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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날의 전원일기

비오는 날의 전원일기 토부다원 연못 잔디밭 위로 주룩주룩 비가 내리고 있다. 장마철에 내린 비지만 바람을 동반하지 않아 온순하다. 비를 맞으니 녹색은 더욱 선명해지고 전원은 한적하고 아늑하다. 봄에 모종으로 심은 채소들이 생기차고 고추, 가지, 토마토는 벌써 주렁주렁 다산과 풍요를 자랑하는 듯하다. 시원한 잔디밭과 식물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한결 평화로워지니 지난 날 아쉬워했던 것들도 다 부질없다. 법정스님께서 ‘인생은 아쉬운 듯 모자라게 살아야 행복하다.’고 말씀하셨는데 골프는 나에겐 사치여서 배우지 못했고, 가족과 해외여행이 망설여지고, 명품 같은 상징이나 이미지를 소비하기 어려운 수준에 머문 나의 경제력은 격 높은 삶을 불가하게 했다. 반면, 이러한 경제수준은 나의 무의식 깊은 곳에 꽈리를 틀고 ..

전원일기 2023.04.09

늙은이의 어느 하루

늙은이의 어느 하루 이미지 출처 : 2019.7.30 부산일보 (...생략...) 시계는 벌써 오후 6시가 지나고 해는 완전히 서편으로 기울고 있었다. 먹고 마시고 떠들고 노래 부르던 노인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산책하기를 포기하고 집으로 달려갔다. 요양보호사는 퇴근하고 딸이 와 있었다. '뚝불'을 확인하니 내가 가져다 준 그대로였다. 내자는 완전히 고개를 돌렸던 것이다. 언제나 시늉만 내려다가 말고 '완전 균형 영양식'이라고 선전하는 '뉴○○' 한 개나 블루베리 두어 개가 고작이니… 참으로 걱정이다. 내자는 3년 전에 대수술을 받고 나서 모든 생활이 완전히 위축되었고, 최근에는 요양보호사의 도움을 받아 매주 'OO치매안심센터'에 다니며 학습을 받고 있다. 체력도 형편없는 데다가 치매(?)가 ..

부부,가족 2023.03.24

파멸당할 수는 있어도 패배할 수는 없다

파멸당할 수는 있어도 패배할 수는 없다 - 어니스트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 헤밍웨이의 마지막 작품인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주인공은 멕시코 만류에서 조각배를 타고 홀로 고기잡이하는 노인이다. 산티아고라는 이름의 이 노인은 84일 동안 고기 한 마리 낚지 못했다. 산티아고는 누가 뭐래도 틀림없이 가장 운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조각배의 돛이 여기저기 밀가루 포대로 기워져 있는 것만 보아도 노인은 마치 영원한 패배자를 상징하는 듯 느껴진다. 노인은 희망도 기쁨도 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처음 40일 동안 함께 일하던 소년마저 그 부모의 반대로 노인을 떠나버렸다. 하루하루 견디기 힘든 고달픈 삶이지만 노인은 포기하지 않는다. 소년이 챙겨 준 정어리 미끼를 조각배에 싣고 홀로 바다를 향해 노를 저어 간다..

난생 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

난생 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 문학적 표현일 뿐이지 새소리는 음악이 아닙니다. 새소리는 노래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음악이 아니라 의사를 표시하는 신호에 가깝습니다. 신호는 반복하거나 복제할 수는 있지만, 웅용할 수 없죠. 다시 말해 신호는 체계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새가 기분이 좋다는 의미로 '뻐꾹' 소리를 내면 멀리서 다른 새가 자기도 기분이 좋다는 의미로 '뻐꾹' 하고 받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뻐꾹’에 다른 소리를 넣어서 기분이 매우 좋다는 의미로 확장할 수 없어요. 반면 인간의 언어는 체계가 있어요. 예를 들어 기분이 좋다라고 했을 때 여기에 부사를 덧붙여서 기분이 매우 좋다로 확장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기분이 나쁘다로 변형할 수도 있고요. 음악도 비슷합니다. 음악 ..

클래식, 음악 2023.03.15

여자경 / ‘비하인드 클래식’중에서

작품번호 클래식 중 기악곡에 제목을 붙이는 경향은 주로 낭만주의 시대에 나타났습니다. 그 이전에도 작품에 제목을 붙이는 경우는 있었지만 흔하지 않았고, 그 대신 작품에 번호를 붙였습니다. 그런데 이 방식 역시 통일되지 않아서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고는 합니다. 이 부분은 공부하려고 하기보다는 그 시대를 이해하고 넘어가면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음악을 감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장 널리 쓰이는 것은 Op. 라고 해서 '오푸스Opus'로 표기하는 경우입니다. 출판된 악보의 인세 수익을 확실히 정리하기 위해 베토벤이 적극적으로 사용하면서 일반화되었다고 해요. 그런데 앞서 하이든의 ‘종달새’가 Op.64이면서 현악 4중주 53번이라고 해서 번호가 두 개라 더 알쏭달쏭하게 느낀 분..

