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 것인가?

파멸당할 수는 있어도 패배할 수는 없다

송담(松潭) 2023. 3. 17. 05:18

파멸당할 수는 있어도 패배할 수는 없다

 

- 어니스트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

 

 

 

헤밍웨이의 마지막 작품인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주인공은 멕시코 만류에서 조각배를 타고 홀로 고기잡이하는 노인이다. 산티아고라는 이름의 이 노인은 84일 동안 고기 한 마리 낚지 못했다. 산티아고는 누가 뭐래도 틀림없이 가장 운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조각배의 돛이 여기저기 밀가루 포대로 기워져 있는 것만 보아도 노인은 마치 영원한 패배자를 상징하는 듯 느껴진다. 노인은 희망도 기쁨도 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처음 40일 동안 함께 일하던 소년마저 그 부모의 반대로 노인을 떠나버렸다.

 

하루하루 견디기 힘든 고달픈 삶이지만 노인은 포기하지 않는다. 소년이 챙겨 준 정어리 미끼를 조각배에 싣고 홀로 바다를 향해 노를 저어 간다. 그러다 며칠간의 사투를 벌인 끝에 자신의 조각배보다 더 큰 청새치를 잡는다. 하지만 결국 상어 떼의 공격을 받아 고기 살점을 모두 빼앗기고 말았다. 상어 떼의 습격을 받고 노인은 청새치가 아니라 마치 자신이 습격받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라는 문장은 「노인과 바다」를 대표하는 가장 의미심장한 말이다. 사실 파멸과 패배의 의미를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다. 사전적으로 파멸은 ‘파괴되고 없어짐’이고, 패배는 '겨루어서 짐'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위문장은 인간은 파괴되고 없어질 수는 있을지 몰라도 겨루어 질 수는 없다는 뜻이다.

 

리처드 바크Richard Bach 의 『갈매기의 꿈』에는 '가장 높이 나는 갈매기가 가장 멀리 본다'는 유명한 격언이 나온다. 주인공 갈매기인 조나단 리빙스턴은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다른 갈매기와 남달랐다. 대개의 갈매기에게 중요한 것은 비행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비행이란 단지 먹이를 찾는 수단일 뿐이었다. 하루 하루 먹고살기 위해 치열한 생의 의지를 불태우지만 허탕을 치는 날들이 많았고 그런 일을 겪은 갈매기들은 쉽게 지쳐갔다. 하지만 조나단에게 중요한 것은 먹이가 아니라 비행이었다. 순수한 의지로 삶을 계획한 조나단은 무엇보다도 멋지게 비행하기를 좋아했다.

 

조나단은 완벽하고 한계가 없는 갈매기가 되기 위해 매일 해 뜨기 전부터 한밤중까지 혹독하게 비행을 수련했다. 그가 동료 갈매기들 무리에서 떠나 여생을 홀로 보냈지만, 그가 슬픈 것은 고독 때문이 아니었다. 다른 갈매기들이 조나단의 멋진 비행 수련에 공감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 날개란 단지 먹이를 찾고 먹이로 인한 다툼이 일어날 때 사용하는 수단일 뿐이었다.

 

일상의 사사로운 사건들에 연연하다가 정작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갈 것인가? 중요한 것은 이번 생을 잘 사느냐 못 사느냐가 무엇에 달려 있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아내야 한다. 인생의 허무함을 깨닫는 자만이 그 허무함을 극복할 수 있다.

 

오늘이 살면서 최악의 날일 수도 있다. 어쩌면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쁠지도 모른다. 하지만 머나먼 목적지를 향해 항해하는 배처럼 우리의 인생은 오로지 전진만 있다. 세이렌의 매혹적인 노랫소리를 듣기 위해 항로를 변경하지 않고 자신을 돛대에 꽁꽁 묶었던 오디세우스처럼 말이다.

 

삶은 따뜻한 봄날에 꾸는 꿈이고, 죽음은 그 꿈에서 깨어나 깨달음을 얻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내가 다른 무엇보다도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헛된 것인지도 모른다. 드넓은 인생이라는 바다에서 오늘도 나는 절망하지 않은 채 하루하루 살아간다.

 

쇼펜하우어는 삶은 고통으로 적당히 거리를 두고 바라보라고 한다. 다시 말해 우리 인생의 광경들은 가까이에서 보면 마치 아무런 인상도 주지 못하는 거친 모자이크 그림과 같으므로 그것들이 아름답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멀리 떨어져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눈앞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들에만 매달리지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꿈과 이상을 향해 더 높이 비행하며 살아가자. 눈앞에 이익만 추구하며 아옹다옹 살지 말고, 가장 높은 경지로 날아가 고결한 존재가 되어 보자.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남들이 나의 결심을 비웃고 경멸할지라도, 꿋꿋하게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겠다는 내면에서 나오는 의지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노인과 바다」의 마지막 부분은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노인은 바다에 죄다 뜯긴 청새치 시체를 매달고 오두막으로 돌아와 깊은 잠에 빠진다. 소년 마놀린은 다른 어부들에게 그를 깨우지 않도록 당부하고 그가 깨어나면 바로 먹을 수 있도록 커피와 음식을 준비한다. 그리고 노인이 깨어나자 그를 찾기 위해 해안 경비선과 비행기까지 출동했음을 알린다. 노인은 비록 그럴듯한 청새치 사냥엔 실패했을지라도 제대로 된 인생을 살았다고 느꼈을 것이다. 곁에는 늘 응원해 주는 소년이 있고 따끈한 커피가 있고 그를 걱정해 주는 어부들이 있다. 까짓 청새치쯤이야 뜯겨도 괜찮다. 이 정도면 멋진 인생이 아닐까?

