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 수필

지교헌 / ‘방황과 고뇌의 세월, 나의 참회록’(교음사)중에서

송담(松潭) 2022. 10. 28. 20:33

 

 

 

< 1 >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제일 불편한 것은 아무래도 신발이었던 것 같다. 운동화나 고무신은 너무나 귀하여 여름에는 '게타'를 신고 겨울에는 짚신을 신는 것이 고작이었다. 여름에 게타를 신고 다니노라면 발에 땀이 나서 미끄럽기도 하고 게다 끈이 끊어지면 갑자기 고치기도 힘들었고 게타가 반대편 발목에 있는 복사뼈(거골)를 때려서 진물이 흐르게 되고 이미 진물이 흐르는 곳을 다시 때리게 되면 얼마나 아픈지 자지러질 지경이었다. 어떤 친구들은 겨울이 되어 눈이 쌓여도 게타를 신고 등교하는 수가 있었다. 짚신은 주로 겨울에 신지만, 진 데를 밟거나 눈이 내리면 물기가 스며들기 때문에 양말이나 버선이 젖는 것이 문제였다. 그리고 시골길 시오리라는 것이 실제로는 8km 이상이나 되는데 짚신은 아무리 조심해 신어도 1주일을 신기가 힘들었다. 아버지는 특별히 짚보다 질긴 삼으로 신을 삼아주기도 하고 때로는 고무창을 구하여 밑창으로 대어 주기도 하였다.

 

< 2 >

 

 

1953년 봄 C대학 법학부 정치학과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초등학교 2급 정교사를 양성하는 사범학교를 다닌탓으로 대학에 진학하기에는 매우 불리하였지만 일단 합격하고 나니 소원을 성취한 셈이었다.

 

사범학교 출신이 대학엘 가기가 어려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인문계 고등학교에서는 1주일에 영어 수학 국어를 각각 8시간이나 배우는데 사범학교에서는 겨우 2~3시간밖에 배우질 못하기 때문이었다. 본디 6년제였던 사범학교는 특차로 학생을 모집하는 까닭에 초등학교에서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은 일단 사범학교에 응시하였다가 낙방을 당하고 나서 인문계나 실업계 학교로 진학하기 때문에 사범학교 출신이 다른 학교 출신에 비하여 일단 우수한 것으로 인정은 되었지만, 대학입시에 필요한 과목은 몇 시간 배우지 않고 교육학 분야나 예체능 분야를 많이 배우는 형편이라 인문계 고등학교 출신과 경쟁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청주에서는 다행히도 인문계 고등학교 출신들이 서울로 많이 가기 때문에 지방대학 입시의 경쟁률이 상대적으로 낮아진 덕택으로 나 같은 사범학교 출신이 대학에 합격한 것으로 안다.

 

대학에 합격한 1953년은 한국전쟁이 극도로 치열하였다. 휴전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국군과 인민군은 서로 유리한 지역을 차지하기 위하여 문자 그대로 혈전을 벌였고 양측에서 사상자가 쏟아졌다. 당시 고등학교 출신은 이른바 간부 후보생이 되어 단기간의 기초 훈련만 이수하고 전방의 소대장으로 나갔기 때문에 '소모품 장교'라는 별명이 붙기도 하였다. 1950년 6월 25일, 뜻하지 않은 북한의 침략을 받은 남한은 대구에서 부산에 이르는 일부 지역만을 남겨 두고 모두 인민군에게 점령을 당하였다가 9.28 수복으로 북진을 거듭하였으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다시 서울을 빼앗겼다가 회복하면서 전선(戰線)은 오르락내리락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1953년 당시 대학생만은 징병이 보류되어 너도나도 대학을 지원하기에 혈안이었다. 일단 대학에 가기만 하면 ‘소모품 장교’를 모면하게 되고 학벌도 갖추게 된다는 생각으로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서 입시부정이 만연하여 대리시험까지 저질러지기도 하였다. 국민의 80%가 농민이었던 당시에 많은 부모들은 소를 팔아 자식을 대학으로 보내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기는 쉽지 않았다. 이때 '우골탑'이라는 말이 유행하여 대학의 대명사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 내가 정정당당히 대학에 합격하였으니 하나의 경사나 다름이 없었다. 나는 기뻤다. 고향 마을에서 같은 해에 응시하였다가 낙방한 친구들이 여럿이었다.

