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음악

여자경 / ‘비하인드 클래식’중에서

송담(松潭) 2023. 3. 8. 05:59

 

< 1 >

 

작품번호

 

 

클래식 중 기악곡에 제목을 붙이는 경향은 주로 낭만주의 시대에 나타났습니다. 그 이전에도 작품에 제목을 붙이는 경우는 있었지만 흔하지 않았고, 그 대신 작품에 번호를 붙였습니다. 그런데 이 방식 역시 통일되지 않아서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고는 합니다. 이 부분은 공부하려고 하기보다는 그 시대를 이해하고 넘어가면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음악을 감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장 널리 쓰이는 것은 Op. 라고 해서 '오푸스Opus'로 표기하는 경우입니다. 출판된 악보의 인세 수익을 확실히 정리하기 위해 베토벤이 적극적으로 사용하면서 일반화되었다고 해요.

 

그런데 앞서 하이든의 ‘종달새’가 Op.64이면서 현악 4중주 53번이라고 해서 번호가 두 개라 더 알쏭달쏭하게 느낀 분도 있을 텐데요. Op.는 곡의 장르에 관계없이 한 작곡가의 모든 곡에 순서대로 붙이는 것이라면 53이라는 숫자는 하이든의 현악 4중주곡에만 붙이는 순서입니다. 예를 들어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은 <교향곡 5번 c단조 Op.67>로 베토벤의 교향곡 중에서는 다섯 번째이고 그의 모든 작품을 통틀어 작품번호는 67 번째라는 의미입니다.

 

Op.는 베토벤 이전에도 쓰였지만 일반적이지 않았고, 작품번호를 나타내는 다양한 머리글자가 붙었습니다. 모차르트는 K, 하이든은 Hob, 바흐는 BWV, 헨델은 HWV 등을 사용하는데, 이는 후대에 해당 음악가의 작품을 연구하고 정리한 사람들의 이니셜을 따는 경우입니다. 모차르트는 쾨헬Kochel, 하이든은 호보켄Hoboken의 이름에서 따왔습니다. 바흐와 헨델은 각각 슈미더Schmider와 바젤트Baselt 가 전체 작품을 정리하고 번호를 매겼지만, 그들의 이름을 따는 대신 각 작곡가의 성에서 따온 머리글자에 Werke Verzeichnis(독일어로 '작품 분류'라는 뜻)의 머리글자를 더한 것입니다. 한편 베토벤의 작품에 Op.가 아닌 Woo를 붙인 경우도 있는데, 이는 ‘작품번호가 없다. Werke ohne Opuszahl'는 뜻으로, 정식 출판되지 않았다가 베토벤 사후에 발견된 음악 등 출처가 불분명한 음악에 붙였습니다.

 

 

< 2 >

 

바이올린 소나타 5번 ‘봄’, 베토벤

 

베토벤은 총 10개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작곡했습니다. 사실 초기엔 평가가 좋지 않았지만 당대 평론가들의 마음을 돌린 곡이 바로 이 〈바이올린 소나타 제5번 F장조 Op.24>, 통칭 ‘봄’이었죠. 오늘날 9번 '크로이처'와 더불어 가장 인기 많은 곡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잠깐 ‘소나타’라는 익숙하지만 낯선 용어에 대해 먼저 알아보면 이 곡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18세기부터 활발하게 쓰인 '소나타'라는 용어는 다양한 형태의 기악곡을 말하는데, 연주 형태면에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협주곡이나 교향곡과 비교해보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초기 클래식 음악은 종교와 결부되어 성악곡이 많았습니다. 칸타타나 오라토리오가 대표적인 장르죠. 그런데 르네상스 이후 궁정음악이 유행하면서 기악곡, 즉 노래 없이 악기로만 연주하는 곡들이 대세를 이루게 됩니다. 그중에서도

 

소나타는 독주곡으로, 악기 하나와 반주하는 피아노로만 이루어지는 곡입니다 (피아노 소나타는 다른 악기 없이 피아노로만 연주합니다), 소나타와 비교해

 

교향곡은 대표 악기 없이 현악기와 관악기를 비롯해 오케스트라에 사용되는 거의 모든 악기가 어우러지는 곡입니다. 그리고

 

협주곡은 독주 악기와 오케스트라의 구성으로 이루어진다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이제 다시 소나타로 돌아와서, 형식면에서 서론과 본론, 결론에 해당하는 3악장으로 이뤄지는 것이 소나타의 일반적인 형식인데 베토벤은 기존 소나타 3악장에 에필로그 성격의 마지막 악장을 추가해 4악장으로 구성합니다.

