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걷기

독일 드레스덴

송담(松潭) 2022. 11. 20. 18:28

독일 드레스덴

 

1.

가해자의 상처

 

드레스덴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던 날을 기억한다. 1995년 2월 13일이었다. 독일 유학 중이던 나는 그날 아침 신문에서 '드레스덴 폭격' 관련 보도를 처음 보았다. 눈에 잘 띄지 않는 면에 실린 그리 크지도 않은 기사였다. 그 폭격의 표적이 독일군과 군사시설이 아니라 드레스덴이라는 도시 자체였다는 사실에 나는 크게 놀랐다. 연합국 공군은 전쟁 막바지에 인구 10만이 넘는 독일 도시의 군사시설과 철도역, 군수공장 등을 폭격했는데 조준이 빗나가 주택이나 교회 건물에 폭탄이 떨어진 일은 많았다. 그러나 드레스덴처럼 도

시 전체를 잿더미로 만든 경우는 없었다.

 

영국과 미국 공군은 1945년 2월 13일 밤부터 사흘 동안 네 차례 번갈아 드레스덴을 '융단폭격'했다. 그때마다 고열의 화염폭풍이 도심을 집어삼켰다. 군수품 공장과 기차역뿐 아니라 주택 · 상점 · 호텔·술집·교회· 성당 · 병원 · 오페라하우스 · 영화관 · 동물원 · 학교 · 엘베강의 선박까지 도심 반경 3 킬로미터 안에 있던 모든 것이 터지고 녹고 부서지고 불탔다. 사망자만 20만 명이라며 연합국을 비난한 나치 정부가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다. 그 폭격의 사망자와 부상자가 몇인지는 정확하게 말할 수 없다. 전쟁이 끝나고 여러 해가 지난 뒤에도 무너진 건물에서 시신이 나왔고 지하 방공호 한군데서 1천여 명의 시신을 찾은 일도 있었다. 체코 접경지 수데텐란트(Sudetenland, 보헤미아의 독일 국경 인접 지역)에서 쫓겨나 드레스덴에 임시 거처를 마련했던 피난민들은 거주자 통계에 잡히지도 않았다. 당시 시신을 수습한 사망자만 3만5천 명이 넘었다. 독일이 '엘베의 피렌체'라고 자랑했던 드레스덴에는 공장 몇 개 말고는 전쟁과 관계있는 시설이 없었는데도 연합국 공군은 엄청난 양의 폭탄을 투하했다.

 

드레스덴 폭격 50주년인데도 독일 정부는 희생자 추모 행사를 하지 않았고 텔레비전 방송은 짤막한 뉴스만 내보냈다. 기사를 보여주며 물어보았더니 독일 친구가 나지막이 말했다.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내놓고 말하지 않는 사건이야. 우린 그보다 더 못된 짓을 훨씬 많이 했거든. 홀로코스트만 있었던 게 아니야. 코번트리(Coventry) 같은 곳도 한두 군데가 아니었어. 혹시라도 그 사건 가지고 막 떠드는 사람 만나면 조심해야 해. 올드나치거나 네오나치일지 모르니까." 코번트리는 잉글랜드 내륙의 작은 도시다. 재규어를 비롯한 고급 승용차 공장이 있어서 전쟁 때 군수물자를 생산했다. 1940년 11월 14일밤 독일 공군이 코번트리를 폭격해 수천 명의 민간인을 살상했다. 코번트리 시민들은 그때 완전히 무너진 중세 성당을 그 상태로 보존하고 바로 옆에 새 성당을 지었다. 드레스덴은 '가해자의 몸에 남은 상흔'이었다. 독일 사람들은 그 상흔을 남몰래 만질 드러내 보이지않으려 했다.

 

폭격 이야기를 알고 25년 넘는 세월이 흐른 후에야 드레스덴을 구석구석 돌아보았다. 중앙역에서 성모교회가 있는 '역사적 구시가’까지 걸으면서 특이한 공간 구조와 건축양식을 만났다. 그런 것을 보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성모교회만이 아니라 드레스덴 전체가 하나의 흉터였다. 독일연방공화국은 열여섯 개의 주가 있고, 작센주 수도 드레스덴은 독일에서 열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다. 주정부와 의회 청사가 있고 공과대학·미술대학 · 음악대학 등 여러 개의 고등교육기관이 있으며 정보통신 · 나노 · 제약 · 광학 · 자동차 부품 등의 제조업이 탄탄하다. 성모교회와 왕궁을 비롯한 중세 건축물은 시내를 동에서 서로 관통하는 엘베강 좌안의 '역사적 구시가'에 있고 우안의 '성안 신시가'는 바로크 스타일의 주택이 많으며 그 바깥쪽 '성밖 신시가'에는 서민들이 산다. 집중 폭격을 당했던 강 좌안에는 중세, 근대, 사회주의 시대, 통일 이후 지은 건물이 뒤섞여 있었다.

