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 수필

석곡란을 바라보며

송담(松潭) 2022. 3. 31. 15:54

석곡란을 바라보며

 

 

지 교헌

 

우리 집 베란다에는 20여개나 되는 화분들이 나의 시선을 끌고 있다. 그 가운데는 화분도 크고 화초도 큰 것들이 있으나 화분도 작고 화초도 작은 것도 있다.

그런데 최근에 나의 시선을 끄는 것은 두 개의 아주 작은 플라스틱 화분에서 자라나는 무명초였다. 그것은 작년 6월에 아이들이 사들고 온 것인데 붉은 꽃송이가 빽빽한 것이었지만 얼마 가지 않아 모르는 사이에 꽃은 시들어버리고 이파리만 남은 것이 초라하기만 하였다.

 

나는 문득 두 개의 플라스틱 화분에서 화초를 뽑아 좀 더 크고 새하얀 자기화분으로 옮겨서 흙을 조금 넣고 물을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살펴보니 다닥다닥한 검붉은 꽃이 피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나는 그 검붉은 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녹색 이파리에 검붉은 꽃은 어둡기만 하고 답답하기만 하였다. 나는 며칠을 두고 곁눈질만하다가 나도 모르게 하나의 결단을 내리게 되었다. 두 개의 화분을 창가에 있는 커다란 환풍기 상자 위로 옮겨 놓는 것이었다.

 

우선 꽃이 많이 핀 화분을 올려놓고 보니 검붉고 어두운 꽃송이들이 몰라보게 밝은 분홍빛으로 변하여 맵시를 자랑하는 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세상에 이럴 수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나는 주저하지 않고 또 하나의 화분을 들어다 나란히 올려놓았다. 또 하나의 화분은 이파리가 무성하고 꽃은 아주 적었지만 그것이 결코 초라하지 않고 또 하나의 화분과 아주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연분홍 꽃과 푸른 이파리가 서로 어울려서 훌륭한 작품으로 변모한 것이었다. 꽃은 하나의 줄기에 여러 개가 줄지어 피면서 붉은 색과 하얀 색이 조화를 이루었다.

 

두 개의 화분은 멀리 푸른 산이 보이는 확 트인 공간에서 굽이쳐 오는 아지랑이와 하늘에서 쏟아지는 태양의 광파(光波)를 받아 황홀하게 빛나는 것이었다. 나는 거실을 향하여 소리쳤다.

“여기 와서 꽃 좀 보세요!”

“아아, 참 아름답네요. 어떻게 …?”

“……”

“……”

베란다의 바닥에서 키 큰 화분에 가려 있다가 높은 공간에서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빛나는 두 개의 화분은 문자 그대로 하나의 예술품이었다.

“그렇지. 예술품이지!”

 

나는 화분에 꽂혀 있는 하얀 이름패를 살펴보았다. ‘킨기아넘’이라고 쓰여 있었다. 처음으로 보는 것이었다. 그 때 마침 둘째 아이가 찾아 왔다.

“애야, 저 꽃 좀 보아라!”

“·… 꽃이 피었네요. 참 예쁘네요.”

“이름이 무언지 아니?”

“ ‘킨기아넘’ 아니에요?”

“어떻게 알지?”

“제가 가져 온 것인데 모를 수가 있나요?”

나는 그 아이가 가져 온 것도 몰랐고 이름도 너무나 생소하였다.

자판기를 두들겨 보았다. ‘Dendrobium Kingianum’이고 원산지는 오스트랄리아란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페라고눔’이라고도 부르고 석곡란(石谷蘭)이라고도 부른단다. 나는 다시 꽃말을 검색하였다. ‘말괄량이’ · ‘미인’이었다. 꽃이 아름다운 것처럼 꽃말도 아름다웠다. ‘말괄량이’도 그렇지만 ‘미인’이라는 꽃말을 가지고 있는 꽃이 또 어디에 있을지 모르겠다. 아마도 없을 것 같다.

