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걷기

신선이 덮는 이불을 발밑에 두고

송담(松潭) 2024. 3. 26. 06:08

 

신선이 덮는 이불을 발밑에 두고

 

 

시간, 공간, 인간, 한세상 사는 일은 이 3간을 통과하는 일이다. 이 3간 중에서 비교적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공간이다. 상대적으로 시간, 인간은 자기 마음대로 바꾸기 어렵다. 공간이 바뀌면 시간의 흐름도 달리 흘러간다. 교도소에서 보내는 시간과 영화관에서 보내는 시간의 흐름은 다르다. 그 공간에서 만나는 인간의 종류도 달라진다. 그러니까 어떤 공간에 있느냐가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더군다나 자기에게 기쁨을 주고 세상의 시름을 달래주는 특정한 공간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차인(茶人) 나광호 선생을 만나 보니, 이 사람은 생계 활동 이외의 시간만나면 지리산 형제봉을 올라가는 게 일이다. 형제봉에만 올라가면 삶의 의미가 느껴진다고 한다. 형제봉은 지리산 자락이 남쪽의 섬진강 자락으로 내려오다가 멈춘 봉우리이다. 악양 들판을 말발굽처럼 'U'자로 둘러싸고 있는 봉우리의 한쪽 끝이 형제봉이다. 1200m에 가까운 높은 봉우리이다. 봉우리 정상에는 행글라이더를 타는 활공장이 있어서 비교적 평평한 공간이 있다. 형제봉은 지리산 일대의 최고 전망대이다. 360도가 모두 전망이 좋다. 바로 코앞의 구제봉, 칠성봉부터 시작하여 구례쪽의 왕시루봉도 보이고 노고단, 반야봉, 촛대봉, 동쪽 함양, 산청의 천황봉까지 파노라마로 볼 수 있는 위치이다.

 

산봉우리만 보이는 게 아니다. 형제봉 밑으로는 섬진강이 감아 돌아흘러간다. 산봉우리만 있고 강이 없으면 홀아비와 같은데, 그 곱디 고운 섬진강의 푸른 물이 부드럽게 허리를 감아 돈다. 비 온 뒤에 섬진강에서 하얀 연기 같은 운무가 부풀어 오르는 광경을 보면 저절로 '정치독(政治毒)이 빠진다. 특히 달이 떴을 때 형제봉 정상에 올라가 보면 광양 백운산 너머의 남쪽 바다에서 올라오는 해무와 섬진강의 강물에서 올라오는 운무가 섞이어 비단 이불 같은 형상을 만든다. 천상계의 신선들이 덮는 하얀 운무의 이불을 발밑에 딛고 서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이다.

 

하동 금오산 방향에서 떠오르는 일출을 보는 것도 장관이고, 구례쪽으로 지는 석양을 바라다보면 온갖 분노가 사라진다. 불가의 《무량수경無量壽經》에서는 석양을 자주 관조하면 저절로 욕심과 분노가 사라져서 도가 닦인다고 말한다. 형제봉에 미친 나광호 선생은 아예 형제봉 옆 부춘마을에 집까지 장만했다. 서울에만 있으면 아파트, 주식, 명품만 보인다. 자연에 나와 보면 일출과 석양, 달빛의 운무가 '우물쭈물하다가 한세상 다 간다'라고 귀띔한다.

 

조용헌 / ‘내공’중에서

 

 

사진 출처 : 느티나무의 세상사는 이야기

 

 

 

사진 출처 ;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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