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상식. 심리

모두가 사랑하고 대부분 오해하는

송담(松潭) 2022. 11. 29. 15:13

모두가 사랑하고 대부분 오해하는

 

 

가지 않은 길 / 로버트 프로스트

 

노란 숲속에 두 갈래 길 나 있어.

나는 둘다 가지 못하고

하나의 길만 걷는 것 아쉬워

수풀 속으로 굽이 사라지는 길 하나

멀리멀리 한참 서서 바라보았지.

 

그러고선 똑같이 아름답지만

풀이 우거지고 인적이 없어

아마도 더 끌렸던 다른 길 택했지.

물론 인적으로 치자면, 지나간 발길들로

두 길은 정말 거의 같게 다져져 있었고,

 

사람들이 시커멓게 밟지 않은 나뭇잎들이

그날 아침 두 길 모두를 한결같이 덮고 있긴 했지만.

, 나는 한 길을 또다른 날을 위해 남겨두었네!

하지만 길은 길로 이어지는 걸 알기에

내가 다시 오리라 믿지는 않았지.

 

지금부터 오래오래 후 어디에선가

나는 한숨지으며 이렇게 말하겠지.

숲속에 두 갈래 길이 나 있었다고, 그리고 나는

나는 사람들이 덜 지난 길 택하였고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달라졌노라고.

 

손혜숙 옮김, 가지 않은 길(창비, 2014)

 

 

통계에 따르면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은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이자 해외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미국 시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시는 한때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수록됐던터라 그 세대라면 대부분 알고, 지금도 소위 '명사들의 애송시'로 자주 거명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시가 잘못 읽히고 있다면? 미국의 평론가 데이비드 오어가 2015년에 출간한 『가지 않은길 - 모두가 사랑하고 대부분 오해하는 시에서 미국을 발견하기』가 그런 질문을 던졌다. (나는 문소영의 칼럼 「오해되는 시, 가지 않은 길」을 통해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됐다.)

 

이 시를 읽는 관행적인 방식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두 갈래 길 앞에 선 화자가 있다. 두 길을 다 걸을 수 없어 고민에 빠진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결정적인 선택의 순간을 은유한다는 것은 쉽게 눈치챌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지나간 안전한 길을 택할 것인가, 전인미답의 길을 과감히 택할 것인가. 화자는 후자를, 즉 “풀이 우거지고 인적이 없어" 더 끌렸던 길을 택한다. 그리고 이 선택으로 자신의 인생이 달라질 것임을 예감한다. 이어지는 마지막 세 줄은 세상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시 구절 중 하나일 것이다. "숲속에 두 갈래 길이 나 있었다고, 그리고 나는 /나는 사람들이 덜 지나간 길 택하였고/그로 인해 모든 것이 달라졌노라고."

 

중간 부분이 좀 알쏭달쏭하기는 해도 저 마지막 세 줄에 이르면 이 시는 다시 명쾌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감동의 포인트는 두 가지다. 오직 하나의 길만 택할 수 있을 뿐인 인생의 유한성에 대한 회한, 그리고 사람들이 택하지 않는 길을 걸어가는 자의 고독과 아름다움. 그래서 이 시는 다음과 같은 경우에 인용되기 적합하다. 인기 없는 전공을 택해 일가를 이루고 이제는 정년퇴임을 앞둔 노교수가 퇴임사를 할 때, 혹은 이제 막 어떤 정치적 결단을 한 정치인이 자신의 선택은 눈앞의 사사로운 실리를 좇은 것이 아님을 강조하면서 훗날의 역사적 평가를 각오하는 비장한 연설을 할 때 등등.

 

그런데 우리에게 익숙한 이런 독법이 틀렸다니? 문학에서 유일한 정답이란 없으므로 '틀렸다'라는 말은 함부로 쓸 수 없지만, 그래도 작품의 실상과 충돌하는 독법까지 허용되지는 않는다. 이 시에는 우리가 위에서 정리한 이 시의 메시지와 명백히 충돌하는 구절이 얼룩처럼 포함돼 있다. 두 갈래 길 중 사람들이 덜 걸어간 길을 택하겠다고 말한 뒤에 화자는 이상하게도 자신의 말을 스스로 뒤집는 듯한 이런 구절을 적는다. “물론 인적으로 치자면, 지나간 발길들로/두 길은 정말 거의 같게 다져져 있었고,/사람들이 시커멓게 밟지 않은 나뭇잎들이/그날 아침 두 길 모두를 한결같이 덮고 있긴 했지만."