 

악기의 배치도 기존 형식과 차별을 두어 1악장에서 전주 없이 바로 바이올린이 멜로디를 연주합니다. 다음엔 피아노가 멜로디를, 바이올린이 반주를 하며 서로 주고받는 연주가 특징으로, 봄날의 햇살처럼 따뜻한 멜로디가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곡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의 베토벤이 어떻게 이런 따뜻한 곡을 만들었을까, 의아한 분들도 있을 겁니다. 베토벤은 피아노곡과는 달리, 바이올린곡은 주로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에만 작곡했습니다. 시기적으로 보면 이미 청각 이상이 생겼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 곡에서는 그런 고통이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 3 >

 

녹턴 2번 Op.9 No.2. 프레데리크 쇼팽

 

 

누군가에게는 어제와 다를 바 없이 지루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전쟁 같았던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난 뒤 맞은 평온한 밤을 더욱 근사하게 만들어주는 클래식 곡이 있습니다. '피아노의 시인' 쇼팽 하면 떠오르는 바로 그 곡, 녹턴 Op.9 No.2입니다.

 

쇼팽의 곡이 워낙 익숙하다 보니 ‘녹턴 Nocturne’을 작품 제목으로 아는 이들도 있는데, 녹턴은 주로 조용한 밤의 분위기를 표현한 서정적인 피아노곡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그래서 우리말로는 '야상곡'이라고 부르죠, 녹턴을 제일 먼저 만든 사람은 19세기 초 아일랜드 작곡가 존 필드 John Field로, 그가 남긴 20곡에 가까운 녹턴은 이후 쇼팽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쇼팽은 총 21개의 녹턴을 작곡했는데, 그중 9번이 가장 먼저 출판되었습니다. 9번은 총 세 개의 곡으로 이루어졌으며, 두 번째 곡이 가장 유명합니다. 잔잔한 멜로디로 밤의 감성을 담은 이 곡은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 등의 배경음악으로 쓰이며 시대를 초월해 사랑받고 있습니다. 깊은 밤의 고요한 정취를 음악으로 만든 쇼팽이지만, 많은 이들이 아는 것처럼 그의 짧은 생은 굴곡의 연속이었습니다.

 

1810년, 음악가가 한 명도 없는 평범한 폴란드 가정에서 태어난 프레데리크 쇼팽Frédéric Chopin, 1810~1849은 어릴 때부터 음악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였는데, 집안은 물론 폴란드 사회에서도 일약 유명인사가 될 정도로 뛰어났습니다. 그런 그가 막 음악가로서의 날개를 활짝 펼칠 무렵, 고국 폴란드에 혁명이 일어납니다.

 

당시 음악 공부를 위해 외국에 있던 쇼팽은 이 소식을 듣고 군인이 되기로 결심합니다. 그러자 고국에 있던 쇼팽의 아버지가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네가 조국을 위하는 길은 총을 드는 게 아니라 조국의 음악가로 이름을 남기는 것이다.'

 

아버지의 조언을 듣고 쇼팽은 음악에 더욱 몰두해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라는 찬사를 받으며 수많은 명곡들을 쏟아냈습니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연인이었던 작가 조르주 상드George Sand가 있었습니다. 무려 9년 동안 애틋한 연애를 한 두 사람은 평생의 연인이 될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 사랑도 결국 끝나버리고, 쇼팽이 앓고 있던 폐결핵은 점점 심해져 갔습니다.

