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음악

우주를 떠도는 음악

송담(松潭) 2021. 9. 21. 06:00

우주를 떠도는 음악

 

글렌 굴드(피아니스트, 1932-1982)

 

 

 

 

20세기, 위대한 피아니스트의 시대

 

20세기를 수놓은 피아니스트를 조금만 나열해보자. 압도적인 기교와 표현력을 지녔던 호로비츠, 쇼스타코비치를 감동시킨 리히테르, 쇼팽 최고 권위자 루빈스타인, 소련의 보물이었던 길렐스, 이들보다 한 세대 뒤에 태어난 인물엔 피아노 여제 아르헤리치, 열여덟에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이 있다. 누가 가장 뛰어난 피아니스트인지 순위를 매기긴 어렵다. 하지만 20세기 피아니스트 중 가장 독특한 인물을 꼽는 데는 클래식 음악 팬들 사이에 큰 이견이 없다. 당연히 글렌 굴드다.

 

글렌 굴드는 ‘천재는 괴짜’라는 세상의 편견을 공고하게 만드는 인물이었다. 굴드의 기행을 다 소개하려면 꽤 많은 페이지가 필요하다. 굴드는 한여름에도 긴 코트와 장갑을 착용했다. 세균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의도였다. 병적인 건강염려증 탓에 악수도 하지 않았다. 에어컨이 켜진 식당에도 안 들어갔다. 피아노 조율사가 인사 차원으로 굴드의 등을 가볍게 툭 친 적이 있는데, 굴드는 이 터치 때문에 손가락 두 개가 마비됐다고 우기며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스튜디오에서 녹음할 땐 연주에 심취해 허밍을 했다. 녹음기사는 굴드의 흥얼거림을 차단하기 위해 방독면을 씌우기도 했다. 굴드는 피아니스트에게 통과의례처럼 여겨지는 쇼팽의 음악을 두고 “지나치게 낭만적이라서 싫다"고 말했다.

 

 

결국 기준이 된 <골드베르크 변주곡>

 

굴드라는 이단아는 클래식 음악 변방에서 태어났다. 캐나다 토론토 출신인 굴드는 유럽이나 미국으로 유학을 가지도 않았다. 음악 중심지가 아닌 곳에서 성장했지만 타고난 재능이 있었다. 굴드 역시 세 살에 악보를 읽고, 다섯 살에 작곡했다는 등의 천재다운 일화를 많이 갖고 있다. 십 대 때 캐나다 콩쿠르에서 상을 휩쓸며 조금씩 이름을 알렸다. 갓 스무 살을 넘긴 굴드는 1955년 뉴욕에서 데뷔 공연을 했다. 공연에 참석한 음반사 관계자가 젊은 피아니스트에게 앨범 제작을 제안하고 녹음실로 초대한다. 굴드 인생의 변곡점이 된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1741년 바흐가 한 백작의 불면증 치료용으로 만든 음악으로 알려져 있다. 32곡으로 구성된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세상을 잠재우겠다는 듯 평화로운 선율로 시작한다. 첫 번째 아리아를 기반으로 30개 변주곡이 이어진다. 잔잔한 아리아와 다르게 1번 변주곡은 빠른 템포로 연주된다. 나머지 29개 곡은 빠르게, 느리게, 경쾌하게, 차분하게 변주하며 제각각 다른 풍경을 선사한다. 마지막 32번째에선 다시 첫 번째 아리아가 흐른다. 즉, 1번과 32번은 똑같은 곡이다. 아리아가 30개의 여정을 마친 후 귀환하는 구조다.

 

굴드가 녹음한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파격이었다. 같은 악보를 연주해도 음악가의 개성, 해석에 따라 소리가 달라지는 건 당연하다. 굴드의 해석은 상식을 벗어난 수준이었다. 이전가지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녹음했던 음악가들은 32곡 연주에 60~70분을 썼다. 굴드는 38분 만에 끝냈다. 도돌이표는 무시하고 빠른 속도로 휘몰아서 쳤다. 연주에 심취할 때 나오는 굴드의 허밍과 숨소리까지 그대로 녹음됐다. “미친 연주”라고 혹평한 비평가도 많았지만, 이 앨범은 상당한 성공을 거뒀다. 고전 중에서도 고전인 바흐에 생동감을 더한 굴드는 단번에 스다로 올라섰다. 세상에 나온 골드베르크 변주곡 중 가장 독특했던 굴드의 버전은 오늘날 이 곡을 논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기준이 됐다.

 

 

보이저호에 탑승한 굴드

 

32세에 무대에서 은퇴한 굴드는 은둔자의 길을 택했다. 보통 사람은 상상하기 어려운 고독 속에서 살았다. 낮에는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틀어막고 깜깜한 집에 고립돼 혼자 시간을 보냈다. 밤이 되면 밖으로 나와 녹음실로 향했다. 에드워드 호퍼 그림에 등장하는 고독한 인물들처럼 굴드는 사람이 별로 없는 야밤의 교외 휴게소에서 끼니를 해결했다. 가끔 차를 몰고 알래스카에도 갔다. 그곳의 적막한 풍경을 눈에 담고 돌아왔다. 사랑받지 않으려 노력했고, 앓지도 않는 병을 핑계 삼아 사람을 피했다. 제대로 된 연애도, 결혼도 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혼자였다. 그는 왜 적막을 선택했을까. 침묵, 명상, 은둔 속에서만 영감을 건질 수 있었던 걸까. 고독 자체가 그에겐 묵상이었을까.

 

1981년, 굴드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두 번째로 녹음했다. 한 번 녹음한 곡은 재녹음하지 않는 굴드의 원칙이 처음으로 깨졌다. 이번엔 32개 곡을 연주하는 데 51분이 걸렸다. 늘어난 시간답게 26년 전과 달리 차분하고 관조적인 분위기가 더해졌다. 굴드의 삶은 아리아에서 시작해 아리아로 끝나는 이 곡의 구조와 유사했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으로 전성기를 누리고 은퇴해 변주곡 같은 인생을 살았던 굴드는 두 번째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유작으로 남기고 떠났다. 1982년 굴드는 쉰 살에 깜깜한 집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일어나지 못했다.

 

1977년 미국은 무인우주선 보이저호를 쏘아 올렸다. 보이저호는 외계 생명체와 맞닥뜨릴 상황까지 대비했다. NASA는 우주선 안에 외계인에게 소개할 만한 인류 유산을 데이터화해 담았다. 여기엔 지구를 대표하는 음악도 포함됐다. 선곡 리스트에 글렌 굴드가 연주한 바흐의 곡이 있다. 고독한 피아니스트의 음악은 지금 이 순간에도 완벽한 고독 속에서 유영 중이다.

 

조성준 / ‘예술가의 일’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