 

 

< 2 >

 

외로움과 고독

 

 

외로움은 슬픈 감정으로 다가오지만, 고독은 그러한 부정적 감정에서 벗어나 있다. 다시 말해 외로움에는 고통과 괴로움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있지만, 고독은 다양한 감정에 열려 있는 상태다. 따라서 고독 속에서 자유를 발견할 수 있다.

 

영국 최고의 지성이자 정신분석의인 앤서니 스토Aathony Storr는 「고독의 위로」에서 '인간의 대부분의 불행은 고독할 줄 모르는 데서 온다'고 말한다.

 

사람은 한평생을 살면서 전혀 다른 두 가지 충동을 느낀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과 사귀고 사랑을 나누는 등 어떤 방식으로든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고 싶다는 충동과, 독립적이고 개별적이며 독자적인 삶을 살고 싶다는 또 다른 충동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둘 중 어떤 삶이 더 행복한 삶일까? 인간은 끊임없이 행복을 추구하지만, 바로 이러한 본성 탓에 인간관계에서는 혼자만의 고독한 시간에서는 완전한 행복을 얻는 것이 어렵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혼자서 살 수 없다. 타인들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인간다움을 형성한다. 하지만 우리는 사람들 속에서든, 집에서든, 직장에서든 외로울 수 있다. 어떤 사람은 가끔 외롭고, 또 어떤 사람은 날마다 외롭다. 라르스 스벤젠은 아무리 우리가 외로움을 극복하려고 발버둥치며 노력한다 해도 외로움은 시시때때로 우리를 후려칠 것이라고 말한다. 외로움도 나 자신의 일부라는 사실을 인정하면 마음이 더 편안해질 것이다.

 

매일 아침 자신의 외로움과 고독의 무게를 재어 보자.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것은 '나'의 외로움이다. 진정 행복한 사람은 관계 속에서도 고독할 수 있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 3 >

 

죽음을 통해 삶을 보라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의 ‘메멘토 모리’라는 라틴어 격언이 있다. 사실 20, 30대 청춘에게 '네가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말하면 마음에 전혀 와닿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청춘에게 죽음이란 먼 훗날에 발생할 불확실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구나 불치의 병에 걸리거나, 갑작스러운 가족의 죽음을 맞거나ㅍ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접하고 나면 한 번쯤 죽음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죽음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죽음을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는 없다. 따라서 죽음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없다. 단지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사실만 알 뿐이다. 즉, 인간이라면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우리 마음대로 죽는 시기를 늦출 수도 없다. 또한 타인에게 대신 죽어 달라고 부탁할 수도 없다. 죽음을 앞둔 사람은 홀로 그 두려움을 맞이해야 한다.

 

고대 로마인들은 왜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라고 말한 것일까? 먼저 삶과 죽음이 어떠한 관계인가를 살펴봐야 한다. 고독과 방랑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는 「말테의 수기」에서 삶과 죽음의 관계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 아무도 살지 않는 고향집을 생각하면, 그전에는 죽음이 달랐을 거라고 여겨진다. 옛날에 사람들은 과일에 씨가 들어 있듯이, 사람도 내부에 죽음을 간직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아니면 그저 예감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작은 죽음을, 어른들은 큰 죽음을 간직하고 있었다. 여자들은 그것을 자궁 안에, 남자들은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어쨌든 독특한 위엄과 말 없는 자부심을 주는 죽음을 가지고 있었다.

 

 

릴케는 모든 인간은 삶과 죽음을 함께 간직하고 태어난다고 말한다. 인간이 죽음의 씨앗을 품고 태어난다는 릴케의 표현을 떠올리면 섬뜩한 느낌마저 든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삶과 죽음의 시간이 시작된다. 즉, 삶의 시간이 늘어날수록 죽음의 시간이 다가오는 것이다. 동전의 양면과 같은 삶과 죽음의 관계 때문에, 우리는 삶을 생각할 때 죽음을 떠올려야 하고, 죽음을 생각할 때 삶을 떠올려야 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죽음은 자신과 거리가 먼일이라는 듯 죽음을 무시하면서 산다. 그것은 삶의 의미를 절반만 알고 살아가는 것과 같다. 릴케가 말한 것처럼 여자는 자궁에, 남자는 가슴에 이미 죽음의 씨앗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죽음에 대해 미리미리 생각하지 않는다면 삶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다.

 

고대 후기 스토아학파 철학자인 에픽테토스는 「엥케리디온」에서 무엇보다 죽음을 날마다 자신의 눈앞에 놔두라고 충고한다. 죽음에 관해 늘 생각한다면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들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고, 지나치게 어떤 것을 욕망하지도 않게 된다는 것이다. 즉, 자신이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사회적 성공, 지위, 명예, 돈 등에 대한 욕망만을 추구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를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죽음을 기억한다는 것은 현실의 삶에 충실하라는 말이다.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스토아 철학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장이라도 세상을 떠날 수 있는 사람처럼 모든 것을 행하고, 말하고, 생각하라.

(.....)

네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며, 네가 마음의 평정을 얻는 데 쓰지 않으면, 네 시간도 너도 사라질 것이고, 두 번 다시 그런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이제야말로 알아야할 때다.

 

삶의 끝자락에서 인생을 잘못 살았다고 후회해 봤자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 비록 죽을 운명이라는 짐을 짊어진 채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지만, 그 하루하루가 마치 자신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삶에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현재에 충실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죽음을 통해 단 한 번뿐인 이 삶을 사랑하라!"

 

 

장재형 / ‘내 곁에서 내 삶을 받쳐 주는 것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