 

극심한 고통을 겪던 쇼팽은 결국 39살에 짧은 생을 마감하고 프랑스 파리에 안장되었습니다. 죽음이 가까웠음을 느낀 쇼팽은 자신의 육신을 폴란드에 가져갈 수 없다면 심장만이라도 가져가 달라는 유언을 남깁니다. 유언에 따라 그의 사후 부검을 진행할 때 심장을 적출해 당시 보존제로 널리 사용되던 코냑에 담가 누이인 루드비카 Ludwika가 보관하다가 후에 폴란드의 성당에 안치되었습니다. 음악가로서의 삶을 버리고, 군인이 되려고 했을 만큼 애국심이 강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유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사랑하는 고국에 평생 돌아가지 못한 쇼팽은, 비록 어딘가에 터를 잡고 있어도 자신이 항상 방랑자처럼 느껴지지 않았을까요. 해가 떠 있는 동안은 밖으로 나와 세상을 헤매고 치열하게 살다가도 밤이 되면 집으로 돌아와 쉬어야 하는 게 인간다운 삶이라면, 쇼팽은 평생에 걸쳐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밤에 집에서 응당 얻어야 할 차분함, 안락함과 함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이 곡을 만들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 4 >

 

세레나데 - 프란츠 슈베르트

 

 

밤 하면 배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장르는 바로 '세레나데 serenade'입니다. 야상곡과 마찬가지로 세레나데 역시 이름 자체가 이탈리아어로 '밤 음악(소야곡, 小夜曲)'이라는 의미이니, 밤에 들어야 하는 게 어쩌면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낭만적인 이탈리아 사람들의 특성이 그대로 반영되듯, 세레나데는 주로 한밤중에 연인의 창가에서 사랑을 고백하며 부르거나 연주하는 음악입니다.

 

이름은 이탈리아에서 유래되었지만, 세레나데의 대표 주자는 오스트리아의 모차르트입니다. 모차르트는 모두 13개의 세레나데를 작곡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곡이 13번으로 1악장은 너무 유명해서 한 소절만 들어도 모두가 흥얼거릴 수 있는 명곡입니다. 이 곡의 정식 제목은 <현악 세레나데 G장조 K.525>인데, 아마도 현재 통용되는 제목을 들으면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 사실 이 곡의 제목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작은 밤의 음악'이라고 해서 제목 자체가 세레나데를 뜻하는데, 우리에게는 밝고 경쾌함이 특징인 '모차르트의 세레나데'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세레나데를 작곡한 수많은 음악가들은 저마다의 특성을 세레나데에도 적용시켰는데, 차이콥스키의 <우울한 세레나데 bb단조 Op.26>은 서정적이고 애수 어린 바이올린의 선율이 모차르트의 것과는 대조적인 분위기의 곡입니다.

 

그렇다면 슈베르트의 '세레나데 (<백조의 노래> 중 제4곡 D. 957)'는 어느 쪽에 가까울까요? 세레나데의 특징이 '밤'과 '낭만'이라면 슈베르트의 곡은 밤에 더 초점이 맞춰 있는 느낌으로, 차분하면서도 애잔한 느낌이 드는 이 곡은 앞서 살펴본 그의 대표곡 송어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입니다. 어떻게 이런 곡이 탄생했는지는 슈베르트의 삶을 조금 더 살펴보면 이해가 갑니다.

 

가난한 교사의 아들로 태어난 슈베르트는, 형편은 어려웠지만 가족이 음악에 조예가 깊어 어릴 때부터 악기를 배웠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재능에도 불구하고, 불안정한 음악가보다는 안정적인 교사가 되길 바랐습니다. 슈베르트는 부모의 뜻에 따라 교사로 취업했지만, 도저히 음악가의 길을 포기하고 평범하게 살 수는 없었나 봅니다. 결국 학교를 그만두고 집까지 나와 꿈 하나만 가지고 도전을 시작한 슈베르트. 그런 그에게 음악보다 더 큰 시련이 찾아옵니다. 바로 실연의 아픔이었지요.