 

이 네 줄은 기묘하다. "정말 거의 같게"나 “한결같이"와 같은 표현들은 앞서 화가가 기껏 부각해둔 두길의 차이를 지우면서 두 길에는 사실상 별 차이가 없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이 시의 후반부에 마련돼 있는 '험로를택하는 자의 고독'이라는 감동적 요소를 스스로 약화시킨다. 그런 감동 때문에 이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네 줄을 불필요하다고 느끼거나 심지어 삭제하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 (실제로 2015년에 방영된 드라마 <프로듀사>에서 주인공이 이 시를 낭독할 때 저 대목은 생각됐다. 물론 시간상의 이유로 생략된 것일 텐데, 문제는 이렇게 생략된 버전이 언뜻 더 깔끔하고 자연스럽게 느껴간다는데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얼룩을 닦아내지 말고 존중하기로 하자. 그러려면 이 시를 처음부터 다시 읽지 않으면 안 된다. 두 갈래 길 앞에 섰다. 둘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화자는 일단 통행이 드물다고 느껴지는 길을 택한다. 그러나 이내 자신이 상황을 과장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두 길에는 사실상 별 차이가 없음을 밝힌다. 바로 이 순간에 화자는 중요한 진실 하나를 간파했으리라, '우리는 자신의 선택에 필연적인 이유가 있기를 원하고, 또 가능하다면 그 이유가 숭고하고 아름다운 것이기를 바란다는 것.' 그래서 화자는 마지막 연에서 예감한다. 자신이 훗날 이날의 선택을 다소 미화된 방식으로 회상하게 되리라는 것을 말이다.

 

이제 우리는 전혀 다른 시를 갖게 되었다. 이것이 이 시의 진짜 얼굴이라 단인은 못해도, 최소한, 간과되어온 다른 얼굴 하나가 여기에 있다고 말할 수는 있으리라. 당시의 여느 전원시들처럼 다정하게 삶의 지혜를 말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은밀한 복화술을 구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프랭크 렌트리키아는 이 시를 "양의 옷을 입은 늑대" (모더니스트 콰르텟)라고 규정한 바 있는데,10년 뒤 데이비드 오어는 이렇게 단언한다. "이 시는 '캔 - 두 개인주의 can-do individualism (나의 선택이 내 인생을 결정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개인주의 - 인용자)'에 대한 경의가 아니다. 우리가 우리인생을 하나의 이야기로 구축하려 할 때 범하게 되는 자기 - 기만self-deception에 대한 논평이다."

 

그렇다면 '백년 동안의 오독'이었다는 것인가. 시인 자신은 무슨 생각으로 이 시를 썼을까. 데이비드 오어가 인용하고 있는 로런스 톰슨의 프로스트 평전에 따르면 프로스트의 절친한 친구였던 영국 시인 에드워드 토머스는 어떤 길을 택하든 가지 못한 다른 길을 생각하며 "한숨" (4연) 짓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프로스트가 이시를 완성하자마자 그 친구에게 보낸 이유를 생각해보면 시인의 작의(作意)를 짐작할 수 있다. 인생에서 절대적으로 올바른 선택이란 없으니, 일단 하나의 길을 택했다면, "가지 않은 길”에는 미련을 갖지 말라는 것. 물론 시인의 취지가 그런 것이었다 한들 논란이 종결되지는 않는다. 작품이 발표된 후 열리는 해석의 경기장에서는 창작자 자신도 단지 한 명의 선수일 뿐이므로.

 

이쯤 되면 우리야말로 여러 갈래의 갈림길 앞에 서 있는 것과 같다. 어떤 길을 택해야 할까. 외로운 선택을 한 사람의 자기 긍정을 표현한 시? 자의적 선택에 사후적 의미를 부여하는 인간의 자기기만을 꼬집은 시? 후회가 많은 이에게 들려주는 부드러운 충고의 시? 나의 대답은, 선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왜 그래야 한단 말인가. "길은 길로 이어지는" 것이어서 한번 놓친 길은 다시 걸을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고 이 시는 말하지만, 작품은 길과 달라서, 우리는 시의 맨 처음으로 계속 되돌아가 작품이 품고 있는 여러 갈래의 길을 남김없이 다 걸어도 된다. 다행이지 않은가. 인생은 다시 살 수 없지만, 책은 다시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신형철 / ‘인생의 역사’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