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일기

비오는 날의 전원일기

송담(松潭) 2023. 4. 9. 05:53

 

 

 

비오는 날의 전원일기

 

 

 토부다원 연못

 

 

 잔디밭 위로 주룩주룩 비가 내리고 있다. 장마철에 내린 비지만 바람을 동반하지 않아 온순하다. 비를 맞으니 녹색은 더욱 선명해지고 전원은 한적하고 아늑하다. 봄에 모종으로 심은 채소들이 생기차고 고추, 가지, 토마토는 벌써 주렁주렁 다산과 풍요를 자랑하는 듯하다. 시원한 잔디밭과 식물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한결 평화로워지니 지난 날 아쉬워했던 것들도 다 부질없다.

 

 법정스님께서 인생은 아쉬운 듯 모자라게 살아야 행복하다.’고 말씀하셨는데 골프는 나에겐 사치여서 배우지 못했고, 가족과 해외여행이 망설여지고, 명품 같은 상징이나 이미지를 소비하기 어려운 수준에 머문 나의 경제력은 격 높은 삶을 불가하게 했다. 반면, 이러한 경제수준은 나의 무의식 깊은 곳에 꽈리를 틀고 있는 애욕을 잠재우고 일탈을 막아주었다.

 

 은퇴를 하고나니 집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이 넘쳐난다. 지인들 중 경제력이 튼튼한 사람들은 상당수 부부가 따로따로 노는 경우가 많은데 부부가 각자의 취향을 배려하면서 자칫 따분해질 수 있는 삶에 활력소를 불어넣는 것은 좋으나 노년에는 가급적 부부가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야 더 나을 것 같다. 더군다나 나는 젊은 시절 밖으로만 싸돌며 허장성세를 일삼았던 까닭에 노년에 자숙하는 것은 집사람에 대한 마땅한 예의이다. 그래서인지 전원으로 신문을 배달(지역이어서 신문이 낮에 우편으로 배달됨)해 주는 친구가 어느 날 나에게 항상 집에만 있는 것 같은데 어디 여행도 좀 다니고 그러십시오.”라고 조언했다.

 

 세상에는 은퇴 후에도 끊임없이 열정을 불태우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나의 주변에도 재직 중 열정맨으로 소문난 동료 HO는 자신의 전공과 별 관련이 없는 농업재해보험손해평가사자격증을 따고 그 분야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학원에서 강의까지 하면서 13역을 하고 있다. 그리고 공직에서 나름 성공한 친구 HG 박사도 공부에 계속 몰입하면서 전공과 무관한 각종 자격증을 획득하여 주변 친구들을 놀라게 한다. 이들은 머슬로우가 말하는 욕구충족의 최고단계인 자아실현을 위해 정진하는 사람들이고 이들의 진지한 삶의 자세는 높이 평가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산속(?)으로 들어와 보통사람들이 흔히 하고 있는 문화센터 강좌를 듣는다거나, 독서클럽 또는 사회단체에 가입하여 봉사활동 같은 것도 하지 않고 있다.

 

 이런 생활을 남들이 볼 때는 외딴 섬에 고립되어 있다고 여길 수 있다. 하지만 섬(전원)이 외로워 보여도 그 섬에 가면 오늘같이 비오는 날 한 폭의 수채화를 보게되고 이름 모른 수줍은 들꽃과, 물에 젖어 옥빛이 더 은은한 조약돌, 꽃잎에 떨어진 영롱한 물방울, 귀속을 맑게 하는 새소리까지 접할 수 있다. 어느 날 밤하늘에 반짝이는 무수한 별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먼저 떠난 가족들을 떠올리면 짠한 생각과 거기에 반짝이는 별 하나가 그리움이 되는 애잔한 밤과도 조우한다.

 

 서울 강남 아파트 한 채 가격이 평당 1억원에 가깝다. 30평이면 30억원, 60평이면 60억원이다. 이러한 비정상가격의 수혜를 받고 포만감에 젖어 사는 도시민들은 전원이 주는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기 어렵다. 미국의 유명한 목사이며 심리치료의 전문가인 하워드 클라인벨은 인간이 성장을 위해 꼭 대단한 것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사소한 것들 속에서 삶의 기쁨이 찾아온다며 사소한 기쁨의 리스트를 만들었다. 그 중 몇 가지를 소개하면 나무심기’, ‘꽃냄새 맡기’, ‘잡초 뽑기’, ‘비오는 소리 듣기’, ‘낮잠 자기’, ‘구름 바라보기’, ‘좋아하는 음악듣기’, ‘동네 산책하기’, ‘아침에 일찍 일어나 침묵에 귀 기울이기등이다. 이런 것들의 소중함을 느끼고 자족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살게 해주는 곳이 남들이 외딴 섬이라고 여기는 전원이다.

 

 며칠째 차분하게 비가 내리고 있다. 폭풍우는 계곡의 잡다한 오물을 일거에 쓸어버리는 역동성이 있고 해갈에 도움이 되어 좋지만 요즘 같이 시나브로 적당히 내리는 비는 대지를 순하고 부드럽게 해서 좋다. 나의 노년이 열정으로 가슴 뛰는 삶은 아니지만 조용히 내리는 비처럼 평범하고 단조로운 생활을 통해 허망(虛妄)을 피하고 늙음의 순리를 받아드리는 삶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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