 

교사로 근무하던 18살 무렵, 그는 자신이 작곡한 곡의 독창을 맡아주러 온 여성을 보고 첫눈에 반합니다. 그녀의 이름은 테레제 그로브Therese Grob, 슈베르트의 첫사랑이었습니다. 5년간 만나며 결혼을 약속할 만큼 두 사람은 서로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슈베르트의 가난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 슈베르트는 악보를 그릴 종이조차 살 수 없어 식당 메뉴판에 곡을 쓸 정도로 궁핍하게 살고 있었는데, 이를 알게 된 테레제의 아버지가 결혼을 강력하게 반대합니다. 아니, 반대만으로는 모자라 딸을 다른 남자에게 시집보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랑을 잃은 슈베르트는 음악에, 특히 가곡의 작곡에 매진합니다. 사실 슈베르트는 어린 시절에 목소리가 매우 예뻤다고 전해집니다. 지금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빈 소년 합창단'에서 변성기가 오기 전까지 단원으로 꾸준하게 활동했을 정도였는데, 어쩌면 합창단 경험이 그가 가곡의 왕이 되는 데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세레나데는 슈베르트가 독일 시인 렐슈타프 Rellstab의 시에 곡을 붙여 만든 작품으로, 가사를 보면 사랑하는 상대를 향한 절절한 구애가 느껴집니다. '밤 꾀꼬리가 지저귀는 것이 들리나요? 아! 새들도 당신에게 구애하고 있어요.? '사랑하는 연인이여, 내 말을 들이줘요. 어서 와서 나를 기쁘게 해주세요.' 애잔한 선율이 슈베르트의 이루지 못한 첫사랑을 생각나게 합니다.

 

 

< 5 >

 

달빛_클로드 드뷔시

 

이루지 못한 사랑을 문학작품에서 찾아보자면 대표적인 이야기 중 하나로 윌리엄 셰익스피어 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줄리엣에게 첫눈에 반한 로미오는 그녀의 침실 창가에서 사랑을 고백합니다. 마침 어두운 밤하늘에는 은은한 빛을 내뿜는 달이 떠 있었고, 로미오는 아름다운 달에 대고 사랑을 맹세합니다. 완벽한 세레나데가 흘러나올 만한 장면이죠.

 

하지만 줄리엣은 그의 고백을 반기면서도 이렇게 대답합니다. “변덕스러운 달에 대고 사랑을 맹세하지 마세요.” 달에게 느끼는 감정은 이처럼 사람마다 다양합니다. 은은한 달빛을 낭만적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하루하루 변하는 모습에 변덕스럽다고 느끼기도 하는 것처럼…. 어두운 밤하늘에서 누군가는 달빛에 의지해 길을 찾을 것이고, 어느 곳에서 봐도 똑같은 달의 모습을 보며 문득 그리운 장소나 사람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런 달빛의 분위기를 최대한 살린 클래식 악곡이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광고나 영화, 드라마에서 한 번쯤 들어봤을 그 음악 바로, 클로드 드뷔시 Claude Debussy, 1862~1918의 <달빛>입니다. 이 곡은 드뷔시가 28살에 작곡한 피아노 모음곡 <베르가마스크 모음곡 L75>중 세 번째 곡입니다.

 

19세기 말, 프랑스 미술계는 큰 변화를 맞습니다. 바로 인상주의의 대두입니다. 빛과 색에 대한 순간적이고 주관적인 인상을 표현하려는 사조가 화가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했는데, 그 대표적인 화가들로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를 비롯해 모네 Monet, 르누아르 Renoir, 세잔Cezanne, 마네Manet, 고갱 등이 있습니다. 미술에서 시작한 인상주의는 음악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그 대표 주자가 드뷔시입니다.

 

드뷔시는 어릴 때부터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전쟁까지 터지면서 친척 집에 맡겨집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음악적 재능을 발견하게 됩니다. 비록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지만 음악을 배우는 속도가 남달랐던 드뷔시, 음악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불과 11살의 나이에 파리음악원에 입학하는 쾌거를 이뤄냅니다.

 

하지만 이 음악 천재의 역량을 담기에는 학교가 너무 작았던 걸까요? 드뷔시는 학교의 음악이론 수업을 못 견뎌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미 그 시절에 자신이 만들어낸 화성을 이용해 음악을 구상하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개성은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더욱 커집니다.

