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 수필

유통기한

송담(松潭) 2022. 5. 1. 17:57

유통기한

 

지교헌

 

 

벌써 10년은 넘었으리라고 생각된다, 금주(禁酒)한 지가. 그런데 며칠 전에 경로당에서 마셔 본 막걸리는 너무나 맛이 좋았다. 김 선생이 가져와 회원들에게 권하던 그 막걸리 맛은 그야말로 천하진미이었다. 김 선생은 막걸리 병을 어루만지기도 하고 주물럭거리기도 하면서 마개를 열지 않고 뜸을 드렸다. 병을 흔들었다가 갑자기 마개를 열면 술이 넘쳐 올라와서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그가 마개를 열고 종이컵에 따라주는 막걸리는 참으로 신기한 맛이 났다. 세상에 처음 보는 맛인 것 같았다. 나는 “세상에 이런 술도 있구나!”하는 감탄과 함께 웃음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보냈다. 김 선생은 또 한 잔의 막걸리를 나에게 권하였고 나는 사양하지 않고 또 한 잔을 슬며시 비워버렸다. 그리고 나는 술을 끊지 않았다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역류성 식도염’ 때문에 10여 년이나 술을 멀리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금주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나는 며칠 후에 내 손으로 막걸리 한 병을 사들고 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며칠 동안에 걸쳐서 술 한 병을 다 마시고 나니 다시 막걸리가 그리워졌다. 막걸리를 마시면 답답한 가슴이 시원해지고 우울했던 감정이 어느 틈엔지 사라지는 것이었다. 나는 이렇게 다시 음주를 시작하게 되었다.

 

바로 사흘 전에는 두 병의 막걸리를 사들고 들어왔다. 값은 잘 기억나지 않으나 결코 비싼 것은 아니었다. 나는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한 병을 움켜쥐었다. 거꾸로 들고 가라앉은 앙금을 풀어지게 하여 한 컵을 따르고 입으로 가져갔다. 역시나 맛이 상쾌하였다. 그럭저럭 며칠이 지나고 한 병을 다 마셔가는데 아이가 왔다. 이것저것 들고 온 것들을 냉장고에 집어넣고 나서 내가 마시다가 남긴 술병을 들고 무엇을 살피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 마디 하였다.

 

“유통기한이 다 되었네요.”

“그러냐? 언제까지냐?”

“오늘까지네요.”

“그래? 그럼 오늘 다 마셔야겠구나.”

“버리셔도 돼요. 아까워 할 필요 없어요.”

“버리다니? 다 마셔야지.”

“유통기한이 지난 것은 몸에 해로울 수가 있어요. 설사가 나기도 하고요.”

“알았다. … ”

 

나는 아이가 제 집으로 돌아간 뒤에 막걸리 병을 꺼내어 살펴보았다. 하나는 “2022.04.07제조. 2022. 04.16까지”이고 또 하나는 “2022.04.09제조. 2022.04.18까지‘이었다. 그러니 유통기한이 빠른 것을 먼저 마시고 늦은 것을 뒤에 마셔야 하거늘 나는 유통기한을 살피지도 않고 뒤에 마셔야 할 것을 먼저 마신 것이었다. 나는 마시던 것을 놓아두고 새 것을 열고 한 잔을 들이켰다.

 

나는 유통기한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막걸리 한 잔을 남겨둔 채 오늘을 넘길 형편이 되었다. 주정 농도가 6도밖에 안 되는 것도 왠지 약한 기분이 들지 않고 어떻든 한 잔이면 거의 만족한 것이었다. ‘유통기한’이라는 낱말이 머리에서 맴돌기만 하였다.

