당의 강력한 기반이었고 1934년 2월 사회당이 주도했던 반독재 무장봉기의 발화점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는 동안 빈은 주택 27만 채가 무너지고 공공건물과 공장의 1/4이 부서지는 피해를 입었다.

요제프 황제를 오늘의 빈을 창조한 주역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가 통치했던 19세기 후반에 빈은 예술 · 건축 · 문학 · 의학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유럽 최고 수준의 도시가 되었다. 우리가 지금 보는 빈은 어쨌든 그가 성벽을 철거한 덕분에 태어났다. 그는 새로운 문화를 북돋운 계몽 군주도 아니었지만 시대의 흐름을 거역한 반동적 전제군주도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백 년 세월이 흘렀는데도 빈 시민들은 황제를 잊지 않았다. 빈 사람들이 사랑하는 엘리자베트 황후 남편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훈데르트바서

1928년 번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훈데르트바서의 원래 이름은 프리드리히 슈토마시(Friedrich Stowasser) 있는데 성인이 된 후 프리맨스라이히 레겐탁 둥켈분트 훈데르트바서 (Friedenstelech Regentag Dunkelbunt Hundertwasser)로 개명하고 뉴질랜드 국적을 얻었다. 스스로 지은 그 긴 이름은 ‘평화로운 땅에서 비 내리는 난 신비로운 천연색으로 흐르는 여러 갈래 강물’쯤으로 번역할 수 있겠다. 훈데르트바서는 그저 뛰어난 건축가였던 게 아니라 화가, 자연주의 철학자, 환경운동가이기도 했다. 이 특이한 예술가의 철학과 작품 세계를 더 깊게 들여다보고 싶어서 '훈데르트바서 박물관'으로 운영하는 시립예술회관(Kunsthaus Wien)으로 반건읍을 옮겼다.

훈데르트바서하우스에서 예술회관까지 '골목길 산책'은 그 자체로서도 즐길만한 이벤트였다. 서민 주거 지역의 일상적 풍경을 감상하면서 최대한 천천히 걸었는데도 10분이 채 걸리지 않을 만큼 가까웠다. 훈데르트바서 박물관의 전시품은 대부분 청년 시절 이후 그린 그림이었는데, 모든 작품을 관통하는 시각적 특징을 알아보는 데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 다양하고 강렬한 색, 그리고 빙빙 도는 '나선(螺線). 작품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담은 텍스트를 충분히 제공한다는 점 때문에 이 박물관은 아주 마음에 들었다.

훈데르트바서는 집만 잘 지은 게 아니라 말도 멋지게 했다. "직선에는 신이 없다" "진짜 문맹은 창조적으로 일하지 못하는 것" "나는 집을 고치는 의사"라는 말로 자신의 철학과 세계관을 표현했다. 그는 이렇게 믿었다. '인간은 자연에 기생하는 생물이다. 얇은 피부를 옷으로 덮고 집에서 산다. 그 집은 사회의 보호를 받으며 사회는 지구 행성의 자연환경 안에 존재한다. 따라서 집을 지으면서 자연을 파괴해서는 안 된다. 자연과 소통하고 교감하고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훈데르트바서 박물관을 보니 훈데르트바서하우스를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었다. 앞뒤를 바꾸어 보았다면 더 좋았을 뻔했다. 훈데르트바서는 자연의 곡선과 자연의 색을 존중했고 흙, 숯, 돌, 벽돌과 같은 자연의 재료를 사용해 예술적 감정을 표현했다. 인간이 만든 직선의 경계를 버리고 자연의 곡선에 녹아들도록 집을 지었으며 지붕에 숲을 만들고 발코니에 나무가 자라게 했다. 그가 만든 미래형 주택단지 미니어처는 스머프의 움집과 비슷했다. 호모사피엔스 개체 수가 지금의 1/100 정도로 줄어든다면 그런 집을 짓고 살게 될지도 모르겠다. 숲 살리기 운동, 반핵 운동, 고래 보호 운동에 참여하는 한편 식물을 이용한 정수 시스템을 개발하기도 했던 훈데르트바서는 2000년 2월 항해 중이던 배에서 세상을 떠났고 뉴질랜드에 만들어 두었던 '죽은 자들의 행복한 정원' 나무 아래 묻혔다.