 

그의 음악적 특징이 잘 나타나는 작품 중에 하나가 바로 〈달빛)으로, 오늘날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이 곡은 몽환적이면서 풍부하고 독특한 화성이 매력적입니다. 특히 이 곡이 시공을 초월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이유 중 하나는 표제음악으로 드뷔시가 직접 '달빛'이란 곡명을 붙이고 달빛이 주는 느낌을 최대한 주려고 했기 때문에 전 세계에서 달을 보는 사람들에게 작곡가의 의도가 잘 전달된 덕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곡은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인 베를렌의 시집 《우아한 축제》에 포함된 '달빛'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드뷔시의 본격적인 인상주의 화법이 확립되기 전, 초

창기 작품이라 그런지 아름다운 선율이 살아 있는 곡입니다. 모차르트, 베토벤 같은 유명 클래식 음악가들에 비하면 드뷔시는 조금 생소한 이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한때 20프랑 지폐에 드뷔시를 모델로 썼다고 해요. 그만큼 프랑스 전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음악가 중 한 명입니다. 오늘 밤에 100여 년 전 드뷔시가 바라본 그 달과 같은 달을 바라보면서 이 곡을 들어보는 건 어떨까요? 시공간을 초월한, 신비로운 감동이 찾아올지도 모릅니다.

 

 

< 6 >

 

사랑의 기쁨, 프리츠 크라이슬러 : 기악곡

사랑의 기쁨, 장 폴 에지드 마르티니 : 이탈리아 가곡

 

 

사랑이 가진 다양한 얼굴, 그것을 음악으로 그려낸 인물이 있습니다. 프리츠 크라이슬러(Fritz Kreisler, 1875~1962)는 사랑의 두 얼굴을 곡으로 표현해냈습니다. <사랑의 기쁨>과 <사랑의 슬픔>이 그것입니다.

 

1875년 음악의 도시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 1962년 미국에서 생을 마감한 프리츠 크라이슬러는 뛰어난 실력으로 '바이올린의 왕'이라고 불린 연주자입니다. 그는 특히 사람들이 가볍게 즐길 수 있는 바이올린 소품을 많이 작곡했는데, 사랑의 기쁨과 사랑의 슬픔은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만한 곡으로 대중적인 인기곡이자 대표작이 되었습니다. 두 곡 모두 빈의 옛 왈츠 선율을 인용했지만, 표현 방식은 확연히 다릅니다. <사랑의 기쁨>이 밝고 경쾌한 기쁨의 감정을 한껏 끌어올렸다면 <사랑의 슬픔>은 스산한 슬픔의 감정을 극대화한, 제목 그대로의 심상이 느껴지는 곡입니다. 남녀노소 모든 계층에서 사랑받은 두 작품은 특히 크라이슬러의 친구인 라흐마니노프에 의해 피아노 독주곡으로 편곡되어 더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사랑의 기쁨>인 줄 알고 들었다가 가사를 알고 나면 깜짝 놀라는 곡이 있습니다. 바로 독일 출생의 프랑스 작곡가 장 폴 에지드 마르티니(Jean Paut egide Martini, 1741-1816)가 만든 이탈리아 가곡 <사랑의 기쁨>입니다. 잠시 가사를 살펴볼까요?

 

'사랑의 기쁨은 어느덧 사라지고

사랑의 슬픔만 영원히 남았네.

모든 것을 버렸었지.

믿지 못할 실비아를 위해

그러나 다른 연인을 찾아 떠나버린 그 님.'

 

제목과 정반대의 가사가 눈길을 끄는데요. 자칫 제목만 보고 결혼식이나 연인을 위한 세레나데로 사용했다가는 낭패를 보기 쉬우니 확인이 꼭 필요하겠습니다. 사실 이 곡은 밝은 사랑 노래가 아니라 영원할 것 같던 사랑이 허무하게 끝난 것을 슬퍼하는, 실연의 상처를 노래한 곡입니다. 내용만 봤을 때는 사랑의 기쁨보다 슬픔 쪽에 가까운데 왜 제목을 사랑의 기쁨이라고 지었을까요? 어쩌면 겉으로 보이는 사랑의 달콤함 뒤에 자리한 질투, 권태, 고통과 슬픔 등의 감정까지 아우르려는 시도가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예상해볼 뿐입니다.