 

< 3 >

 

 

처음으로 대학원(법학석사 과정) 진학을 생각하게 된 것은 병역미필자로서 하나의 탈출구를 찾은 것이기도 하고 학부시절에 하지 못한 공부를 보충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문학석사 과정을 다시 이수하게 된 것은 현직 교수로서 강의 준비를 위한 것이었다. 혼자서 자학자습하는 방법도 있지만 사계의 전문가인 동시에 권위 있는 학자들에게 지도를 받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성균관대 대학원에서 두 번째의 석사과정을 이수할 때만 해도 1개의 석사학위 취득하지 않은 교수가 전국적으로 상당히 많은 편이었고 2개의 석사학위를 취득한 사람은 매우 희소한 편이었다. 따라서 1개의 석사학위로 만족하지 않고 또 하나의 석사학위를 취득하는 것은 낭비적이기도 하고 더군다나 석사학위까지 취득한 전공을 제쳐두고 생소한 전공을 택한다는 것은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기왕지사 동양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나로서는 문학석사 과정으로서는 부족하게 느껴졌다. 나는 철학박사 과정에서 좀 더 공부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나는 드디어 입학시험을 치르고 다시 학생생활은 계속되었다.

 

 

< 4 >

 

글을 쓴다는 일은 참으로 조심스러운 일이다. 남에게 비판을 받을까 봐 그렇기도 하지만 남에게 잘못된 지식을 전하고 잘못된 판단을 내리게 함으로써 사회에 그릇된 가치관이나 그릇된 풍조를 조성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내가 쓴 글이나 남이 쓴 글이나 모두 반드시 비판은 받아야 하지만 사회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쳐서는 안 된다. 그동안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기회가 많았지만 그 기회를 충분히 포착하지는 못한 것 같다.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세월이지만 기회를 잘 포착하고 활용해야만 하겠다. 모든 지식인이 글을 쓸 수는 있다. 그러나 부정확한 관찰[경험]에서 잘못된 판단으로 글을 쓰는 것은 사회와 국가의 발전에 역기능을 초래한다. 나는 과외활동으로 출석한 영어반에서 배울 수 있었던 ‘… 관찰은 부정확하고 판단은 어렵다’는 진리를 지금도 되새기곤 한다.

 

< 5 >

 

학문하는 사람은 마땅히 고양이처럼 고독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 학문하는 사람이 장돌뱅이처럼 안 가는 곳이 없이 떠돌면서 약방의 감초가 되어 놀아나다 보면 자칫하면 학문이라는 본령을 지켜 나가기가 어렵게 된다. 더구나 자기의 학문에는 정성을 기울이지 않고 세속적인 단체에 관심을 가지고 엉뚱한 직책(감투)을 탐해서는 안 된다. 학문은 끊임없이 관찰하고, 추리하고, 체험하고, 독서하고 궁리함으로써 조예가 깊어진다. 학문은 분주하게 돌아다녀야만 할 때도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기나긴 고독 속에서 사색하지 않으면 아니 될 때가 많다. 고독은 사색을 가능케 하고 사색은 학문을 깊고 넓게 하며 이론적 수준을 드높여 준다. 시정배들은 고독을 두려워하여 주색잡기를 일삼지만 학문하는 사람은 고독을 즐기고 고독 속에서 자아를 성취해 나간다.