빈틈없는 도시

오래된 도시들은 저마다 역사의 상처를 지니고 있다. 아테네는 의도와 무관하게 상흔이 드러나고 부다페스트는 일부러 드러내며 파리는 감추었지만 보인다. 그런데 빈에서는 그런 것을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었다. 사람으로 치면 '사기 캐릭터'였다. 부잣집에서 태어난 수재인데 잘생겼고 키도 크다. 손꼽는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가족 기업을 넘겨받아 성공적으로 경영한다. 예술적 감각을 지닌 교양인에다 성격마저 원만해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산다. 약점이라고 할 만한 게 없다. 빈은 그런 사람 같았다. 부러워하거나 시샘할 수는 있지만 흉보기는 어려웠다.

여행에도 '상대성원리'가 적용되는 게 아닌가 싶다. 빈만큼 또는 빈보다 더 대단한 도시에서 온 여행자라면 모든 게 좋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빈틈이라고는 보이지 않아서, 너무 완벽해서, 내게 편하지만은 않았다. 오스트리아는 한국보다 부유하고 빈은 지구 행성에서 가장 호화로운 도시다. 건물도 거리도 사람도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노점상이나 거리 음식은 아예 없었고, 치안도 완벽해서 소매치기 걱정 따위는 할 필요가 없었다.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아무 문제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비가 내릴 때는 모두 실내에 머무는지 거리가 텅 비었다. 우산을 들고 걷는 이조차 드물어서 우리도 준비한 비옷을 꺼내지 않고 카페와 박물관에서 시간을 보냈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빈이라고 상처가 없는 건 아니다. 수많은 역사의 상흔을 덮어버리는 데 완벽하게 성공해서 보이지 않을 뿐이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정치적 후진성은 시씨 황후의 아름다움과 바로크 궁전의 화려함으로 가렸다. 독일과 합병해 자의 반 타의 반 인류에 대한 범죄를 저질러 놓고서도 나치 잔재 청산 작업은 하지 않은 채 영세중립국으로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았다. 유엔 사무총장 연임한 쿠르트 발트하임은 나치 돌격대 가입과 독일군 중위 복무 사실이 드러나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았지만 무난히 대통령에 뽑혔다. 독일은 모든 도시 모든 장소에 홀로코스트의 기억을 되새기는 공간과 시설을 만들어두었지만 빈에서는 일부러 찾아다니지 않으면 볼 수 없다. 그라벤의 삼위일체상도 페스트의 참극을 모르는 여행자에게는 그저 멋지게 금박을 두른 종교적 조형물일 따름이다.

그렇지만 빈이 싫지는 않았다. 편하진 않아도 좋았다. 기회가 생기면 또 가고 싶다. 빈 사람들이 역사의 그늘과 상처를 지운 방법이 괜찮아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다. 빈은 가치 있는 그 무엇을 이룬 사람을 돋보이게 만드는 방식으로 그 일을 해냈다. 중앙역에서 부다페스트행 기차를 기다리면서 빈에 대한 기억을 정리했다. 가장 뚜렷한 기억의 대상은 사람이었다. 요제프 황제, 시씨 황후, 모차르트, 클림트, 훈데르트바서………… 그리고 그들의 인생이 묻은 문화유산이었다. 내가 아직도 모르는 사람들과 그들의 유산이 빈에는 더 많이 있을 것 같았고 또 오면 더 알게 되리라는 기대가 들었다. 한 번의 탐사로 다 알기에는, 빈이 가진 게 너무나 많은 듯했다.

유시민 / ‘유럽도시기행2’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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