 

 

< 7 >

 

사랑의 꿈 - 프란츠 리스트

 

요즘, 전 세계적으로 뜨겁게 사랑받고 있는 새로운 음악 장르를 꼽으라면, 단연 케이팝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이돌 음악이 하나의 장르가 되어 말이 통하지 않아도 음악은 통한다는 진리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죠. 그런데 19세기 클래식 음악계에도 전 세계 여성을 사로잡은 꽃미남 아이돌이 있었습니다. 바로 건반의 마법사, 프란츠 리스트 Franz, Liszt, 1311~1886입니다.

 

범접할 수 없는 피아노 실력과 함께 185cm의 훤칠한 키에 조각 같은 외모, 게다가 화려한 무대 매너까지 갖춘, 말 그대로 최고의 엔더테이너였습니다. 어차피 앉아서 연주하는 피아노에 키가 중요할까 싶습니다마는, 동시대의 쇼팽이 170cm, 이전의 베토벤이 162cm, 슈베르트가 154cm였던 데 비하면 연주를 마치고 일어났을 때 얼마나 눈에 띄는 외모였을지 짐작이 갑니다.

 

다른 피아니스트(특히 절친했던 피아노의 시인 쇼팽)들과 쇼맨십을 가미한 화려하고 역동적인 연주를 즐겼습니다. 오죽하면 너무 힘차게 연주하는 바람에 피아노 줄이 매인 나무틀이 연주 중에 부서지는 일도 종종 있었다고 하는데요. 덕분에 어딜 가나 그를 추종하는 여성 팬들이 넘쳐났습니다. 공연 후에 그가 남긴 손수건이나 장갑, 심지어 마시던 물컵을 차지하기 위해 여성 관객들 사이에서 난투극까지 벌어졌다고 하니, 정말 요즘아이돌 부럽지 않은 인기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외모와 쇼맨십으로 인해 그의 이름이 지금까지 남은 것은 아닙니다. 리스트는 무엇보다도 실력이 뛰어났습니다. 그의 화려한 기교는 현재에도 따라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합니다.

 

이렇게 남부럽지 않은 인기와 함께 정정당당하게 실력으로 승부해 명성까지 차지한 리스트에게 빠져드는 여성이 많았던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그의 사랑이 마냥 축복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필 그가 사랑에 빠졌던 두 여인이 모두 유부녀였기 때문이에요.

 

20대의 청년 리스트는 일곱 살 연상의 사교계 유명인사 마리 다구Marie d'Agoult 백작부인을 만납니다. 심지어 그녀와 스위스로 사랑의 도피를 떠나 세 명의 자녀까지 낳았습니다. 세기의 사랑으로 알려진 두 사람이지만, 10년을 넘기지 못하고 결별합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그에게 두 번째 운명의 여인이 나타납니다. 카롤리네 폰 자인 비트겐슈타인carolyne von Sayr-Wittgenstein 공작부인으로, 남편과 별거 중이었던 그녀는 어느날 리스트의 연주를 듣고 한눈에 반합니다. 두 사람의 사랑이 점점 깊어질수록 공작부인의 마음속에는 불만도 커져만 갔습니다. 문제는 어딜 가나 따라다니는 리스트의 여성 팬들이었는데요. 그녀는 리스트에게 피아니스트가 아닌, 작곡가로서의 삶을 살 것을 제안합니다. 마침 리스트도 연주 생활에 지쳤던 터라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여 피아니스트로서 은퇴를 선언합니다. 이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수많은 팬은 물론이고, 주변 음악인들도 만류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 리스트의 나이가 불과 36살이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아쉬움과는 별개로 리스트는 그 무렵 공작부인을 위해 곡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그중 하나가 오늘날까지 리스트 하면 떠오르는 대표곡이 된 <녹턴 3번 Ab 장조 Op 64-3> ‘사랑의 꿈’입니다. 원래는 시인 프라일리히라트 Frailligrath의 시에 곡을 붙여 만든 <고귀한 사랑> < 가장 행복한 죽음>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하라>라는 세 편의 가곡을 피아노 연주용으로 편곡한 것입니다.

