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산 수필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송담(松潭) 2021. 9. 6. 13:44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지  교  헌

  

사람들은 모이면 잡담을 나누기가 다반사이고 잡담이 벌어지면 남의 이야기에 대하여 반드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때는 식당에서 찬 물이 싫다고 더운 물을 찾는 사람이 있어서 그것 때문에 입씨름이 벌어지기도 한다.

  “왜 더운 물을 찾지요? 찬 물이 시원하고 좋은데?”

  “우리 몸엔 더운 물이 좋거든요. 더운 물이 암세포를 억제할 뿐만 아니라 체내의 지방질도 녹여서 응고를 막아 주니까요.”

  “나는 육각수가 몸에 좋다고 들었는데 육각수는 찬물이거든요. 그리고 자기 생각이 항상 옳다는 독단적인 생각은 버려야 한단 말이오.”

  “내 말을 꼬집고 비난하는 당신이 독단이지 내가 무슨 독단이란 말이오?”

  더운 물이 건강에 좋다는 주장이 있는 것처럼 찬 물이 건강에 좋다는 주장도 있으니 어느 하나가 반드시 옳거나 그른 것이 아닌 경우가 많다. 다만 사람에 따라 건강상태가 다르고 생리적 조건이 다르고 식생활습관이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위에서 ‘찬 물’과 ‘더운 물’을 가지고 서로 다투는 것과 같이 약물(藥物)을 가지고 다투기도 한다. 약물이 질병을 치료하는 데 필요하긴 하지만 자칫하면 오히려 질병을 악화시킬 수도 있다. 실지로 음료수나 약물이 건강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경우에 따라 완벽하게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물이나 약물을 가지고 서로 다투는 것은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다. 그보다 더 대단한 것은 국가의 이념이나 정책이나 전략이나 전술이다. 전자는 그 영향력이 비교적 작은 편이지만 후자는 그 영향력이 매우 커서 국가의 존망이 좌우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8 ․ 15광복 이후로 지금까지 이른바 좌익과 우익, 진보와 보수라는 두 진영의 여론과 세력이 형성되어 빈자와 부자, 근로자와 사용자, 민주와 독재, 분배와 성장, 친북과 반공, 반미와 친미 등으로 대립하고 갈등하면서 사회적 불안이 이어져 왔다. 특별한 전문가가 아닌 일반국민들은 그 어느 한쪽에 설득을 당하여 행동하거나 아니면 양시양비론으로 기울어져서 판단하기가 어렵고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사람이 말로 정확히 표현할 수 없을 때 할 수 있는 행동은 침묵이나 미소로 나타나기도 한다. 김유근(金逌根)의 글로 알려진 ‘묵소거사자찬’ (黙笑居士自讚)을 보면 ‘당묵이묵 근호시 당소이소근호중 …… 불언이유하상호묵 득중이발하환호소’(當黙而黙近乎時 當笑而笑近乎中 …… 不言而喩何傷乎黙 得中而發何患乎笑)라는 글귀가 있다. 마땅히 침묵해야할 때 침묵하는 것은 상황에 적절히 맞는 것이요 마땅히 웃어야 할 때에 웃는 것은 중(中)을 얻는 것이다. …… 말하지 아니해도 깨우친다면 어찌 침묵이 손상될 것이며 중을 얻어서 발한다면 어찌 웃음에 걱정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추사 김정희(金正喜)와 이재 권돈인(權敦仁)과 황산 김유근은 수시로 만나서 학문을 주고받았는데 김유근이 실어증으로 말을 못하게 되어 침묵과 웃음으로 소통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람의 의사소통은 이심전심으로 이루어지는 수가 많다. 그러나 서로의 이해와 공감이 없을 때에는 무슨 말을 하여도 의사소통의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불협화와 언쟁과 갈등으로 나타나는 수가 많고, 일반적(보편적 ․ 규범적)논리와 개별적(특수적 ․ 상황적)논리가 체계를 이루지 못하고 난맥을 빚을 때 논리의 허점이 드러나고 공감대가 깨어지고 소통의 길이 막히기 쉽다.  

 

  본디 언어는 부정확하고 불확실하고 애매모호하여 다 같은 말이라도 때와 장소와 말을 주고받는 당사자들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차라리 침묵이나 미소가 진실을 전달하는 데 효과적으로 기능할 수가 있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소크라테스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는 자기만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아테네 시민들이 모두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러면 소크라테스와 아테네 시민들과는 어떤 점에서 차이가 있을까? 그것은 소크라테스가 ‘그러나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고 말한 것을 통하여 알 수 있다. 따라서 아테네 시민들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르지만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만은 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나타난다. 그는 무지(無知)의 자각을 지혜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이다. 공자도 ‘내가 아는 것이 있느냐? 나는 아는 것이 없다’(吾有知乎哉 無知也)고 말하고, 노자는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모른다’(知者不言 言者不知)고 하였다.

 

  소크라테스와 공자는 왜 ‘모른다’고 말하고 노자는 왜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는다’고 하였을까? 사람의 인식의 대상이 되는 사물은 결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 너무나 많다. 글(書)은 사람의 말(言)을 다 나타내지 못하고 말(言)은 사람의 뜻(意)을 다 나타내지 못한다고 하는데 뜻은 사물의 본질과 실체를 다 나타내지 못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의 경지도 비슷한 경우라고 보인다.

 

  성인(聖人)들이 ‘모른다’고 말한 것은 음식물이나 약물과 같은 비근한 경우를 훨씬 초월하여 학문적이고 철학적인 기본을 말한 것이지만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의 원리에 연관되어 있다. 하늘을 보고 땅을 살피는 것이 관찰(觀察)이고 지극한 지혜는 격물(格物)에 있다고 할 때 구체적인 형이하학적 사물로부터 추상적인 형이상학적 원리가 도출되는 것은 다시 말할 나위 없기 때문이다.

 

  자신을 돌이켜보면 나는 도무지 무엇을 알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나이가 점점 많아짐에 따라 아는 것도 점점 더 많아졌겠지만 그렇다고 하여 모르는 것이 줄어 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늘어나기만 한 것 같다. 이를테면 <<대학>>의 8조목이라고 하는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의 그 어느 것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진실로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엄연한 사실인데 다만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만은 어렴풋이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나도 문득 성인의 경지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일까.

 

  나도 이제 성인들처럼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선언해도 좋을까. 그러나 그 성인들을 함부로 흉내 내는 것도 무엄한 일이니 참으로 딱한 일이다.(끝)

 

* 이 작품은 2012.11.20 <경기수필>29집 pp.219-222 에 게재하였음.

 

 

 지교헌 (d424902@hanmail.net)

 

1994. 7 [월간수필문학] 추천완료

동촌지교헌수필집 7권 및 장편소설 2권 발간

수필문학추천작가회, 한국문인협회, 국제PEN클럽한국본부 회원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학대학원 명예교수 (현재)

 

 

출처 : (사)경기한국수필가협회(다음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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