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걷기

체코 프라하

송담(松潭) 2022. 11. 18. 19:33

체코 프라하

 

 

사진출처 : 네이버 포스트

 

1.

 

체코공화국 국토는 세 지역으로 나뉘는데 중부와 서부의 보헤미아(Bohemia)가 국토의 대부분이고 동부에 슬레스코와 루사티아라는 두 지역이 붙어 있다. 라틴어 지명 보헤미아는 이곳을 점령한 로마제국 군인들이 켈트족의 지파 ‘보이’족이 산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었다. 체코 말로는 보헤미아를 체키(Čechy), 주민들을 체크(Cech)라고 한다. 국호 체코공화국(Česká republika)도 여기서 나왔다. 체코인은 슬라브족의 한 갈래다. 로마제국 시대에 켈트족을 밀어냈던 게르만족이 서쪽으로 떠난 5세기 이후 그들이 보헤미아를 차지했다. 체코와 보헤미아는 같은 말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체코공화국은 인구는 2020년 기준 1,100만 명에 조금 못 미친다. 국민 대부분이 체코인이며 소수의 모라비아인과 슬로바키아인, 독일인과 집시가 거주한다.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연방공화국을 형성했으며 사회주의체제가 붕괴하자 슬로바키아가 분리 독립했다. 종교는 로마 가톨릭이 강세이지만 무신론자가 국민 절반이나 된다. 슬로바키아(동), 독일(서), 오스트리아(남), 폴란드(북)에 둘러싸인 내륙 국가로, 국토는 대한민국의 3/4 정도이고 1인당 국민소득은 2만 5천 달러에 육박한다. 화폐는 '코루나'이지만 프라하에서는 큰 불편 없이 유로화를 쓸 수 있었다. 체코의 전통산업은 농업과 목축업이었으나 19세기부터 철강·기계·전기·자동차 · 화학 · 의류 등 제조업이 꾸준히 발전했다. 인구 130만 명인 프라하는 제조업과 관광업·문화산업의중심으로서 국내총생산의 25%를 차지하며 1인당 역내총생산(GRDP)이 5만 달러나 된다. 맥주와 유리공예품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경제적으로 중요하진 않다.

 

2.

 

체코 역사는 여러 면에서 헝가리와 닮았다. 체코인은 머저르족이 부다페스트를 차지한 것보다 조금 앞선 9세기말 보헤미아에 최초의 왕국을 세웠다. 그러나 체코인의 왕조는 그리 오래지 않아 무너졌고, 14세기 이후 룩셈부르크 가문을 거쳐 빈의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지배권이 넘어갔다. '민족사'의 관점에서 보면 비극이라고 할 수 있지만 프라하는 그로 인해 새로운 기회를 얻었다. 프라하에서 태어난 룩셈부르크 왕가의 카렐 1세가 1355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렐4세가 되자 위상이 크게 높아져 상업이 번창하고 신흥 부자가 대거 출현했다.

 

부계는 룩셈부르크 왕가이고 모계는 보헤미아 왕가였던 카렐 4세는 1346년 보헤미아왕으로는 처음으로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었다. 프랑스식 교육을 받았고 라틴어와 체코어 •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를 구사했으며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전쟁에 참가했던 그는 프라하를 신성로마제국의 수도로 삼았고 신시가지를 조성했다. 뿐만 아니라 중부 유럽 최초의 대학을 설립해 관료와 법률가를 양성하고 학문 연구와 예술 활동을 장려했다. 프라하성과 성 비타 성당건축도 그가 주도했다. 자녀들의 정략혼인을 통해 독일에 대한 영향력을 키웠고 스위스 티롤 지방과 이탈리아 북부로 영토를 확장했으며 세 아들과 조카에게 땅을 나누어 주었다. 체코 사람들은 보헤미아의 황금기를 연 군주였던 그를 국가의 창설자로 여긴다. 대학과 교량과 광장 등 그의 이름을 붙인 곳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3.