 

5분 남짓 연주되는 이 곡은 듣다 보면, 제목 그대로 꿈같은 달콤함과 안타까움이 느껴집니다. 특히 중반부 이후 펼쳐지는 고난도 기교와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리는 힘찬 연주까지, 사랑이 품은 모든 감정을 내포한 듯합니다. 원래 가곡의 가사를 보면, ‘오 사랑하라, 그대가 사랑할 수 있는 한 / 오, 사랑하라, 그대가 사랑하고 싶은 한'이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피아니스트로서 정점에서 아름다운 이별을 고한 리스트가 이제 자신에게는 사랑의 결실을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는 심정을 표현한 듯합니다. 공작부인과 정식으로 결혼할 일만 남았건만, 이 꿈은 끝내 좌절되고 맙니다. 리스트와 공작부인 두 사람 모두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는데, 당시 가톨릭교회는 이혼을 금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교회의 반대에 부딪힌 두 사람은 사랑으로도 이를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공자부인은 남은 삶을 평생 혼자 살았고, 리스트는 성직자가 되어

죽을 때까지 수도원에서 곡을 쓰면서 보냈다고 합니다. 수많은 여성들과 스캔들을 일으켰던 마성의 매력남이었지만 결국 신부로 생을 마감한 리스트, 우여곡절 많았던 그의 삶과 사랑 이야기를 알고 나서 <사랑의 꿈>을 듣는다면, 더 깊은 여운이 전해져 올 것 같습니다.

 

 

< 8 >

 

사랑의 인사 - 에드워드 엘가

 

 

베토벤이 자신의 제자로 들어온 수많은 귀족 자제들과 염문을 뿌렸지만, 신분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것과 반대로, 신분 차이를 극복하고 귀족 제자와 결혼에 성공한 음악가도 있습니다. 바로 영국의 음악가 에드워드 엘가 Edward Elgar, 1857~1934입니다.

 

이 곡은 29살의 엘가가 자신이 가르치던 연상의 제자 앨리스Alice와 사랑에 빠졌을 때 쓴 곡입니다. 당시만 해도 평민출신의 무명 음악가였던 그와 귀족 가문의 딸이었던 앨리스의 사랑이 결코 쉬웠을 리 없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집안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결혼에 성공합니다. 엘가는 힘든 상황에서도 끝까지 버텨준 앨리스를 위해 약혼 선물로 곡을 헌정합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사랑의 인사>입니다. 정식 이름은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품 사랑의 인사 Op.12>로 3분 남짓한 짧은 곡이지만 그 속에 담긴 따뜻한 사랑을 듬뿍 느낄 수 있습니다.

 

엘가는 클래식 음악사에서 정말 보기 드문 순정파였습니다. 사제지간으로 만나 부부가 된 두 사람은 클래식 음악계에서 손꼽히는 잉꼬부부로 살았습니다. 앨리스는 소심하고 자신감이 부족했던 엘가를 언제나 응원해주고, 음악적 조언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은 앨리스가 먼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행복한 결혼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아내의 사후에 엘가가 단 한 편의 완성작도 내놓지 못한 걸 보면, 그 사랑이 얼마나 깊었는지 새삼 느껴집니다. 평생 한 사람과 깊은 사랑을 나눴던 엘가. 그의 사랑 이야기가 더해져 <사랑의 인사>는 오늘도 부동의 러브송으로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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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소디 인 블루 - 조지 거슈윈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더라도 천재는 그냥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노력 없는 성공은 없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기존의 질서에서 벗어난 성공이라면 더 많은 노력이 따라야겠죠. 20세기 초 미국 음악계에는 변화의 바람이 거셌습니다. 조금 과장해서,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재즈 아티스트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중에서도 흑인음악의 대명사였던 재즈를 클래식의 반열로 끌어올린 위대한 음악가가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흑인이 아닌 백인 작곡가 조지 거슈윈(George Gershwin, 1898~1937)입니다.