 

1945년 2월의 참극을 모르면 오늘의 드레스덴이 왜 지금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성모교회를 포함해 구시가의건축물과 광장과 공간은 모두 복원하거나 신축한 것이다.

 

2.

부활의 서사

 

 

지금의 드레스덴 성모교회는 1743년 완공한 옛날 건축물이 아니다. 여러 산업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기술 수준을 자랑하는 독일의건축가와 예술품 복원 전문가들이 십 년 넘는 시간을 들여 완성한 최첨단 건축물이다. 겉은 옛날과 거의 같지만 속은 완전히 달라졌다. 티타늄 뼈를 이식하고 되살아난 슈퍼 히어로 영화의 주인공과 비슷하다.

 

게오르게 베어는 작센의 '토종 건축가'였다. 원형 돔을 씌운 대형건축물이 있는 로마나 피렌체에는 가본 적이 없었다. 그가 죽은 후 업무를 넘겨받은 건축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성모교회는 누구나 감탄할 만큼 크고 멋졌다. 너비 42미터 길이 50미터인 건물위에 종 모양의 지붕을 얹고 첨탑까지 올렸으니 왜 그렇지 않았겠는가. 지붕의 아래쪽은 지름 26미터에 두께 2.3미터, 위쪽은 지름 10미터 두께 1.3미터였다. 첨탑 꼭대기까지 91 미터가 넘었고, 62미터 높이에 시내를 내려다보는 광실(光室, Laterne)을 넣었다. 드레스덴의 자랑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설계부터 시공까지 모든 것이 어긋난 부실 건축물이었기 때문이다. 구조의 결함은 완공 직후 곧바로 드러났다. 비극의 진앙은 지붕이었다. 원래 계획대로 나무로 만들고 곁에 구리를 씌웠어도 문제는 있었을 터인데 사암으로 바꾼 탓에 당시 기술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결함이 생겼다. 집은 중력을 이겨내야 무너지지 않는데, 1만 톤이 넘는 지붕의 무게를 버티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건물 안쪽에 사암 기둥을 여덟 개나 쌓고, 접합부의 수를 줄이기 위해 최대한 큰 돌을 썼다. 성가대석과 오르겔의 위치도 바꾸었다. 그러나 지붕의 하중을 고루 분산하지 못했다. 기둥의 수평을 맞추지 못했고 기둥 돌의 접합부를 완전 밀착하는 데도 실패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외벽 돌 틈에 풀이 자라기 시작했고 여기저기 균열이 생겨 비가 많이 오면 물이 새어들었다. 지붕이 통째로 무너져 내리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근본적 해결책 없이 끝없이 보수공사를 했던 부실 건축물은 1945년 2월 13일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최후를 맞았다. 폭탄이 우박처럼 쏟아지자 나치를 추종한 개신교 단체가 본부로 쓰던 성모교회의 외벽이 부서졌고 나무를 많이 쓴 내부에 불이 붙었다. 사암은 무른 돌이어서 드레스덴 시내 전체를 휩쓴 섭씨 1천 도의 열 폭풍을 견디지 못했다. 기둥과 지붕이 모두 무너져 시커멓게 불탄 돌무더기만 남았다.

 

그런데 그 폐허조차 온전하게 남지 못했다. 종교를 좋아하지 않았던 동독 공산당 권력자들은 목록을 작성해 두었던 850개의 돌덩이 중 절반을 가져다 강변의 '브륄 테라스' 보수 작업에 썼다. 남은 돌무더기를 함석판으로 덮어놓았다가 그마저 다 밀어버리고 공원을 조성하려고 했다.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드레스덴 시민들의 반대 때문이 아니라 돈이 없어서였다. 성모교회의 재건을 바란 시민들은 폐허 주변에 장미를 심고 시신조차 남기지 못한 채 증발해버린 폭격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집회를 열었다. 그러자 동독 정부는 성모교회의 폐허를 반전(反戰)의 상징으로 선포하고 냉전 종식과 세계평화를 요구한 드레스덴 시민들의 집회를 서방 진영을 비난하는 선전 도구로 이용했다.

 

하지만 드레스덴 시민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1980년대 중반부터 집회의 성격을 바꾸어 인권과 자유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오페라하우스를 복원하고 왕궁 복원사업을 막 시작했던 시정부는 다음 차례에 성모교회를 복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상황은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렀다. 드레스덴 시민 수천 명이 중앙역 일대에서 연일 민주화 시위를 벌이던 1989년 가을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국경통제소 문이 열렸고 서베를린을 둘러싸고 있던 장벽이 무너졌다.

