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 수필

100년 만의 물 폭탄

송담(松潭) 2022. 8. 19. 07:48

100년 만의 물 폭탄

 

지 교헌

 

며칠 동안이나 쉬지 않고 비가 내렸다. 천둥도 벼락도 거의 없이 밤낮으로 퍼붓더니 이 곳 저 곳에 물난리가 났단다. 시골에서는 계곡에 물이 넘치고 토사가 밀려 내리면서 마을로 이어지는 도로가 막히고 자동차가 떠내려가고 심지어는 사람이 실종되었는가 하면, 서울의 한 복판에도 물난리가 나서 자동차는 말할 것도 없고 건물에도 피해가 많고, 도로의 맨홀로 어린 남매가 빨려 들어가서 찾을 길이 없고, 반지하실(半地下室)에 사는 일가족이 익사하기도 하였단다. 또한 지하철이 운행되지 못하고 자동차가 다닐 수 없으니 일시적으로나마 교통지옥을 연출한 셈이다. 어떤 시장은 이런 재해를 예방하기 위하여 사업을 추진하였건만 후임시장은 전임시장의 추진사업을 내어던지고 예산을 다른 곳으로 돌려 커다란 재앙을 자초하였다고 한다.

 

그 동안 지방이나 수도권이나 비가 오지 않아 농작물이 마르고 폭염도 곁들이더니 이제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지역에 따라 폭우가 쏟아져 무서운 재앙으로 변하였으니 물가도 오르고 생활도 불편한 것이다.

 

나는 작은 창 너머로 밖을 내다보았으나 홍수를 실감할 수 없어서 해 질 무렵에 개울로 나가 보았다. 먼저 운중천으로 다가 가 보니 하천관리과에서 가꾸어 놓은 아름다운 꽃밭이 모두 망가졌는가하면 벽천(壁泉)의 난간이 부서지고 주변의 나무들은 거의 모두가 쓰러지고 꺾어져서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이윽고 탄천과 운중천이 합수하는 곳에 이르니 두 개의 교량에 부러진 나무들이 어수선하게 걸려 있고 난간이 부서지고 바닥도 많이 파괴되어 있었다. 고수부지에 있는 농구코트의 골대는 여덟 개 가운데 여섯 개가 넘어지고 가로등의 기둥도 하나는 파괴되어 다리 밑에 걸쳐 있다. 십여 년 전에도 폭우에 견디지 못하고 넘어진 나무들을 보았지만 이번에는 견주기 어려울 만큼 훨씬 많은 나무들이 뽑히고 꺾이고 넘어져서 물난리를 실감하게 하였다. 나는 혹시 사진예술의 소재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손자에게 전화를 걸어 알리기도 하였다.

 

나는 초면의 노인을 만나 홍수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동행하여 초등학교 뒤편으로 통하는 지하도에 이르렀으나 진흙벌이 두껍게 덮여 있어서 진입할 수가 없었다. 경로당에 들러서 이야기를 들으니 홍수의 피해는 결코 만만치 않은 것이었고 월척의 물고기들이 고수부지에서 발견되어 여러 마리가 방류되기도 하였단다.

 

나에게는 불교계에 널리 알려지고 있는 이른바 ‘안수등정설화’(岸樹藤井說話)가 떠올랐다. 숲속에는 불길이 번지고 코끼리는 달려오는데 죽을 힘을 다하여 도망치다가 등나무를 발견하여 몸을 숨겼으나 발밑에는 커다란 구렁이가 입을 벌리고, 벽에서는 네 마리의 독사가 혀를 넘실거리는가하면, 붙들고 있는 등나무줄기는 흰 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 갉아먹고 있어서 미구에 끊어질 형편인데 난데없이 다섯 방울의 달콤한 꿀물이 떨어져서 혀로 핥아먹을 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숲 속은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이요, 불길은 여러 가지 재난과 위협이오, 코끼리에 쫓기는 것은 운명이오, 심연의 구렁이는 죽음이오, 네 마리의 독사는 사고(四苦)요, 검은 쥐와 흰 쥐는 밤낮이요, 다섯 방울의 꿀물은 오욕(五慾; 色 聲 香 味 觸)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인간세상이란 그처럼 모든 고통과 시련으로 이루어져 개고(皆苦)와 필멸의 운명에 있으나 순간순간 그것을 잊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들 인간들은 오랜 세월을 두고 자연과 운명 속에서 생멸을 거듭하며 살고 있다. 아무리 팔자가 좋은 사람이라도 물질적인 고통이나 육체적인 고통이나 정신적인 고통을 겪지 않는 사람은 없으리만큼 인생은 그야말로 고해라고 할 수 있다.

 

자연의 재앙은 인간들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서로 뺏고 빼앗기고 죽이고 살리는 비극과 희극을 연출한다. 인류는 수많은 전쟁을 통하여 피비린내를 뿜어왔으며 현재도 그것을 계속하고 있다.

 

나는 문득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이 떠올랐다. 그것은 나의 서재에서 한 쪽 벽을 차지하고 빛이 바랜 모습으로 언제 어느 때나 나를 지켜보고 있다. 그리고 등정에서 모든 불안을 안고 순간순간의 꿀물을 받아 마시며 숨을 할딱이고 있는 나를 응시하면서 어서 읽고 명상하고 깨우치고 수행(修行)하라고 손짓하는 것을 느낀다.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五蘊; 色受想行識)이 공한 것을 비추어보고 온갖 고통에서 건너느니라. 사리자여! 색(色)과 공(空)이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니 색수상행식도 그러하니라. 사리자여! 모든 법은 공하여 나지도 멸하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줄지도 않느니라. 그러므로 공 가운데는 색이 없고, 수상행식도 없으며 안이비설신의도 없고, 색성향미촉도 없으며 눈의 경계도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고, 무명도 무명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늙고 죽음도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지혜도 얻음도 없느니라. 얻은 것이 없는 까닭에 보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함으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며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함으로 최상의 깨달음을 얻느니라. …”

 

뜻이 깊고 논리가 정연하면서도 이해하기 쉬운 말은 아니지만 많이 읽고 해석하고 음미하고 생각하는 가운데 참된 의미를 깨우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선 부처님의 가장 큰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는 대자대비(大慈大悲)를 행하는 것이 아닌가싶다. 남의 즐거움이 나의 즐거움이오, 남의 고통이 나의 고통인지라 결코 둘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여기서 탄천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참한 풍경이나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순과 대립과 파괴가 새로운 건설로 승화될 수 있고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인간은 죽음으로 향해가는 존재(Sein zum Tode)라고 주장하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어제도 죽고 오늘도 죽고 내일도 죽는 것이 인간의 존재형식이다. 그러나 아직은 죽지 않은 인간들이 얼마든지 존재한다. 다시 말하면 살아가는 존재(Sein zum Leben)이다. 아직은 죽지 않고 살아가는 존재인 나와 우리는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을 읽고 외우고 사색하고 실천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죽음에 이르는 병(Krankheit zum Tode)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절망은 금물이다.

 

세상은 권세와 물질에 대한 욕심과 투쟁으로 충만하고 있다. 그것은 결코 지혜로운 모습이 아니고 어리석기만 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거짓과 속임과 태만과 해악으로 내달리지 말고 온 세상을 헤쳐 나가는 커다란 지혜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100년 만의 물 폭탄이 아니라도 우리는 죽어가는 존재인 동시에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절망을 벗어나 희망을 창조하고 용감히 나아가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2022. 08. 13)

 

지교헌

한국공무원문학협회 · 한국문인협회 · 경기한국수필문학가협회 · 수필문학추천작가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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