 

나는 생각하였다. 사람은 막걸리의 유통기한을 따지는데 사람에게는 유통기한이 있을까 없을까? 만일 유통기한이 있다면 나의 유통기한은 언제부터 시작하여 언제까지일까? 혹시 내가 출생한 날부터 내가 사망하는 날까지가 나의 유통기한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어릴 때는 세상에 전혀 쓸모가 없었고 이제 늙어서도 쓸모가 없어졌으니 그것을 유통기한에 넣을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면 언제부터 언제까지란 말인가? 혹시 내가 직업을 가지고 생활하기 시작한 날로부터 정년으로 퇴직한 날까지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자영업을 하다가 중지하는 사람도 있고, 기업이나 공직에 근무하다가 사표를 내거나 고용계약기간이 만료하거나 과오로 인하여 징계를 당하여 물러나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그런 사람들의 유통기한은 직업을 그만두는 날이 유통기한의 만료일이라고 할 수 있을지 판가름하기가 쉽지 않다. 유통기간은 충분히 남아 있어도 불행하게 유통하지 못하는 인재들도 무수할 터이니 말이다.

 

아무튼 나는 1953년 4월 7일부터 1998년 8월 31일까지 직장에 근무하였으니 그것이 공인된 나의 유통기한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나는 공직에서 퇴직한 후로도 지역사회의 향토문화연구위원으로, 문학단체의 회원으로, 논문도 쓰고 강의도 하고 수필도 쓰면서 오늘에 이르렀으니 나의 유통기한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것일까?

 

지금 나의 유통기한은 엄밀히 계산하기가 어렵고 객관성도 현저히 낮은 수준이다. 코로나19와 그 변종의 만연으로 사회활동이 거의 마비된 후로는 나의 침실과 주방과 거실과 서재와 베란다에서 남은 유통기한은 거의 모두 소비되고 있다. -잠을 자고 국을 데우고 설거지를 하며 자판을 두들기고 신문을 보고 책을 읽고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라디오를 듣고 스마트폰을 만지고 화분에 물을 주고 더러는 가벼운 산책을 하는 것뿐이니 말이다.

 

그런데 사람마다 유통기한은 다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눈으로 보이는 유통기한만 있는 것이 아니고 눈으로 보이지 않는 여러 가지 유통기한도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공공기관의 공직을 수행하는 위치에서 국가와 민족의 발전과 번영을 위하여 정정당당하고 공정하게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자신의 이익이나 자기의 소속 집단이나 자기의 출신지역이나 친인척이나 동료에게만 유리하게 일을 처리하거나 하여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거나 일탈하는 모든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유통기한을 함부로 훼손하고 초과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그들의 겉모습은 아직도 멀쩡한 상태일지 모르지만 속에서는 변질하여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거나 부패하여 악취가 진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이비지식인들이나 사이비봉사자들이나 사이비공직자들이나 사이비정치인들이나 모두 유통기한은 당초부터 없었거나 애매한 상태에서 만료되는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러나지 않고 그럴듯한 탈을 쓰고 행세하는 인간들은 하루속히 쓰레기처럼 수거되어 폐기되어야만 할 것이다. 유통기한이 지나버린 막걸리나 썩은 공직자가 갈 곳은 오직 수챗구멍이나 쓰레기통이나 감방이나 기껏해야 안방구석일 뿐이다. 속 다르고 겉 다른 자가 감히 그 어디서 사리사욕을 은폐하고 둔갑하여 멸사봉공을 내 세울 수 있단 말인가.

 

나에게는 다른 사람들처럼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이 갖추어져 있고 인식력과 추리력과 판단력도 웬만큼은 갖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때때로 정확하지 못하고 착각을 일으키고 판단을 그르치기를 반복하였다. 관찰은 부정확하고 판단은 애매하고 실천은 더욱 어려웠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나마도 더욱 더 쇠퇴하여 더 많은 착각과 실수와 오판을 범하고 있는 것 같다. 이른 바 유통기한이 지난 지 오래인 샘이다. 그러니 어찌 비좁은 집구석으로나마 스스로 물러서지 않을 수 있으랴. 억지로 끌려 나가 창피하게 심판을 받고 퇴출되기 전에 모든 곳에서 스스로 물러나서 착각이나 오판이나 과오나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뒤늦게나마 냉장고에서 유통기한을 넘기고 폐기되기를 기다리는 나의 가여운 막걸리처럼 안타까운 종말이 다가온 것을 스스로 깨달아야 마땅한 것이다.

 

(2022.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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