 

< 6 >

 

사람은 누구나 자식으로 태어나고, 동기간으로, 이웃으로, 국민의 한 사람으로 태어난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언제나 외로운 사람이 되어 '단독자'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공부하는 것도, 출세하는 것도, 돈을 벌고 사회사업을 하는 것도 모두 자기의 결단에 따라 그 성패가 좌우되는 수가 많다. 뿐만 아니라 만일 몸이 한번 병들면 아무도 대신하여 아파 줄 수 없고, 고생하거나 늙고 죽는 일이 모두 남이 대신해 줄 수 없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분명한 단독자임을 절감하게 된다. 세월은 흐르고, 몸은 늙고 병들고, 다가오는 죽음에 대하여 오직 불안하고 두려울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생의 가치는 무엇이며 삶의 목적은 무엇이며 죽음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되며 신(神)은 정말로 존재하는지, 그리고 천국이니, 극락이니, 내세니 하는 것은 정말로 존재하는지 알고 싶어진다. 그러나 좀처럼 알 수가 없으니 더욱 답답하고 불안한 일이기도 하다.

 

숙녀는 동쪽 능선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서쪽 능선을 내려가며 그녀의 모습을 머리에 떠올려 보았다. 그의 얼굴은 아직 고운 편이지만 고독한 단독자가 씻을 수 없는 어떤 종류의 우수(憂愁)에 잠겨 있었다. 산책은 산책일 뿐, 우수를 해결해 주지도 못하고 영원의 세계를 깨우쳐 주지도 못한다. 그와 내가 순간적으로 만나서 산책을 하며 짧은 대화를 나누다가 헤어져 자기의 갈 길을 재촉하듯이 인생은 그처럼 자기도 모르고 세계도 모르면서 훌훌 날아 자연의 품안으로 돌아간다.

 

< 7 >

 

나의 경제철학은 사치하지 않고 낭비하지 않으며 절대로 부채를 지지 않는 것이다. 사치하지 않는 것은 비싼 물건이나 불필요한 물건을 사지 않는 일이고, 낭비하지 않는 것은 물건을 아끼고 중고품을 이용하고 절대로 도박하지 않고 허세를 부리지 않는 일이며, 부채를 지지 않는 것은 남에게 돈을 꾸지 않는 일이다. 은행에서 약간의 돈을 대출하여 써 본 일이 있으나 즉시 상환하였고 둘째 아이의 등록금을 ○○○에서 대출한 일이 있었으나 순조롭게 상환하였다. 사범학교를 졸업한 후로 지금까지 사회생활을 겪으면서 외상으로 물건을 사거나 양복을 맞추어 본 일이 거의 없었다. 간혹 책을 월부로 구입한 일은 있어도 아주 부득이한 경우에 그쳤다. 또 복권을 사본 일이 한 번도 없다. 복권 발행의 목적 사업에 협조하는 것도 좋지만 사행심이 발동하기 때문이다. 복권을 사는 것은 도박행위처럼 간주하고 살아왔다.

 

어머니는 항상 '빚 안지면 산다'는 말씀을 자주 들려주셨다. 빚을지는 사람은 나름대로의 이유와 사정이 있겠지만 원금에 이자를 보태어 갚아야 하고 갚지 않으면 인간관계가 깨어지기 쉽다. 젊었을 때 자주 들렀던 대폿집에도 외상은 없었고, 외상하지 않는 것을 자랑으로 알고 살아왔다. 남에게 대접받기를 사양하기 일쑤였고 만일 대접을 받으면 될 수 있는 대로 갚으려고 하였다. 이러한 나의 경제철학은 내자의 경제철학이기도 하다. 그는 평생을 직장에 나가 벌었지만 그 흔한 다이아몬드 반지 하나가 없고 값나가는 물건이라고는 가진 것이 없다. 내자는 나를 뒷바라지하고 아이들을 기르고 가르치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살았다. 그는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의 경제철학을 계승하였다.