클래식, 음악 2023.03.08

여행은 자기자신을 되찾기 위한 질문의 여정

여행은 자기자신을 되찾기 위한 질문의 여정 쌍계사에서 불일폭포까지는 왕복 4.8킬로 미터, 2시간 정도 소요됩니다. 불일 폭포는 높이 60미터, 폭 3미터에 이르는 커다란 자연 폭포로 유명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들지요. 그런데 평일 오전이어서 그런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순간엔 폭포와 나뿐이었습니다. 폭포는 크게 보면 2단이고, 중간중간 작은 층을 포함하면 4단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당시 전국적으로 가물어서 수량이 적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나무 난간에 서서 폭포를 바라봤습니다. 절벽에서 하염없이 떨어지는 물을 하염없이 바라봤습니다. 폭포 소리는 요란한데 마음은 이상하리만큼 고요해졌습니다. 묘한 침묵을 배경으로 나는 폭포와, 아니 나 자신과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 대화를 작은 ..

여행, 걷기 2023.02.27

구본형ㆍ홍승완 /마음편지(을류문화사 출판)중에서

삶에는 새로운 페이지가 펼쳐져야 할 때가 있다 나는 융의 자서전을 수시로 꺼내 읽고 그가 정립한 분석 심리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공부했다기보다는 그냥 거기에 빠졌습니다. 융의 자서전을 읽은 후 방문을 걸어 잠그다시피 하고 한 달 내내 그의 다른 저작과 분석 심리학에 관한 책을 열 권 넘게 연거푸 읽었습니다. 자는 시간 빼고는 책만 읽었던 것 같습니다. 1년 넘게 나의 독서 목록은 융과 분석 심리학 서적으로 채워졌으며, 이후에도 오랫동안 융의 심리유형론에 기반을 둔 MBTI를 공부하고 전문 자격을 취득하기도 했습니다. 융의 사상은 난해하고 어려웠습니다. 그런데도 공부할수록 매혹되었고, 그와의 인연은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돌아보면 융의 자서전은 내게 하나의 계시였습니다. 자연의 겨울이 ..

최근 읽은 책 2023.02.16

정여울 / '문학이 필요한 시간(한겨레출판)'중에서

사랑받지 못한 자의 더 커다란 사랑 바리데기 신화는 내 마음속에 항상 언젠가 꼭 닮고 싶은 이상형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여기가 끝인가 싶을 때마다, 난 이것밖에 안 되는 존재인가 싶을 때마다 남몰래 꺼내보는 이야기가 바리데기 신화다. 바리데기는 태어나자마자 버려졌다. 오구대왕의 일곱 번째 딸, 그러니까 공주로 태어났는데도 바리데기는 공주다운 삶은 누려보지 못했다. 미처 자기 존재의 아름다움을 펼쳐 보인 기회조차 없었다. '또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버려졌다. 그 이름 자체가 '버려진 존재', 즉 허섭스레기같은 존재라는 의미를 새기고 있으니, 그렇게 철두철미하게 버려진 것으로 모자라 자기를 버린 아버지의 병을 고치기 위해 머나먼 서천서역국으로 치유의 꽃과 물을 찾아 나선다. 서천서역국은 하데스처럼 한 번 ..

정희원 / ‘당신도 느리게 나이 들 수 있습니다’중에서

우리 몸은 생각보다 더 많이 움직이도록 설계되어 있다. 하루 20킬로미터를 걷고 뛰는 정도까지는 끄떡없다. 뛰면 무릎 연골이 닳아서 없어진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물론 적절한 근골격계 내재역량을 갖추지 않고 몸이 가분수인(근골격계가 취약하고 체중이 과도한) 상태에서 견딜 수 없는 부하가 걸리면 관절이 손상된다. 하지만 근골격계 내재역량을 갖춘 상태에서 올바른 자세로 적절하게 달리면, 오히려 무릎 주변의 근육과 인대가 강화되면서 장기적으로는 관절의 마모 속도를 늦출 수 있다. 편하려고 안간힘을 쓸수록, 예컨대 더 비싼 의자를 사서 오래 앉아 있거나 가까운 곳도 차량을 타고 이동하려고 할수록 미래에 더 많은 고통을 얻는다. 걸을 때는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스마트폰을 보면서 어깨와..

인생 2023.01.24

화엄사 각황전

화엄사 각황전 마당으로 나선 운정은 대웅전을 향해 합장했다. 그리고 각황전 쪽으로 돌아서 다시 합장했다. '내가 일찍이 뭐라고 가르쳤더냐. 비구의 몸으로 생명의 인연을 만들려거든 차라리 그것을 독사의 입에다 넣으라고 하지 않았더냐.' 세존의 준엄한 말씀이 또 정수리를 내려치는 것 같았다. 운정은 고뇌스런 숨길을 다스리며 천천히 눈을 떴다. 천 근 무게로 각황전은 드높게 서 있고, 기와 이음매의 덮개가 없어 기와골이 물이랑처럼 이어진 넓은 지붕 위에는 시리도록 흰 햇살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용마루와 경계 짓고 있는 하늘은 끝 모르게 깊고 푸르렀다. 아, 저것이 필경 해탈의 빛이 아닐 것인가. 문득 생각하는 운정의 내부에는 차가운 전율이 일직선으로 뻗어내리고 있었다. 각황전을 하염없이 올려다보고 있는 운정의..

조정래 소설 2023.0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