 

미국을 대표하는 작곡가인 그는 현대 음악사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인물로 재즈와 클래식, 대중음악, 영화음악 등 장르를 아우르며 대중성과 예술성 모두를 잡은 음악가입니다. 39년이라는 짧은 생애 동안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수많은 명곡을 남겼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8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현대 작곡가 중 한 명으로 기억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1898년 뉴욕에서 태어난 조지 거슈윈. 그의 부모님은 유대계 러시아 이민자로 첫째 아들 아이라 Ira를 위해 피아노를 샀다가 우연히 조지의 음악적 재능을 발견하게 됩니다. 16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전업 작곡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그는 고전음악을 배웠지만 대중음악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처음에는 밝고 경쾌한 사랑노래를 주로 만들다가, 1920~30년대 인기 장르였던 뮤지컬 쪽으로 넘어갑니다. 작곡가로서 입지를 다져가던 그에게 당시 '재즈의 왕'이라고 불렸던 폴 화이트먼Paul Whitemen 이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바로 심포니 재즈를 만들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불과 2~3주. 그렇게 탄생한 곡이 그 유명한 피아노 협주곡 <랩소디 인 블루>입니다.

 

재즈의 기본 정신은 ‘즉흥성’입니다. 〈랩소디 인 블루>는 곡 초반, 길게 부는 클라리넷 소리로 시작하는데, 처음 악보에는 없던 부분입니다. 리허설 때 클라리넷 연주자가 장난친 부분.이 그대로 악보에 반영된 것이었습니다. 이 곡은 거슈윈의 대표작이자, 재즈의 기본 정신을 살린 최초의 클래식 곡으로 평가 받습니다.

 

음악사적으로도 혼란스럽던 이 시기에 <랩소디 인 블루〉의 등장은 많은 것을 바꾸어놓았습니다. 당시 미국 음악계의 화두는 '미국 음악만의 정체성 찾기'였는데, 재즈를 음악으로 보지 않았던 다수의 클래식 음악가들은 거슈윈의 이 공연을 보고 생각을 바꿔야 했습니다. 재즈와 클래식의 접목으로 미국 클래식의 정체성을 확립한 것은 물론, 미국인의 자긍심을 높이는 결과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음악사를 넘어 사회 전반적인 상황 속에서도 이 곡의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 무렵 미국 내 인종차별은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심했습니다. 흑인들은 식당에서 백인들이 원치 않으면 밥을 먹을 수도 없었고, 버스 좌석도 양보해야 했죠. 그런데 거슈윈이 흑인들의 음악인 재즈를 미국 주류 음악에 녹여내는 시도를 한 겁니다. 이런 노력은 그의 또 다른 대표작인 오페라 〈포기와 베스)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미국 흑인들의 슬픔을 그린 이 작품은 1935년에 매사추세츠주의 보스턴에서 막을 올렸는데, 정통 오페라나 뮤지컬과는 달랐던 탓에 당시 비평가들의 평가가 나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대중문화와 정통 클래식도 얼마든지 한 무대 위에서 섞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때문에 비평가들의 평가에도 흔들리지 않고, 의연하게 자신의 길을 고수했습니다.

 

<랩소디 인 블루>의 성공으로 조지 거슈윈은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때 거슈윈의 나이가 불과 26살이었으니 천재의 등장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정작 거슈윈 본인은 자신의 음악 실력이 항상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연주회 초청을 받아 방문한 파리에서 인상주의 음악의 대가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을 만나게 됩니다. 그에게 레슨을 청하자 라벨은 이를 거부하며 “당신은 이미 일류 거슈윈인데, 왜 이류 라벨이 되려고 하느냐?”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자유분방한 그의 음악세계를 인정하는 라벨의 존중이 담긴 대답이었죠.

 

안타깝게도 뇌종양 수술을 받다가 39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거슈윈, 그가 남긴 음악은 혼란했던 음악계에 새로운 길을 찾아준 나침반이었습니다.

 

여자경 / ‘비하인드 클래식’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