 

나의 경제철학은 부모님의 철학이요, 형님들과 형수님들과 누님과 누이동생들의 철학이다. 부모님의 경제철학은 평범한 서민의 철학이요, 가난의 철학인 동시에 복생어근검(福生於勤儉)의 철학이다. (2000. 3. 26)

 

 

< 8 >

 

 

아버님의 교훈은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한마디라도 흘려들을 수 없었지만 이제 말씀을 자주 들을 기회마저 거의 없는 오늘에 와서 되새겨 보면 '진심갈력'(盡心竭力)이 가장 역력히 머릿속에 떠오른다. 무슨 일에 당하여서든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해 나가라는 말씀이시다. 자신이 공부를 하는 데나 남을 가르치는 데나 진심갈력하면 사소한 문제들은 저절로 풀어지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아버님의 가르침이 지천명에 가까운 나의 생애에 커다란 지침이 되었고 무형의 재산이 되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넉넉지 못한 가정에 태어나서 국가적 요청에 따라 대학진학이 일시적으로 좌절되어 일찍이 취직해야만 했고 2부대학 과정을 이수하지 않을수 없었던 나로서는 이러한 아버님의 교훈이야말로 더없이 귀중한 것이었다. 앞으로도 나는 아버님의 생활철학이자 나의 생활철학이기도 한 '진심갈력(盡心竭力)'을 잠시도 놓지 않고 고집할 것이며 글씨로 써서 아내와 아이들과 내 집을 찾는 모든 이들이 함께 볼 수 있도록 거실에 걸어 놓으려 한다. (1981. 3)

 

 

< 9 >

 

 

영국의 시인 퍼시 셸리 (1792-1822)는 「서풍에게」라는 송시(頌詩)에서 '겨울이 오면 봄이 어찌 멀었으리요?’ (If winter comes can spring befar behind?)라고 마지막 글귀를 장식하였다. 시인의 눈은 사납고 차디찬 서풍 속에서도 보드랍고 따뜻한 봄을 뚫어 볼 수 있나 보다. 소한과 대한을 보내고 이제 입춘을 맞이하게 되니 눈보라가 휘날리고 시냇물이 얼어붙는 날씨에도 봄은 성큼 다가오고 있다. 따지고 보면 동지부터 해가 길어지기 시작하였으니 봄이 시작한 것은 벌써 오래전의 일이다.

 

봄은 한 해가 시작되는 계절이요, 추위에 움츠렸던 생명들이 햇볕을 향하여 고개를 들고 일어나는 계절이다. 사람의 눈을 피하여 대만보세(臺灣報歲)가 꽃대를 내밀고 매화의 봉오리가 부풀고 있다. 이제 얼마 안 가 꽃은 피고 새는 울어 춘흥이 넘치게 되고 산야에는 상춘객의 발길이 잦을 것이다.

 

(...생략...)

 

지난 세월을 더듬어 보면 봄은 나에게 헤아릴 수 없이 여러 번 다가오곤 하였다. 봄이 오면 초등학교와 중등학교 시절엔 해마다 봄소풍을 갔었다. 소풍 가는 곳에는 반드시 햇빛이 빛나고 시냇물이 흐르고 진달래가 피어 있었다. 그때의 진달래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진달래는 올해도 예나 다름없이 못 견디게 아름다울 것이다. 박팔양이나 김소월 같은 시인이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은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끼면서 저마다의 가슴속에 아름다운 시를 쓸 수 있을것 같다.

 

이제 봄부터는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는 심정으로 미뤄진 일을 처리하고 틈틈이 짬을 내어 그 옛날 진달래를 보고 가슴속에 써 놓았던 시를 다시 읊조리며, 읽고 싶은 책을 읽으며, 봄이면 남모르게 가슴앓이를 하던 일과, 몸부림치던 어리석고도 아름다운 비밀을 어루만지면서 수필인 듯 소설인 듯 글을 쓰고 싶다.

 

지교헌 / ‘방황과 고뇌의 세월, 나의 참회록’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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