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 수필

봄을 맞이하며

송담(松潭) 2022. 3. 3. 07:37

 

봄을 맞이하며

 

 

란타나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이미지 출처 ; 구글 이미지

 

 나는 늘 난타나를 들여다 본다. 파란 녹색 이파리가 무성하고 샛노란 꽃이 피는 것이 신기하게 보였다. 문득 보면 한 송이처럼 보이지만 20~30개의 작은 꽃이 한데 모여 가장자리부터 차례로 안으로 들어가면서 핀다.

 

 처음 난타나를 주워들고 올 때는 이름도 모르고 꽃도 몰랐다. 아파트의 울타리 옆에서 우연히 발견한 것이고 신기하게 보이는 것도 아니고 그저 이름 모를 식물에 지나지 않았다. 생전 처음으로 보게 된 낯선 식물이고 꽃이 피었던 것 같은 흔적이 있어서 가만히 주워들고 보니 누군가가 화분에서 뽑아서 내버린 것이 틀림없었다. 발코니로 가져와서 빈 화분에 심고 물을 주었더니 미처 한 달도 안 되어 꽃망울이 맺히기 시작하고 한 마디에 두 봉오리씩 샛노랗게 꽃이 피는 것이었다.

 

 도무지 이름을 알 수 없어서 휴대전화로 촬영하여 몇몇 사람에게 물어보아도 알질 못하였다. 드디어 막내에게 물었더니 인터넷을 검색하여 사진을 보여주고 이름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나는 그 난타나라는 이름을 쉽사리 잊어버리고 말았다. 궁금증을 오랫동안 참다가 밤중에 일어나 서재로 달려가 인터넷으로 야생화를 검색하고 이름을 다시 확인한 것이었다. 난타나는 품종에 따라 색깔이 여러 가지였다. 노란 것은 노래서 좋았다. 향기는 허브와 비슷한 냄새이지만 그리 좋은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입이나 열매나 꽃이나 독성이 강하여 사람이 먹으면 치명적이라고 하니 두렵기도 하다. 잎이 들깻잎처럼 생기고 친밀감을 주는 한편 독성으로 자신을 방어하는 식물이었다.

 

 꺾꽂이가 잘 된다고 하니 모래를 준비하여 한 번 시도해 보고 싶었다. 꺾꽂이가 잘 된다는 것은 그만큼 생명력이 강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여 살아남는다는 것이었다.

 

 나의 발코니에는 40여 개의 크고 작은 화분이 늘어서 있다. 키가 큰 고무나무가 서너 그루, 군자란이 서너 개, 산스베리아가 서너 개...... 그 중에서 일 년 열두 달 항상 꽃이 피는 것이 꽃기린이다. 꽃기린은 벌써 10여 년 전, 연구원에 근무할 때 부원장실에 근무하는 미스 진으로부터 작은 가지를 얻어서 꺾꽂이로 기른 것이었다. 그런데 작은 가지를 나에게 떼어 준 미스 진은 그 후 건강 문제로 직장을 그만두고 소식이 없었다. 꽃기린을 볼 때 마다 나의 머리에는 미스 진이 떠올랐다. 그는 현모양처형의 인상을 주어서 어딘가에 중매를 서주고 싶었으나 마음뿐이었다.

 

 봄이 되어 두 개의 분에서 난이 개화하였다. 나는 보름 이상이나 날마다 코를 대고 향을 맡았다. 바로 옆에 서 있는 철골소심(鐵骨素心)과 어울려서 보기에 좋았다. 이제 여름이 되어 철골소심이 개화하면 그 향기가 온 집안을 감돌며 성스러운 분위기를 만들 것이며, 나도 모르게 선()의 경지(?)로 들어갈 것이다.

 

 이어서 군자란이 탐스럽게 꽃을 피우더니 다시 석란(?)이 꽃을 피워 눈길을 끌고 있다. 밑은 네모지고 위는 둥근 청화백자 난분에 심겨진 석란은 줄기나 꽃이나 요조숙녀처럼 고고하기도 하고 예술적이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애처로운 인상을 주기도 한다. 내자는 자기가 화분에 옮겨 심은 것이라고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더니, 거실로 옮겨 놓고 향내를 퍼지게 하였다.

 

 다시 또 하나의 꽃이 피기 시작하는 것은 공작선인장이다. 겨우내 얼어 죽을 것만 같던 것이 어떻게 소생하였는지 새빨갛고 탐스런 꽃을 피우고 있다. 거실 안에서 내어다보아도 탐스럽고 신비스럽다. 그런데 그 선인장을 질투하는지 아니면 반가워서 바라보려는지, 키 작은 제라늄이 고개를 들고 꽃을 피우기 시작하였다.

 

 내가 집에서 가꾸는 화초들은 선물로 받은 것도 있고 시장에서 사온 것도 있지만 남이 버린 것을 주워 온 것이 더 많다. 무정하게 버린 사람들은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겠지만 버려진 화초들은 어쩐지 가여운 생각을 일으키게 한다. 나는 난타나를 바라보며 무성한 생장의 저력과, 여름이나 겨울이나 끊임없이 꽃을 피우는 끈기에 감동을 받곤 한다. 꽃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씨앗을 맺어서 종족을 유지하려는 의지일까. 아니면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저 천명을 다하는 생명의 표현일까. 창조주의 뜻은 너무나 오묘하여 허울에 지나지 않는 우상에 사로잡힌 어리석은 인간의 감각이나 판단이나 상상으로 헤아리기 어렵다.

 

 너도 나도 다투어 피는 꽃들은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을 안겨주며 나에게 다가왔다. 봄은 결코 홀로 오지 않았다. 겨울의 인고와 성실을 통하여 꽃과 더불어 나의 가슴 속으로 찾아 들었다. 유리창 너머로는 화사한 백목련과 개나리와 벚꽃이 활짝 웃고 있다.

 

 

지교헌 / ‘그들의 인생철학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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