 

성모교회의 운명도 반전의 계기를 맞았다. 동서독 정부가 본격적으로 통일 방안을 논의하던 1990년 2월 12일 작센주의 교회 지도자들이 <드레스덴의 호소(Ruf aus Dresden)>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여러 후원 단체가 기부금 모집을 시작했고 사업을 수행할 재단이 출범했다. 1994년 기초 작업을 시작해 1996년부터 2005년까지 집중적인 작업을 한 끝에 완료한 성모교회 복원사업 비용은 무려 1억 8천만 유로였다. 비용의 2/3는 기부금으로 충당했는데 영국과 미국의 기업과 개인의 기부가 적지 않은 몫을 차지했다.

 

성모교회는 구조만 튼튼해진 게 아니라 기능도 좋아졌다. 원래 있던 광실보다 조금 높은 곳에 전망대를 설치하고 지붕부터 지하까지 완벽하게 방수조처를 했으며 냉난방과 전기 조명 시설을 완비하고 화장실과 외투 보관실 같은 부속 공간도 확충했다. 5천 개 가까운 파이프가 있는 오르겔을 들였고 성가대석도 안전한 금속 소재로 바꾸었다. 이탈리아 화가 그로네(G. B. Grone)가 1734년 그렸던 천장의 그림은 고증에 필요한 자료가 다 타버려서 어려움을 겪었지만 거의 비슷하게 재현해냈고 종탑과 시계탑도 새로 제작했다. 첨탑의 십자가는 온전한 형태로 남았지만 열 손상을 입었기 때문에 도금한 광륜(光輪)으로 변경했다. 광륜을 제작한 공예가는 드레스덴 폭격에 참여했던 영국 공군 조종사의 아들이었고 비용은 영국 은행이 지불했다. 그래서 그것을 '화해의 십자가'라고 한다.

 

2005년 2월 13일 성묘교회는 공식 부활했다. 안에서는 60년 전 그날의 폭격 희생자 추모 행사를 열었고 광장에는 6만여 명의 시민이 모였다. 전쟁의 참상을 증언하던 폐허가 시민의 자유와 독일의 통일을 상징하는 교회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날 이후 성모교회는 공연장이 되었다. 일요일 오전과 저녁 예배에는 합창단이 노래하고 평일정오와 저녁 기도 시간에는 오르겔 연주를 한다. 일요일 낮에는 종교 음악 연주회나 오르겔 콘서트를 연다. 내가 크리스천이라면 합창단이 노래하는 일요일 예배를 빠뜨리지 않을 것 같았다.

 

3.

 

사실 작센주는 예나 지금이나 변두리가 맞긴 맞다. 세력이 약했고 독일 역사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도 않았다. 주 도인 드레스덴도 마찬가지다. 남북 23 킬로미터 동서 27킬로미터 정도인 드레스덴은 숲과 녹지가 도시 면적의 60%가 넘고 문화재로 지정 보호하는 정원 · 공원 묘지가 많으며 엘베강의 지류와 개천들이 곳곳에 흐른다. 20세기 중반 인구가 64만 명을 넘겨 독일에서 다섯 번째로 많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직후 47만 명 선으로 급감한 이래 계속 줄어들다가 최근 들어 독일 최고 출산율을 기록하면서 56만 명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상주 외국인은 인구의 6%로 다른 대도시보다 현저히 적고 외국인 관광객도 많지 않다. 베를린이나 프랑크푸르트에는 견줄 수 없는 '시골'이다.

 

옛 동독 도시들은 전반적으로 국제화 흐름에서 뒤떨어졌는데 드레스덴은 특히 그렇다. 작센주의 엘베계곡 인근 지역은 한때 '무지의 계곡(Tal der Ahnungslosen)'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통일 이전에 동독 사람들이 만든 말인데, 정확하게 번역하면 '뭘 모르는 사람들의 동네'쯤 된다. 작센 사람들이 남달리 못난 데가 있었던 게 아니다. 동서독 정부는 통일 한참 전에 방송을 상호 개방했기 때문에 동독 사람들도 서독의 경제발전 수준과 정치 상황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동서독 국경에서 먼 엘베계곡 일대에서는 서독 텔레비전과 라디오 전파를 수신하기 어려워서 정보가 부족했다. 동독 시민운동가들이 모금해서 위성안테나를 세우고 가정집에 케이블을 설치하는 운동을 벌였지만 큰 성과가 없었다. 작센 사람들은 동독체제에 대한 불만이 상대적으로 적었고 통일 이후 새로운 사회에 적응하는 데 남들보다 큰 어려움을 겪었다. 드레스덴은 그런 지역의 대표 도시답게 분위기가 소박하고 정겨웠다.

 

유시민 / ‘유럽도시기행2’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