 

‘프라하의 봄’은 1956년 가을에 일어났던 헝가리 반소 민주주의 혁명과 거의 같은 사건이었다. 1968년 봄 지식인들과 대학생들의 투쟁과 민중의 지지에 힘입어 체코슬로바키아공산당 서기장이 된 슬로바키아 태생의 반나치 전사 출신 두브체크(Alexander Dubček, 1921-1992)는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구호를 내세워 중앙집권적 관료주의적 경제체제를 자유화하고 복수정당제와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화 개혁을 추진했다. 소련 정부는 이러한 흐름이 동유럽 전체로 퍼져나가는 사태를 막으려고 1968년 8월 21일 군사개입을 감행했다. 동독과 루마니아를 제외한 폴란드·헝가리 불가리아 등 바르샤바조약기구의 50만 병력이 탱크를 앞세우고 체코슬로바키아를 침략해 주요 도시를 점령했다. 체코 사람들은 헝가리 사람들과 달랐다. 그들은 프라하 시내에서 격렬한 전투를 한 적이 없다. 싸울 만하다싶으면 후스전쟁 때처럼 외곽에 나가서 싸웠고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면 싹싹하게 항복했다. 헝가리 사람들은 비웃지만 체코 사람들의 태도를 마냥 비난하기는 어렵다. 전투라고 할 만한 전투 없이 상황이 종결되었기 때문에 전사자는 양측을 다 합쳐도 15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헝가리 반혁명 때처럼 이번에도 나토는 소련과의 전면전을 피하려고 군사적 대응을 회피했다.

 

두브체크와 개혁파 지도자들이 모스크바로 잡혀가고 체코슬로바키아공산당이 굴복했는데도 끝까지 무기를 들고 싸운 시민 백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밖에서 응원한 것은 동독 시민들뿐이었다. 소련의 침략을 규탄하고 체코슬로바키아 시민들을 응원하는 시위를 하다가 1천 명이 넘게 체포 구금되었다. '프라하의 봄'이 허망하게 끝나자 10만여 명의 체코슬로바키아 국민이 나라밖으로 탈출했고 7만여 명은 여름휴가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주로 숙련 노동자와 지식인이었던 그들은 오스트리아와 독일로 망명했다. 1989년 여름 동독에서 벌어졌던 것과 똑같은 사태였다. 그 해가 저물 무렵까지 개혁에 동참했던 공산당원 50만 명이 당적을 박탈당했다.

 

4.

 

마지막 오후를 조용하고 문화적인 분위기에서 보낼 심산으로 큐비즘 박물관을 찾았다. 큐비즘(Cubism, 입체파)은 20세기 초 파리에서 탄생했는데, 피카소(Pablo Picasso)와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가 주역이었다. 큐비즘 작가들은 존재하는 것을 보이는 대로 재현하는 전통적 기법을 거부했다. 원근과 명암을 무시했으며 색채와 공간을 분해하고 재조립했다. 평면인 화폭을 입체로 보이게 했으며 신문지나 담배 케이스 같은 재료를 그림에 결합시켰다. 출발은 회화였지만 조각, 건축설계, 실내장식, 공예 등 여러 분야로 퍼져나갔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전까지 프라하는 파리 다음으로 큐비즘 운동이 활발한 도시였다. 그때까지 빈 분리파의 영향권에 있었던 보헤미아 예술가들은 큐비즘을 받아들여 표현주의(Expresieninen)와 결합했다. 고흐나 뭉크의 작품에서 보듯 표현주의 예술가들은 선과 색채를 왜곡 과장해 강렬한 감정을 드러냈다. 이 둘을 결합했던 체코예술가들은 스탈린의 '미학적 독재’ 시기에 정체를 감추고 숨을 죽이고 있다가 1989년 벨벳혁명 이후 감추었던 자신들의 스타일을 드러냈다. 피라미드와 크리스털 결정 형태의 조형은 건축, 가구공예, 응용미술 등의 분야에서 체코 큐비즘 특유의 스타일로 인정받았다.

 

5.

 

프라하는 아름다웠다. 왕궁과 교회, 거리와 강, 카페와 박물관, 모든 것이 아기자기하게 예뻤다. 그 무엇도 대단하다고 할 수 없었지만 프라하 자체는 대단했다. 프라하는 역사의 상처를 감추지 않았고, 그 통치 때문에 고통스러워하지도 않았다. 지난날의 상흔은 지난 일로 정리하고 오늘은 오늘의 즐거움을 추구한다. 그렇게 하려고 성과 속의 공존을 허락한다. 프라하의 공기는 자유와 관용의 정신을 품고 있는 듯했다. ‘심하게 지나치지만 않다면 뭘 해도 괜찮아.’ 사람들이 프라하를 좋아하는 것은 이렇게 말하는 도시여서가 아닌가 싶었다.

 

유시민 / ‘유럽도시기행2’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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