미인이라는 말은 듣기만하여도 가슴이 설레고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다. 나는 일찍이 미인들을 많이 보았고 그들을 볼 때마다 공연히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도 같고 내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도 같았다. 아마도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이 진리를 체득하였을 때와 같은 경지가 아닐까 싶다.

 

나는 미인들에게 프러포즈한 기억이 떠올랐다. 그 프러포즈의 짓거리는 모두 맑은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처럼 현실과는 너무나 먼 것이었다. 현실과는 너무나 먼 꿈의 세계에서 수줍은 마음을 뜨겁게 달구며 어렴풋이 사랑을 고백한 셈이었다. 조물주의 피조물 가운데 미인보다 아름다운 것이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없을 것 같았다. 미인을 발견하고 미인에게 프러포즈하는 것은 얼마나 당연하고 아름다운 일인가. 그보다 더 아름다운 도전은 없다고 생각하였다. 비록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였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지금 생각하여도 아름답기만 한 것이었다. 그런데 가만히 따지고 보면 실패도 아닌 것 같다. 미인을 발견하고 미인에게 사랑의 감정을 전하는 것이 어찌 잘못이며 미인은 미인대로 행복을 느꼈을 터이니 그 또한 행복이 아닌가.

 

나는 지금 그 아름다운 기억을 더듬으며 석곡란에 가까이 다가서서 고개를 기웃거리며 향기를 맡고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너는 미인이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끊임없이 고백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사랑하는 석곡란은 바로 코앞에서 바라보는 것보다는 조금 떨어진 거실에서 유리창너머로 바라볼 때 더욱 아름답게 환상적으로 보인다. 마치 미인을 바라볼 때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는 것이 더욱 아름다운 것처럼, 남모르게 짝사랑을 하는 것처럼, 바로 그런 것이다.

 

한국의 ‘석곡란’은 전남의 목포와 완도, 경남, 제주 등지의 산지(山地)에서 자라며, 상록다년생 식물이며, 서양의 덴드로비움 보다 향기가 짙다고 한다. 열대에서는 나무나 등걸에 붙어서 사는 착생란(着生蘭)이며 뿌리가 노출되어야 잘 살고 습도가 높아야 한단다. 그리고 깔깔대는 소녀의 얼굴처럼 귀엽다는 말도 나온다. ‘깔깔대는 소녀의 얼굴’이라니! 참으로 아름다운 말이다.

나는 석곡란을 바라보며 잡념에 사로잡혔다. 천진난만한 소녀처럼 깔깔대는 아름다운 꽃이 예쁘기만 하다.

식물의 세계도 그럴진대 인간의 세계는 어떨까. 인간들 가운데도 한때 나의 석곡란처럼 아름다운 모습과 향기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멀리 어둡고 그늘 진 응달에서 빛을 받지 못하고 소외되어 일생을 보내는 사람들이 허다할 것 같고, 그 반면에는 사리사욕에만 얽매이고 대단한 능력도 없고 오만불손하기만 한 인간들이 높은 자리에서 권세를 부리고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수도 많을 것 같다.

 

향기롭고 아름다운 석곡란이 자리를 옮겨 참모습을 드러내고 밝고 아름답게 빛나는 것처럼, 방방곡곡에 숨어있는 훌륭한 인물들이 세상에 나타나 아름다운 향내를 내뿜고 아름다운 빛을 발휘하기를 바란다.

(2022. 03. 15)

-----------------------

지교헌

한국공무원문학협회 · 한국문인협회 · 경기한국수필문학가협회 · 수필문학추천작가회 회원 e-mail d424902@hanmail.net

'청계산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100년 만의 물 폭탄  (0) 2022.08.19
유통기한  (0) 2022.05.01
봄을 맞이하며  (0) 2022.03.03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0) 2021.09.06
사설(師說)-한유(韓愈 )  (0) 2021.0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